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 귀
누가 멀리서 북을 치고 있나?
나는 자전거를 타고 그 북소리를 찾아간다
내가 속력을 내면 낼수록
몸이 태아처럼 구부러진다
태아는 귀 모양으로 생겼다
북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이번엔 내 몸 전체가 귀다
나는 자전거를 탄 채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다 내려가면 그림자의 나라로 들어서는 입구가 나온다
나는 귀처럼 웅크린 몸에 탯줄처럼
늘어진 이어폰을 꽂고 전속력으로
그 나라로 들어간다
하루 종일 쓰고 다니던 가면이 내 얼굴 속으로 들어오고
오도 가도 못 하던 별들이 꺼지며 운다
그 나라의 중앙 광장엔 달아오른 북이 스무 개 서른 개
곧 만날 네가 그렇게 많은 내 심장을
북채로 탕탕 치며 맴돌고 있다. 돌 아 보 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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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이 시의 시적 정황을 우선 산문적으로 풀어보면, ‘화자는 북소리를 듣고, 자전거를 타고 그 북소리를 찾아간다. 자전거를 탄 채 계단을 내려가서 그림자의 나라로 들어가면, 그 나라의 중앙 광장에서는 곧 만날 네가 북채로 내 많은 심장을 탕탕 치고 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의 축어적 의미는 대충 이 정도록 어렵지 않게 파악된다. 그렇다면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화자는 왜 하필이면 자전거를 타고 달릴까?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속력을 내어서 몸이 태아처럼 구부러지고, 그 구부러진 태아는 귀를 닮고, 북소리가 점점 더 커짐에 따라 화자의 몸 전체가 귀가 되는 과정은 시인의 시적 상상력의 전개이고, 우리가 보기에도 무리가 없다. 문제는 ‘나는 자전거를 탄 채 계단을 내려간다’이다. 자전거를 타고 계단을 내려가는 행위는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행위이다. 이 무모한 행동은 꼭 북소리의 진원지로 나아가겠다는 화자의 신념을 반영한 듯 하다. 그리고, 계단 위의 세상과 계단 아래의 세상은 분리되어 있다. 계단이 끝나는 곳은 ‘그림자의 나라로 들어서는 입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자의 나라’는 또 무엇인가? 실체를 반영하는 것이면서, 우리가 보통 신경을 쓰지 않는 우리의 이면이리라. 그런 나라로 화자는 전속력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다음 행이 재미있다.
나는 귀처럼 웅크린 몸에 탯줄처럼
늘어진 이어폰을 꽂고 전속력으로
그 나라로 들어간다
현실적으로 화자는 성인으로 보이지만, 자꾸만 등장하는 태아의 이미지와, 그리고 급기야 등장하게된 탯줄의 이미지는, 이 시가 ‘모태’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탯줄’이란 어머니아 태아를 이어주는 끈이 아닌가? 그 나라로 들어선 화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하루 종일 쓰고 다니던 가면이 내 얼굴 속으로 들어오고
오도 가도 못 하던 별들이 꺼지며 운다
‘오도 가도 못 하던 별들이 꺼지며 운다’는 행이 암시하는 바는 짐작하기 쉽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상황이 해소 되었다”는 점이다. 그 해소가 “꺼짐과 울음”이라는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지만. 그 다음은 그림자의 나라로 들어온 화자는 곧 너를 만나게 될 것인데, 너라는 존재는 스무 개 서른 개 되는 달아오른 북을, 즉 화자의 심장을(왜 달아올랐을까?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왔으니까? 너를 만나리라는 기대감에) ‘북채로 탕탕 치며 맴돌고 있다.’ 이 구절에서 보면 너라는 존재가 화자의 심장(핵심적인 어떤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화자는 사실 심장이 없는 채로 살아온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화자는 왜 이다지도 많은 심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돌 아 보 지 마!’라고 말하는 이는 너인 듯 하다. 아마도, 화자가 여기까지 왔으니까, 다른 것에는, 혹은 계단 위의 세계에는 신경을 끄라는 말이 아닐까?
이 시에는 모태로의 회귀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다. 본래적인 나, 생명력이 넘치는 나의 모습을 찾으려는 것이 시인의 주된 의도가 아니었나 한다. 이 모태로의 회귀 혹은 진입 후에 화자는 너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는 데, 이 너라는 존재는 어머니나 근원의 이미지로 온다.
(덧붙임. 이 글을 적은 것이 2000년 정도였던 듯한데, 이 시의 감상은 당시 [시작법] 수업을 강의하던 이승훈 시인의 해석에서 상당 부분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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