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종호, 시란 무엇인가, 경험의 시학, 민음사 (2001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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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느끼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마나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책 한 편을 한 번 읽고 나서는 대충의 인상밖에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도, 여러 잡사로 읽은 지 일 주일 이상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인상마저도 더욱 흐려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인상이라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그 인상은 점점 더 흐려져서 궁극에는 ‘읽었다’는 사실마저도 애매모호한 지경이 되고 말리라.) 우선 유종호가 신비평이라는 사조에 자신의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비평에서 누누이 주장하는 ‘꼼꼼히 읽기’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누누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 주장의 중요성에는 누구나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의 <책 머리에>에서도 유종호는 이러한 점을 명백해 밝혀두고 있다.
헤엄을 배우려는 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물 속으로 들어가 몸을 놀리는 일이다. 물 밖에서 아무리 이치를 궁리하고 설명을 들어보았자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될 수록 많은 시를 꼼꼼하게 읽는 것이 시 이해의 첩경이다. 많이 읽다보면 자연스레 문리가 트이고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분별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5)
본문의 첫 편인 <주체적 독자를 위하여>와 <일탈의 시학> 등은 재미있게 읽었으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체계적이고 심도있다기 보다는 그저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예전에 이 책을 읽으려고 했다가 실패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편이다.) 결론적으로 한 권의 소책이 <시>라는 대양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헛된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게 거기에 매달리게 되는 사정은 아마도 좀 더 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얄팍하게 안락한 길을 찾으려는 사악한 마음 때문이리라. 어쨌거나 유종호가 보여주는 진지함이랄까 진정성은 배워야 한다. (그 대가로 우리는 이 책에서 좋은 시를 많이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지함은 때로는 너무 무거움과 진부함으로 빠질 위험도 안고 있다. 이 책도 그러한 위험에서 자유롭지는 못하고, 김수영이 유종호의 첫 평론집 [비순수의 선언]을 두고 ‘진지한 보수주의자 어쩌고’ 한 것이 기억이 난다.
[발췌]
<주체적 독자를 위하여>
*글자 한 자의 빠춤이나 더함이 전세계의 파멸을 의미할 수 있다. --탈무드 (11)
*아주 쉽다고 가볍게 보는 제 나라 동시조차 변변히 해독하지 못하는 터전에서 조금 복잡한 시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또 그러한 독서능력마저 갖추지 못한 터수에 문화배경도 다르고 말도 생소한 외국시를 배우고 엘리엇이나 보들레르에 관한 기말논문을 써내는 것은 자기기만의 극치이다. 그 우스꽝스러운 자기기만에 대한 통렬한 자의식을 거친 문학적 각성이 전반적인 수준에서 일어나지 않는 한 외국문학 교육도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한다면 공허한 노력으로 그쳐버리고 말 것이다. (20)
*현대시가 어렵다는 불평이 많다. 이러한 불평의 발설자는 대체로 독시경험이 적은 사람들이다. <현대시가 어렵다>는 말 자체도 남의 흉내를 내어 말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풍문과 소문에 놀아나며 지적 태만에 대한 자각증상이 없는 몰주체적 독자들의 트집이요 원망이요 자기변명이다. 이들은 대개 쉬운 동요나 동시에도 감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31)
<일탈의 시학>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논어 (32)
*시인이란 제1언어와의 사랑놀이를 평생토록 지속하는 사람이다. 그때 그때의 낱말 선택에서 딴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유일자를 찾아내야 하는 시인은 개개 낱말에 대한 낭만적 사랑을 평생 고질로 앓고 있는 충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34)
*소쉬르 언어학에서 쓰는 기표 signifier와 기의 signified란 개념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다.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진술로 소쉬르 언어학은 시작한다. 일상언어나 비문학적 산문에 있어서는 기의, 즉 기호내용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러나 문학언어 특히 시의 언어에서는 기의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기표, 즉 기호표현이 각별한 주의를 끈다. 단순화해서 말해본다면 기의 이상으로 기표에 주의가 집중되도록 배려된 것이 시언어의 특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35)
<수수께끼의 시학>
*말의 뜻을 소리에 종속시키고 소리에 우위성을 부여하면서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 시운동을 상징주의 운동이라 한다. <무엇보다도 음악을>하고 노래한 폴 베를렌의 <작시법>이란 시를 우리는 기억한다. 상징주의 시는 말을 그 뜻, 즉 조응성이나 기의에서 절연시켜 홀로 서게 하는 자폐적이고 자족적인 자장(磁場)에서 궁극적 자기실현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 허버트 리드는 이러한 시를 <절대 서정시>라고 했는데 간명하면서도 적절한 명명이라 할 수 있다. (62)
*고전주의 전통이 취약한 우리 터전에서 고전적 정통에 대한 경의는 좀더 장려되어야 할 것이다. (67)
*정현종, 슬픔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덤덤하거나 짜릿한 표정들을 보았고
막히거나 뚫린 몸짓들을 보았으며
탕진만이 쉬게 할 욕망들도 보았다.
