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밤의 도시를 바라볼 때처럼 명확해질 때는 없다.
어두운 천지에 저마다 연등을 달아놓듯
빛나는 자리마다 욕정이, 질투가, 허기가 있다.
이것보다 명확한 것이 있는가.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입술을 적시는 메마름과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탄식들.
일테면 심연에 가라앉아 느끼는 목마름.
구할 수 없는 것만을 기도하듯
간절함의 세목 또한 매번 불가능의 물목이다.
오늘은 내가 울고
내일은 네가 웃을 테지만
내일은 내가 웃고 네가 기도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울다 잠든 아이가 웃으며 잠꼬대를 할 때,
배 속은 텅 빈 냉장고 불빛처럼 허기지고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아프게 구부러지는 기도처럼, 빛이 흰다.
([생활이라는 생각]. 창작과 비평사. 24 -25)
---
얼마 전 아는 분과 신천역 먹자(먹걸이) 골목에서 낮술을 한 잔 한 적이 있었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는 않아, 대리를 하자니 돈이 아깝고, 음주 운전은 겁이 나고. 그래서 내친 김이라는 생각에, 화제가 되고 있는 박찬욱의 "아가씨"를 롯데 시네마 월드타워점에서 보기로 했다. 밤이 점점 깊어 가는 가운데 신천역에서 석촌 호수를 거쳐 영화관이 있는 제2롯데월드로 가는 도중에, 밤거리의 그 휘황찬란함과, 넘쳐나는 사람들과, 또 저마다의 욕망의 열기를 느끼면서, 글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끓었고,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박남철의 '자본에 살어리랏다'라는 시 제목이 떠올라 이 제목으로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영화관으로 가는 길에 잘못 들어가서 명품관으로 들어갔는데, 선글라스에 구십이 만 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본 것. 구만 이천 원을 잘못 읽은 줄 알았으나, 다시 보아도 920,000이었다.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우리를 좌절시키는 이 과소비의 문화. 그 과소비 위에 유지되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이 시의 첫 연은 그 때 느꼈던 감정을 적실하게 요약해주고 있는 듯해서 마음에 든다. 그 다음 시인은 자신의 특기인 경구적인 문구로 우리의 인생살이를 짚어나간다.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이 표현. 내가 적어보고 싶은 - 그러나 감히 엄두가 잘 안 나는 - 내 정신적 고뇌의 순간들을 떠올려 볼 때, 가슴에 그대로 꽂히는 표현이다. 마지막 행은 좀 까다로운데, 좀 주관적인 생각은, 실제로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 엄청나게 확대된 빗방울에 빛이 어리는 모습이 연상이 되고, 현실을 넘어가는 상상력 쪽으로 읽고 싶다. 그것이 분명 긍정만은 아니겠지만, 답답하고 제한적인 현실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같은 학교에 근무를 하고 있는 선생님 중에 다소 무뚝뚝한 국문과 선생님이 있었다. 그 분과 우연한 기회에 이야기를 잠시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바로 이현승 시인이었다. 요즈음 시를 잘 안 읽고 있어서, 나는 그 분의 이름을 접한 적이 있는 듯 없는 듯 했는데, 나에게 최근에 나온 자신의 시집을 한 권 주셔서 열심히? 읽고 있다. 좋은 시들이 많은데 일단은 이 시에 가장 눈이 간다.
'한국시 및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혜순 - 귀 (0) | 2016.08.30 |
---|---|
박남철 - 자본에 살어리랏다 (0) | 2016.07.08 |
곽재구 - 절망을 위하여 (0) | 2016.06.11 |
이현승 - 별에 기대어 말하다 (0) | 2016.06.09 |
송인 - 정지상 (0) | 2016.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