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신치구 엮음, 사람과 사람 (2001년 3월 29일)
종교가 가르치는 요체는 궁극적으로 “나와 너가 다른 존재가 아니다. 나와 너는 한 몸이다”는 것일까? 어쨌거나, 지난 번에 읽었던 성철 스님과 마찬가지로, 김수환 추기경의 이 글에서도, ‘이웃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누누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는 왜 생명을 받았는가?’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자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한 것으로 보고 있고, 불교에서는 ‘불생불멸’을 내세우고 있다. 또 기독교에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경전을 읽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 외에도, 선 수행을 통한 깨달음도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 좀 더 철학적인 색채가 깊은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그렇긴 하지만 러셀이 “종교는 하나의 도그마”(그것이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간에)라고 말할 때의 의미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김수환 추기경의 사상의 개진이라기 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어떠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의 모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상식적이면서도 섣불리 하기 힘든 말, 실천이 지난한 말, 그리고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까지도 솔직하게 기술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창조자를 지운다면 이 삶은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이 되기 때문에, 창조자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부분’인데, 그것을 창조자의 존재 근거로 삼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요즈음 같이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해지고, 자꾸 죽음쪽으로 다가갈 때에는, 그래서 견디기 힘들어질 때에는, 김수환의 이러한 말이 힘을 얻지 못한다.)
*고독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주어진 고독의 밑바닥이 있습니다. 고독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아주 위험합니다. 그러나 삶을 돌이켜 보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깊이 보게되는 기회가 바로 고독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고독의 시작이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2차대전 중 나치에 저항하다가 처형된 본 회퍼(Bon Hoeffer)라는 독일인 목사의 [옥중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기를 거부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고독의 순간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만남의 순간, 만남의 상태라는 뜻이 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불안은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53)
*내가 신부가 안 되었다면, 무엇을 해 먹고 살았을까요? 장사하자니 주변머리가 없고, 땅을 파자니 기력이 달리고. . . .
나는 원래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양지 바른 곳에 있는 집을 보면, 저런 데서 평범한 한 가장으로서 자식들과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성장하면서도 늘 그런 생각을 해서, 기차를 타고 어디를 갈 때도 어스름하게 해가 질 무렵, 조그만 집에서 연기가 올라 오는 걸 보고는 저 집은 얼마나 단란하겠는가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그 집의 주인공으로 상상해 보곤 했었습니다. ‘아! 그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 . .’
이제는 늦었습니다. 너무 늦어 그같은 생각은 못하겠고, 잘 죽었으면 합니다. 하느님 앞에 죄를 용서받고 그 품 속에 편안히 잠들 수 있었으면. . . .‘
‘안심하라 아들아. 너는 죄를 용서받으리라’ 라는 기도서의 구절을 곧잘 읽는데, 이보다 더 위안받는 말이 없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누구를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한 일도 없고, 세월이 지나면서 덕을 자꾸 닦아야 되는데, 그것도 안 됩니다. 변덕만 자꾸 늘어 가는데, 변덕도 덕입니까? (100-101)
*여러 해 전의 자료입니다만, 세계의 모든 나라가 군사력을 위해 쓰는 돈은 매1분간 1백만 달러가 넘고, 연간 총액은 5천억 달러라고 합니다. 이는 발표된 군사 비용이고, 실제로는 그 두 배가 넘는 1조 달러 수준이라고 합니다.
1조 달러.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돈입니다. 설령 5천억달러라고 하더라도, 만일 해마다 이 돈을 평화적 목적과 구호 자금으로 쓴다면, 아직도 절대 빈곤 속에 굶주리고 있는 전세계 5억이 넘는 기아 선상의 사람들을 구제하고도 남는 돈입니다. 그런 막대한 돈을 오늘의 세계는 인간 구제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을 죽이는 무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현대 세계가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한 사람 앞에 10톤씩이나 돌아가는 핵무기를 만들어 내다니. . . . 무엇 때문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112-3)
According to a report several years ago, all the countries in the world spend for their military force one million dollars per minute, and the money sums up five billion dollars per year. This is just official military expense, and the actual amount of money is over one trillion dollars, more than the double.