영원한 건 슬픔뿐이다. (68)
*이상이 1930년대의 대단한 재능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많지 않은 단편과 산문들은 당대의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극히 드문 전문 직종이었던 건축 기사였으며 그림 솜씨도 뛰어나고 재담의 명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뛰어난 산문가가 반드시 좋은 시인이 아닌 것은 뛰어난 가곡 작곡가가 반드시 시에 대한 뛰어난 감식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것과 동일하다. 그의 난해시는 그의 뛰어난 산문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와 닮은 데가 있다. 독자들은 뛰어난 산문 때문에 시도 괜찮은 것이려니 예단한다. 몇 편의 괜찮은 시가 있으나 그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들이라 생각한다. 문인 이상은 적절하지만 시인 이상 하면 조금쯤 위화롭다. (69)
*시가 시를 낳고 글이 글을 낳는다. 무에서 출발하는 시인은 없다. 서양 철학이 플라톤 철학에 붙인 주석이라고 말한 철학자가 있지만 서구 쪽의 시는 크게 보아 호메로스로부터의 상속체계라는 측면이 강하다. 김소월은 민요의 가락이나 구비전통에 대한 청각적 충실을 도모함으로써 설 자리를 마련하였다. 한용운은 한문과 불교 경전과 아마도 타고르를 통해서 터득한 바를 내간체의 근대적 변형과 결합시킨다. 정지용은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열렬한 자각을 풀뿌리말과 내재율의 추구를 통해 실천하였다. 건축학도였던 이상이 기하학과 고등수학에 숙달했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하나 그가 의존하고 출발했던 시적 관습이 무엇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고전적 투명성과 위엄의 시를 통해 연마한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전위적인 실험시에 너무 일찌감치 노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짙어진다. (71)
*<오감도 제1호>는 이상(李箱 *理想* 異常) 청년의 조급한 문학선진화의 야망이 설계한 의미의 미로이며 무의미의 실체이며 기성적 시 관습의 추문화 장치이자 함정이다. 이 함정과 미로의 견고성은 놀랄 만하여 아직도 끊임없이 길 잃고 철 잊은 나그네의 내방을 받고 있다. (75)
<그늘의 시학>
<인지의 충격>
*시인은 가르치거나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최상의 경우 유익함과 감미로움을 어우른다. --호라티우스 (98)
*참아야 하네. 우리는 울면서 이 세상에 왔네.
그렇지 않은가? 처음으로 이승 공기를 접하고
우리는 울고불고하네. 이를 말이 있으니 들어보게. . .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울고불고하네.
멍청이뿐인 크나큰 무대로 나오게 되어 우는 것이네.
