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이후 미국 현대 드라마의 흐름, 트레이시 렛츠(Tracy Letts)의 [8월 : 오세이지 카운티]의 상호 텍스트 성,
드라마의 구조에 있어서의 새로운 시도가 갖는 함의 등을 간략하게 살펴본 글. (2010)
1. 1990년대 이후 문화적 표현으로서의 미국 드라마
해마다 무수히 많은 수의 드라마들이 창작되고 공연되는 가운데 몇몇 소수의 작품들만 가지고 미국 드라마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은 당연히 무모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90년 이후 지난 20년간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놓고 거시적인 맥락에서 볼 때, 백인 남성 극작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 소수의 여성, 흑인, 라틴계 극작가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데이비드 헨리 황(David Henry Hwang), 테렌스 맥낼리(Terence McNally), 토니 쿠쉬너(Tony Kushner), 도널드 마굴리즈(Donald Margulies), 더그 라이트(Doug Wright),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 트레이시 렛츠(Tracy Letts), 사라 룰(Sarah Rhul), 닐 라뷰트(Neil LaBute)의 작품들이 지닌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미국 드라마의 흐름의 한 단면을 조망해 보겠다.
먼저, 미국 내 소수 인종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라틴계 미국인들, 아시아계 미국인들, 미국 원주민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의 소수 인종으로서의 차별과 아픔을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꾸준히 발표해 왔으며 이러한 흐름은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가장 큰 차별과 핍박을 받았던 흑인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작품으로 발표해 왔는데, 1987년과, 1990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어거스트 윌슨(August Wilson)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을 연작 형식으로 발표했다. 2002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수잔-로리 팍스(Suzan-Lori Parks)도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들의 삶에 관한 불연속적이고 포스트모던한 회상극 형식”(브로켓 434)으로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아시아계 작가 중에서는 데이비드 헨리 황이 돋보이는데 동양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비난한 ?M. 나비?(M. Butterfly)를 필두로, 미국 내에서 아시아계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조망한 ?누런 얼굴?(Yellow Face 2007) 등을 통해 소수 인종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테렌스 맥낼리, 토니 쿠쉬너, 더그 라이트, 에드워드 올비 등은 동성애의 문제나 사회적 금기의 자의성 등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에이즈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8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맥낼리와 쿠쉬너의 ?입술은 붙이고, 이는 떼고?(Lips Together, Teeth Apart 1991)와 ?미국의 천사들?(Angels in America 1990, 1991)은 각각 에이즈로 죽은 동성애자인 가족의 일원을 두고 한편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용납하지 못하는 양가적인 측면과, 동성애자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워 미국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에 다양하게 접근하면서 그 해결책을 암중모색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라이트의 ?내 부인은 나?(I Am My Own Wife 2003)는 동성애를 허용하지 않던 나치 제국과 동독이라는 세계에서 살아남은 동성애자 샤를로테 폰 말스도프(Charlotte von Mahlsdorf)의 삶을 극화한 것으로 한 인물이 이 극에 등장하는 35명의 역할을 모두 연기하게 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한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성성이나 여성성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고정될 수 없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올비의 최근작인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The Goat or Who Is Sylvia?)는 염소와 사랑에 빠진 한 중년 남자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인 금기의 기준이나 그 허용의 범위 등에 근본적인 회의의 시각을 보이고 있다. 이 극에서는 사회적 금기를 어긴 주인공을 주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엄청난 혼란과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회적 금기의 기준이나 근거 등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광적인 정도의 비난과 혐오를 보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을 반영한 것이다. 이들 작품들은 모두 사회적 금기와, 그것이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기재로 작용할 때의 심각한 갈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도널드 마굴리즈와 트레이시 렛츠의 ?친구들과 저녁 식사?(Dinner with Friends 2002)와 ?팔월: 오세이지 카운티?(August: Osage County 2007)는 각각 결혼 생활의 어려움과 가족 관계의 이면에 놓인 추악한 현실 등 미국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가정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마굴리즈의 경우에는 결혼 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한 쌍과 결혼 생활이 파국에 이른 한 쌍의 모습을 제시하여 우리의 삶이 각자의 선택에 따라 진행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렛츠의 경우에는 가장의 실종과 자살, 그리고 그것에 이어 가족 관계가 완전히 해체되는 과정을 극단적으로, 또 아무런 긍정적인 해결책이나 실마리도 없이 제시하고 있다.
