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 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 나희덕의 현대시 강의 (《한 접시의 시》, 2012, 창비),
한국 현대 시에서 '극지의 정신'을 보여 준 시인으로 흔히 이육사를 꼽습니다. 이육사의 시 <절정>, <광야>, <꽃> 등에 등장하는 북방, 고원, 광야, 툰드라는 모두 극지를 표상하는 시적 공간들이지요. 시인은 그 극한적 상황을 초극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남성적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절정>)라는 역설 역시 절망의 극한에서 발견한 희망을 상징합니다.
여기, 극지를 노래한 또 다른 시가 있습니다. 이성복의 <극지(極地)에서>는 극한의 공간을 그리고 있지만, 그 공간을 내면화하는 방식은 이육사의 시와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이 시에는 이육사의 시에서처럼 빛나는 '절정'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얼어붙은 호수와 흰 북극곰 새끼뿐, 푸른 잎새도 마른나무 작대기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극지에서>는 2008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가운데 한 편인데요. 이성복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불가능에 대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디 문학에 대한 사랑만이 불가능한 사랑이며, 또한 단지 사랑만이 불가능일까요. 모든 존재, 모든 사태는 불가능이며 그것들을 드러내는 언어 곁에는 필히 불가능이 따라붙습니다. 어쩌면 언어는 불가능을 숨기기 위해서만 존재와 사태를 보여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20210917) 극지(極地)에서 - 이성복|작성자 서창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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