--<리어왕> 4막 6장 (101)
*슬픔과 지혜가 함께 오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이 마지막 대목은 결코 낭만주의 고유의 통찰은 아니다. 슬픔에 탐닉해서도 또 거기에 항상적으로 머물러 있어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깊은 슬픔을 통과하지 않은 삶이 피상적이고 얄팍한 것임은 고전비극 이래 그릇 큰 문학이 되풀이 상기시키는 인간사이다. 원한과 분노와 적의와 축축한 감상주의와 냉소적인 재담의 시가 흔하고 참으로 깊은 슬픔의 시가 드물다는 것은 우리 시대와 사회의 황폐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이 시인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콜리지 <노수부의 노래> 해설 (107)
*프로이트가 짤막하게 언급하고 말았지만 중요성을 부여하는 후발 이론가에 의해서 더러 거론되는 것에 가족 로맨스 family romance 혹은 가족소설이란 생각이 있다. 주체가 양친과의 관계를 상상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 활용하는 망상을 가리키는데 그 망상의 기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한다. 비천한 출생이나 불운 혹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치욕을 설명하려는 기도에서 어린이의 나르시시즘이 멋대로 구성한 출생에 관한 가공적 전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면 극복하지만 신경증 환자에게는 늘 따라다니기도 한다는 것이다. 괴테가 실토하고 있는 것이 이 <가족 로맨스>의 구체적 사례인 셈이다. 귀족의 버린 자식이나 사생아가 나중에 신원이 판명되어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동화나 소설은 아주 흔하다. (114)
*하인리히 힘러는 돌격대장을 거쳐 내무장관을 지낸 나치 지도자의 한 사람인데 이런 대화가 남아 있다.
불교의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아직도 조그만 방울을 달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아주 감동받았어요. 자기가 밟을지도 모르는 동물들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랍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선 아무 생각없이 달팽이나 벌레를 함부로 밟아버리거든요.
잔학한 테러를 총지휘한 냉혈한으로 묘사되는 힘러의 말인데 성자의 말씀처럼 들린다. 인간의 수수께끼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수수께끼 앞에서 망연자실하면서도 우리들은 그러나 인문주의적인 꿈을 버리지 못한다. 버릴 수도 없다. 천하 대사의 정의로운 횃불은 개개인의 선의의 촛불의 뒷받침 없이는 허황된 호들갑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118)
<숨어 있는 부호>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구약], <시편> (120-1)
<맹아적 힘>
*순수 놀이에 해당되는 사안이 시와 문학에 당치 않을 리가 없다. 시에는 말놀이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 최고의 경지는 고난도 경기나 순수 놀이의 그것 이상으로 우리를 황홀하게 하고 감동시킨다. 인간 정신의 가능성과 기율에 의한 탄복할 만한 언어 관장과 거기 바쳐진 인간 노력의 궤적은 뜻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네발짐승에서 출발하여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인류가 탐구하고 시도하고 성취한 노력의 흔적이 그 속에도 고스란히 겹쳐 있는 것이다. 우리가 허술하고 성의없이 다루어진 모든 것을 업수이 여기는 것은 그것이 볼품없고 단단하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노력과 기율과 안목에 대한 원초적인 불경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솜씨없음은 허용이 되지만 정성없음은 용서할 수 없다. 재주없음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지만 성의없음은 우리를 불쾌하게 한다.