사라 룰은 ?죽은 사람의 휴대폰?(Dead Man's Cell Phone 2007)은 현대인의 생활을 상당 부분 바꾸어 놓은 휴대폰이라는 소재를 선택하여 이 문명의 이기가 우리의 공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사적인 공간까지 얼마나 광범위하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환상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예뻐야 할 이유들?(Reasons to Be Pretty 2008)에서 닐 라뷰트는 ‘미’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신기루 같은 것임을 강변하고 있지만, 그의 말이 비록 옳은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현상적으로 미가 갖는 힘을 생각할 때에는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지는 미지수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두 작품은 한편으로는 공통적으로 젊은 남녀의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90년대 이후의 미국 드라마의 몇몇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 특징을 살펴본 결과, 사회적 소수자, 즉 소수 인종이나 동성애자 등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밖에 전통적으로 다루어져 온 가족이나 사랑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도 눈에 띤다. 물론 여기서 다룬 몇 작품을 가지고 미국 드라마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는 힘들겠으나 토니 쿠쉬너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미국의 정치적인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도 드러난다(데이비드 헨리 황의 작품에서는 중국계 미국인을 스파이로 몰아, 미국 내 중국계의 성장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이것도 미국의 정치적인 현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드라마라는 장르가 당대의 현실을 가장 첨예하게 다룰 수 있는 장르라는 점을 생각할 때 2000년대 이후 복잡하게 전개되는 미국 내의 정치 상황이나 국제 관계들을 다룬 작품이 눈에 띠지 않는 것은 필자의 과문이겠지만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
인용문헌
브로켓, 오스카 G.(Brockett, Oscar G.) & 프랭클린 J. 힐디(Franklin J. Hildy). ?연극의 역사 II?. 전준택 & 홍창수 옮김. 서
울: 연극과 인간, 2005.
2. 트레이시 렛츠의 ?팔월: 오세이지 카운티?와 상호텍스트성
2008년 뉴욕 드라마 비평가 상, 퓰리처 상, 토니 상 등 드라마 부분 3대 주요 상을 수상하여 평단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트레이시 렛츠(Tracy Letts)의 ?팔월: 오세이지 카운티?(August : Osage County)는 현재 미국 가족 관계의 감추어진 실상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작품이다. “가족 간의 재회란 문어가 들어있는 물탱크로 뛰어드는 것 같다”(7)는 작품 앞부분에 인용된 로버트 펜 워런(Robert Penn Warren)의 ?왕의 남자들 모두?(All the King's Men)의 한 구절처럼, 아버지의 실종과 죽음을 계기로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가족들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서로 위로하고 감싸 안기보다는, 오히려 서로가 안고 있는 문제나 상처에 공격을 가하고, 또 감추고 싶은 비밀을 폭로하는, 그래서 가족이 철저하게 해체되고 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 희곡에서 가족의 문제라는 주제는 지속적으로 다루어져 온 것이긴 한데, 이 작품처럼 아무런 긍정적인 해결책이나 실마리를 제시하지 않는 경우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작품은 앞선 세대의 여러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그들의 성격을 모방, 변주하고, 또 작품의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차용한 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작품과 다른 작품들 간의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이 작품은 아버지의 자살이 작품의 한 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두 작품에 있어서의 아버지의 죽음은 전혀 다른 양상인데, 왜냐하면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아버지의 자살이 작품의 주인공인 윌리 로먼(Willy Loman)의 자기인생에 대한 자각과, 가족애의 확인, 그에 따른 자기희생의 측면이 부각되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인 베벌리 웨스턴(Beverly Weston)의 실종과 자살이 작품의 초반부에 일어나 독자로서는 그의 죽음의 동기를 막연한 정도로 추측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의 죽음이 결말이 아니라 이 가족이 안고 있는 문제가 표면화되어 드러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일즈맨의 죽음?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 로먼의 경우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평범한 인물이 깨닫게 되는 삶의 환멸이 중심적인 문제로 작용한다면, 한 때 촉망받는 시인이었고 교수인 웨스턴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의 비관적 세계관과 현대 미국에 대한 진단의 측면을 띤다고 할 것이다. 그의 딸인 바바라(Barbara)가 전해 주는 그의 말 “이 나라는 언제나 매춘굴 같았지만, 적어도 뭔가 기대할 만한 것은 있었거든. 그런데 이젠 단지 똥통에 지나지 않아”(123)는 이러한 견해를 더욱 강화해 준다.
