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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라킨의 시에 나타난 죽음 (Philip Larkin)

by 길철현 2016. 4. 5.

필립 라킨의 시에 나타난 죽음 

                

시류파의 대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립 라킨(Philip Larkin)의 시는 다양한 시적 실험을 하였던 전대의 시들과 비교해 볼 때 우선 드는 느낌은 얌전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은 일단은 시의 톤이 전체적으로 높지 않다는 것에서 오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가 다루는 시적 소재들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비근한 것이라는 점 또한 이러한 느낌에 일조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과는 다르게 일별해 본 그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주제는 죽음이다. 강한 어조는 아니지만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상황 앞에서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그는 끊임없이 묻고 있고, 그 질문은 그의 어조와는 상관없이 심각성을 띠게 되고,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죽음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할 말이 없음」("Nothing To Be Said")은 죽음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삶이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다. 이 죽음은 가난한 자이든, 부자이든, 또 세계 어느 곳에 살든, 무슨 일을 하든 간에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시적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할 말이 없게 된다(And saying so to some / Means nothing; others it leaves / Nothing to be said)”라는 시의 마지막 세 행이다. 죽음이 불가항력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담담하게 수용하거나 아니면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또 그 불가항력적인 죽음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면서도 라킨은 후자의 부류의 사람들을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 봐서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 더 주목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다른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만다는 것은 적어도 이 시에서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돌파구나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낙찰되고 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앰뷸런스」("Ambulances")도 우리의 삶 가운데 언제라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이다(구급차 자체가 죽음은 아니지만, 죽음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므로 죽음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환자를 직접 보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연상들을 시로 형상화한 듯한 이 작품은, 시형은 정형적인데 반해 거기에 실린 내용은 상당히 개념적이고 추상화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시에서도 「할 말이 없음」처럼 죽음의 편재가 부각된다. “그들은 어느 가장자리에나 와서 머무르고, / 모든 거리를 조만간에 방문한다”(They come to rest at any kerb: / All streets in time are visited). 또 더 나아가 이 시에서는 인간이 맺어온 관계를 해체시키는 것으로서의 죽음의 모습이 강조되기도 한다.

광산에서의 폭발 사고를 다룬 「폭발」("The Explosion") 또한 평화로운 일상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대비를 통해 죽음의 편재성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있으며, 이 시에서도 시인은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그 장면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기존 종교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시인은 회의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할 말이 없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군가는 깨어지지 않은 알을 보여주면서”(One showing the eggs unbroken)라는 마지막 행이다. 이 행에서 제시하는 생명의 이미지는 죽음 앞에서 옴쭉 달싹 못하는 듯한 앞의 시와는 달리 적극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죽음을 중점적인 주제로 하고 있는 라킨의 시 세 편을 살펴보았다. 세 편 모두 죽음이라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라킨이 감정을 자제하며 담담한 어조로 글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 무엇보다 두드러진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지, 우리가 찾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면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삶을 어느 정도는 수용하고 있고, 그런 면에서 다소 종교적이지 않은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