글쓰기에 해당되는 사안은 책읽기에도 적용된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이라도 꼼꼼히 읽는 것은 글쓰기에 바쳐진 인간 노력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너무나 쉽게 씌어진 글들이 유행하고 공허한 소동을 일으킴에 따라 책읽기도 점점 허술한 소일거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쉽게 책이 나올 수 있다는 사정과도 관련될 것이다. 고전읽기의 중요성이 새삼스레 통감된다. 고전은 대체로 인간 정신의 가능성을 극한에서 보여주는 노력과 심사숙고와 정성의 소산이다. 따라서 고전읽기에는 그에 상부한 정성이 따르게 마련이며 또 따라야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허술하고 정성을 들이지 않은 많은 책을 읽어보아야 비로소 고전에 담긴 누적된 정성이 감득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에는 슬픔이 따른다. 깊은 슬픔이 깨달음과 함께 온다. 최상의 문학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제어된 슬픔이 인지의 충격과 함께 배어 있다. 비평담론도 예외는 아니다.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없는 지도와 교시의 언어에는 자신감만 있을 뿐 슬픔은 없다. 비싸지 못한 청승떨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146-7)
*화가 코로가 바라보고 그린 풍경이 자신의 감정이었듯이 작품 또한 독자가 투영하는 삶의 무게인 것이다. 문학이 문학을 낳는다. 문학경험은 작품 이해에 있어서 삶경험 이상으로 중요하다. 가벼운 작품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한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가 읽은 모든 책을 겹쳐놓는 것이다.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넓게 읽는 것이기도 하다. (166)
<시와 은유>
*리처즈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론(주: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은유에 능한 것이다. 이것만은 타인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이고 천재의 징표인 것이다. 왜냐하면 은유를 잘 마련한다는 것은 사물의 유사성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은 은유 연구와 이해에 장애가 되어온 온당치 못한 세 가지 가정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유사성을 보는 눈이 특수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라고 보고 있는데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사성을 보는 눈을 통해 말을 하고 살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이러한 능력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두번째 은유 구사능력을 타인으로부터 배울 수 없다는 것도 당치 않다. 우리가 배우는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타인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세번째 것은 가장 고약한 것으로 은유가 언어 구사에 있어서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이며 정상적인 언어 작동 양식으로부터 일탈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캐고 보면 은유는 언어 작동의 편재적 원리라는 것이다. (170-1)
*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김춘수, <네가 가던 그날은> (172)
*
사람살이는 걸어다니는 그림자,
불쌍한 광대다, 무대 위에서 한껏 재보고 큰소리쳐도
종치면 끝장이다. 천지가 지껄이는
이야기, 소리와 노여움은 요란하지만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맥베스> 5막 5장 (186)
<관습과 모티프>
*시조의 수작들이 공유하고 있는 조선조 사대부의 가치관과 윤리관에의 암묵적 순종을 현대 독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시조의 관습은 제작자에게도 자유로운 자아 표현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시는 단순히 정형으로부터의 어법적 자유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거리낌없는 분방한 정신과 자유의욕이 자유시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관습의 구속 없는 자유는 아슬아슬한 자기파괴를 딛고 있기도 하다. 참다운 시인은 관습의 구속에서 도리어 자유를 경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관습의 굴레를 수락하면서 거기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시적 재능이기도 하다. 예술적 재능이 대체로 그러하다. (200)
*
내 마음 받아달라고
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
네가 준 것은
차와
동정뿐
--최영미, <차와 동정> (200)
<시와 정치적 전언>
*
위험한 지식이 담긴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리라고
이 정권이 명령하여, 곳곳에서
황소들이 끙끙대며 책이 실린 수레를
火刑場으로 끌고 왔을 때, 가장 뛰어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추방된 어떤 시인이 분서목록을 들여다보다가
자기의 책들이 누락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화가 나서 나는 듯이