One trillion dollars. It is unimaginably large amount of money. Even though, it is five billion dollars, if we use this money for peaceful purpose and relief fund, it will be more than enough money to help more than five hundred million people who are still starving in poverty all over the world. Today's world invest such a huge amount of money to killing machines, rather than to human relief.
When we give a deep thought to this, we cannot accept it. We can only think that this world is crazy. Why we are making nuclear weapons which will be distributed more than 10 tons to each person. . . . For what reason, For whom, I really can't understand.
*참사랑은 무력합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무력합니다. 어떠한 고통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입니다. 때문에 사랑은 가장 무력하면서도 가장 강인합니다. 사랑은 온 세상을 분쟁과 갈등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구원의 첩경입니다. (116)
*퍽 오래 전에, 기도를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평신자들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내가 던진 질문은 한결같이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여러 답을 듣던 중, 어느 중국 여성이 “기도는 기도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게 됩니다”라고 한 대답은 오늘날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실 이밖에 다른 답은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기도는 결국 끊임없이 기도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22)
*나는 가끔 정부나 서울시 당국이 왜 무리한 도시개발 정책을 밀고 나가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 하면, 도시의 철거민은 결국은 정부에 대하여 원할을 품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사회 안정을 크게 해치는 무서운 요인이 될 것이 불을 보듯이 분명한데, 그런 불안 요인을 왜 정부는 스스로 만들고 있는가?
‘도시 미화’라고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그들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도시 미화를 한들, 그것이 참된 아름다움입니까? 인간을 무시하고 짓밟아 세워진 도시는 아름답지 않을 뿐아니라 날이 갈수록 비인간화의 괴물로 변해 갈 것이고, 마침내 그곳은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도시’로 변모되고 만다는 것을, 왜 내다보지 못하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나는 참으로 우리 서울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이 도시가 안정과 인간미 넘치는 도시로서의 아름다움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쫓아냄으로써 도시 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을 따뜻하게 품고, 가진 이들이 그들과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인정이 아름답기에 도시가 아름다운 서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130)
*대만이 추구하는 경제 목표는 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정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빈자와 부자의 격차를 자꾸 줄이는 일에서입니다. 20여 년 전에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비율이 1대 15였으나, 내가 방문할 당시는 1대 4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대만은 경제적 안정을 찾았고 국민은 경제적 측면에서 정부를 신임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133)
*노동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써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임금 인상이 아니라 사람 대우이다. 사주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한 말씨나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데, 이를 보면 노사 문제는 단지 임금 문제와 같은 인간관계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인간 관계의 문제입니다. (136)
*내게 잘못하는 사람을 한 번 용서해 주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나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박해하는 사람, 원수까지도 용서해 준다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기서도 ‘나’ ‘자아’를, 자기 전부를 내던질 수 있는 순교 정신 없이는, 우리는 원수만이 아니라 원수가 아닌 단 한 사람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159)
*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의 법정에서 문부식 군은 “민족의 동질성을 가지고 나를 때린다면, 나는 내가 설사 그 매질에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달게 맞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 민족으로서의 고뇌를 외면하고 미워하는 매를 때린다면, 나는 단연코 그 매를 거부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64)
*우리는 근로자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정부와 사용주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아직도 필요합니다. 노동자들도 노동운동이라는 명목 아래 집단 이기주의를 표출하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경우는 자제해야 합니다. 국가와 이웃에 대한 생각없이 자신들의 주장과 이익을 추구하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노동운동을 이용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219)
*남의 [밥]이 되자. (262)
*인간에게는 실존적 고독이 필연적으로 내재하게 마련입니다. 어느 의미로, 인간의 본성은 영원한 신비와 생명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가톨릭 사상가 레옹 블롸(Le'on Bloy)의 표현을 빌면, 인간은 빵과 집 없이도 살 수 있고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신비없니느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이같은 실존적인 문제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에게로 귀의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270)
*사랑하는 자는 죽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자도 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과 이겼다는 것을 명백히 알려 주는 가장 큰 기쁜 소식입니다. 현세의 우리의 삶을 밝혀 주는 희망입니다. (293)
*부활 전야에 밝히는 촛불처럼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서, 우리는 오늘의 어두움을 밝일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이웃, 그 중에서도 불우한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들, 시련과 박해를 무릅쓰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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