그리고, 어머니인 바이올릿(Violet)이 한 차례 약물 중독으로 입원한 경력이 있다던가, 또 현재는 구강암 때문에 약물에 중독된 상태라는 점은,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의 메리(Mary)에서 차용한 인상을 준다. 아이를 잃고 난 뒤 생긴 몸의 통증을 완화하려 먹게 된 진통제 때문에 약물 중독에 빠졌다가 회복되었지만, 다시 약물 중독으로 빠져드는 그녀의 모습은 이 작품의 바이올릿과 많이 닮아있다. 하지만 메리가 가족들과 다소 동떨어지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바이올릿은 약물 중독이 심한 경우에는 의사소통 자체가 어려운 면도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가족들이 가장 아파하고, 또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들을 거침없이 늘어놓는다. 이러한 독설가로서의 바이올릿의 모습은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의 부부, 조지(George)와 마사(Martha)가 상대방을 서로 물어뜯을 것처럼 신랄한 대사를 퍼붓는 모습, 그 중에서도 특히 마사의 모습과 잘 겹쳐지기도 한다. 올비의 작품이 현실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이해하기 힘든 부조리적인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반면, 이 극은 무대 배경에서부터 아주 사실적인 상황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바이올릿의 독설이 독자나 관객에게 더욱 강한 충격으로 작용한다.
이상 간략하게 살펴본 것 외에도 트레이시 렛츠의 작품은 유명한 여러 작품들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들을 차용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렛츠 자신 이러한 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려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교묘하게 위장하려 하거나 하지 않는다. 표절과 적절한 차용의 문제는 그 경계나 기준이 애매한 것이긴 하겠으나, 이 작품의 경우,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가족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기존의 잘 알려진 작품들에서 일정 부분 차용하고, 또 그것을 잘 조합해서 균형이 잡힌 새로운 작품을 생성해 내었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용문헌
Letts, Tracy. August: Osage County. New York: Theatre Communication Group,
2008.
3. 드라마 구조의 문제
문학, 혹은 예술 장르에서의 구조는 그 장르에 속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벗어나서는 안 될 하나의 속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모든 장르의 작가들은 이 구조의 이중적인 성격으로 인해, 그러한 구조가 제시하는 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제약을 느끼면서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사정은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구조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없다면 장르 자체의 존립 근거가 흔들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창작을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혹은 이야기가 기존의 전달 방식 혹은 구조의 한계 내에서는 효과적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경우, 그 구조를 최대한 확장하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그 구조를 일정부분 파괴해 버리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험이 무모한 경우에는 별 성과 없이 실패로 돌아가 버리겠지만, 성공적일 경우에는 드라마를 규정하는 기존의 구조의 한계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일례로 베케트(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의 경우에는 극이라는 것이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는 공간이라는 기존의 관념을 뒤엎고 아무런 의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구조를 통해 제시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미국의 현대 극작가들도 구조의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기존의 구조를 크게 흔들거나 전복하려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으나, 나름대로 새로운 전달 방식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여러 극작가들 중에서도 특히 마리아 아이린 포네스(Maria Irene Fornes), 데이비드 헨리 황(David Henry Hwang), 토니 쿠쉬너(Tony Kushner), 더그 라이트(Doug Wright)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러한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쿠바 출신의 여성 작가 마리아 아이린 포네스의 작품 『페푸와 그녀의 친구들?(Fefu and Her Friends)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그린 페미니즘적인 작품인데, 이 작품은 기승전결 식의 단선적인 극 전개 방식에 근본적인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거기다 전통적으로 막으로 구분되던 극의 단위도 ‘부’(part)라는 다른 용어를 도입하고 있다. 기존 극의 전개 방식이나 구조에 변화를 꾀하는 면이 두드러지는 부분은 2부로 이 부분은 잔디밭, 서재, 침실, 부엌이라는 네 개의 분할 된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이 된다. 네 그룹으로 나뉜 관객은 각각의 장면을 보고 한 장면이 끝나면 다른 장면으로 이동하여 관람을 한다. 