책상으로 달려가, 집권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그는 신속한 필치로 써내려갔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그렇게 해다오! 나의 책을 남겨놓지 말아다오! 나의 책들 속에서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나는 너희들에게 명령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브레히트/김광규 옮김, <焚書> 전문 (229)
*선악이 명확히 구획되어 있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멜로드라마의 세계이다. 또 그러한 세계에서는 지배 교조에 대한 충실이냐 거부냐 하는 선택지가 있을 뿐 모색이나 탐구는 없다. 진실은 모색하고 탐구하고 발견해서 지켜야 할 어떤 것이 아니고 잘 포장된 상자 속에 모셔져 있는 신주이다. 시인은 교조의 대중화를 위한 광고 대행인으로 전락한다. 비극 속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어느 극작가는 말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러한 비극적 인식 없이 깊은 진실은 찾아지지 않는다. 최상의 문학은 예외없이 이러한 비극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 시편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은 너른 의미의 이러한 비극적 인식이다. 정치시편 속에 전경화되어 있는 정치적 전언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230)
<시적이라는 것>
*뚜렷한 운문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 안으며 사실상 음수율에 기초한 음률성이 시의 특징이 되어 있다시피 한 우리 문학에서 시와 산문의 구분은 대체로 관습을 따라 이루어진다. 소재와 그 처리에 있어서의 특정 경향, 비교적 짤막하게 압축된 간결성, 또 적절한 행갈이에 의해서 시로 처리하고 또 그렇게 인지한다. 어느 나라 문학에서나 시도 관습의 하나요 또 제도이다. 그렇지만 운문 개념의 불확정성은 우리의 시에 대체로 산문시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음률성을 지향한 김소월과 터놓고 산문시를 지향한 한용운이 1920년대 초의 우리시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후 현대시는 이 두 가지 경향 사이에서 주저하고 선택하고 절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241)
*서정시가 소리와 뜻 사이의 망설임이라고 말한 시인의 말은 골똘히 음미되어야 한다. 최근의 우리 시는 소리와 음률성을 멀리하면서 뜻과 전언에만 골똘해 왔다. 그 결과 산문으로의 경사는 더욱 심해지고 그것을 보상하기 위한 <시적인 것>의 조성은 불필요한 시적 소음을 낳고 있다. 그리하여 소리와 뜻, 음률성과 의미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살이를 노래한다는 한길을 버리고 변두리의 소로길로의 잠행이 퍼지고 있는 것 같다. 이와 함께 부끄럼성을 잃어버린 노출증이나 비행촉진적인 비속 언어가 정직이라는 이름으로 숭상되는 경향까지 보여주고 있다. 욕설이나 비속어의 표현에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해방적 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두상황 아닌 기록의 맥락에서 비속어를 남발하는 것은 우선 발설자 자신의 뒷날의 자괴감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본래 시인을 낳게 한 것은 엘뤼아르의 시구를 빌리면 <지속에 대한 다부진 욕망>이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52)
<말의 힘>
<윤동주>
*현대 심층심리학의 중요 전언의 하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사실은 우리가 저지르는 것>이라는 말로 요약된다는 뜻의 말을 토마스 만이 한 바 있다. (304)
<신경림>
*문학작품이 의미를 갖게 되는 방식의 하나로 우리는 그 작품이 다른 작품과 맺게 되는 관계를 지적할 수 있다. 가령 우리 문학에서 지치는 법 없이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이상의 <오감도>를 예를 들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나의 커다란 의문부호 같은 이 작품은 독자의 의표를 찌름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에 호소하는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비밀을 알아낼 때까지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궁금증의 충동질이다. 그런데 이 궁금증은 동시대의 많은 다른 시들이 <오감도>와 생판 다르다는 사실에서 온다. 독자들은 시라는 이름 아래 조직된 말모음에서 <오감도>에서와 같은 기묘한 궁금증의 촉발이나 커다란 의문부호를 전혀 예기하지 않았다. 막연한 기대와 그 기대감의 의표를 찌르는 당돌한 기대의 발전에서 <오감도>의 <시적인 것>이 충전되어 나오는 것이다. 가령 김소월이나 김영랑의 여성적인 섬세한 심정토로를 기대하면서 접근한 독자에게 안겨주는 턱없는 의외로움에서 <오감도>의 <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껏 있어온 감정이입에 의하여 쉽게 공감되는 단정한 시들을 하나의 추문으로 만듦으로써 <오감도>는 시로 버텨갈 수 있다. 따라서 <오감도> 이후 비슷한 기존 시의 추문화를 도모하는 작품들이 별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그 같은 기대감의 의표 찌르기가 신선한 충격일 수 없기 때문이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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