그러니까, 배우는 이 장면을 네 번씩 연기를 하고 관객은 어디에서 시작을 했던 이 네 장면을 다 본 다음에 주 무대로 다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연출자가 어떻게 이 극을 연출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질 수 있겠으나, 기존의 극의 전개 방식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여러 사건이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 체험의 파편성, 뒤엉킴 등을 자각하게 해준다. 이러한 실험적인 방식을 통해 그녀는 세계를 보는 고정화된 시선을 넘어선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미국 드라마 계에서는 아시아계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선두주자이자 가장 유명한 인물이 데이비드 헨리 황이다. 푸치니의 유명한 오페라 ?나비 부인?의 패러디이자, 프랑스 외교관과 나중에 남자로 밝혀지게 되는 중국 여배우 사이에 실지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 ?M. 나비?(M. Butterfly)에서 그는 아시아와 서구의 연극 관습을 혼용하고 있다. 중국 경극의 화려한 복장과 음악, 그리고 전통 일본 연극에서 검은 옷을 입고 극의 진행을 돕는 보조 인물인 쿠로고(Kurogo) 등 아시아 극의 전통과, 푸치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음악이나 소설에서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연상케 하는 서구적인 특징 등을 혼합하여 자신이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동서양의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서양 연극의 오랜 관습이라고 할 수 있는 다중 배역을 새로운 측면에서 부각시켜,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확고 불변하게 고정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데 이용하고 있다. 사회적인 관습과 관념에 따라 결정되고 마는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그렇게 확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수의 작가들이 이 다중 배역이라는 장치를 이용하고 있는데, 토니 쿠쉬너와 특히 더그 라이트의 작품에서 이러한 점은 부각된다. 이 부분은 나중에 좀 더 언급하도록 하겠다.
토니 쿠쉬너의 ?미국의 천사들?(Angels in America)은 에이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시대 상황을 배경삼아 미국 사회를 동성연애자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조망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데이비드 황의 작품처럼 다중 배역이 두드러지지만, 그와 함께 두드러지는 분리 장면(split scene) 기법의 이용이다. 다른 장소에 위치한 등장인물들을 한 무대 위에 등장시켜 그들의 대사마저 뒤엉키게 하는 이러한 기법은 인간들이 동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운명 공동체 속에 엮여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이고, 이러한 작품의 구조는 이 작품이 동성연애자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미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야기임을 보여주려고 하는 쿠쉬너의 의도에 잘 부합한다.
복장 전환자인 샤를로테 폰 말스도프(Charlotte von Mahlsdorf)라는 실제 인물을 소재로 한 더그 라이트의 ?내 부인은 나?(I Am My Own Wife)는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우선 이 작품이 내용 전체가 작가와 샤를로테의 인터뷰와 대화 등에 의존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극이라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성 복장을 한 인물 한 명이 35명의 등장인물 모두를 연기한다는 점이다. 사실 라이트가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부터 한 명이 모든 역을 소화하게끔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경비 문제 때문에 소수의 배우로 극을 진행하려다가 이 작품에는 오히려 한 명이 모든 역할을 하는 것이 효과적인 형식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xvii-xviii). 여성 복장을 한 남자 배우가 서른다섯 명이라는 배역을 혼자서 연기하도록 한 이 극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고정적인 것인가, 또는 이러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강요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을 억압하는 면은 없지 않는가 하는 점 등에 끝임 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무대 배경막, 소도구, 조명 등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샤를로테의 공간, 즉 박물관을 효율적으로 살리고 있긴 하지만, 한 배우가 모든 역할을 소화한다는 점에서는 배우 한 명과 코러스만으로 극을 진행시켰던 초기 그리스극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라이트의 이 극은 드라마의 가장 초기적인 형식으로의 회귀이기도 한 셈이다.
도입부에 말했듯이 다른 모든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드라마에 있어서도 구조는 이중적인 성격으로 극작가를 돕기도 하고 속박하기도 한다. 많은 극작가들이 이미 주어진 구조 내에서 극을 쓰고 있으며, 또 여기 예를 든 몇몇 작가들처럼 기존의 구조를 확장하고 그것에 도전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극작가가 끊임없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전달해 줄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극의 구조는 유기적으로 변화해 나갈 것이다.
인용문헌
Wright, Doug. I Am My Own Wife. New York: Faber and Faber,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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