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창 외(대화), 행동과 사유, 생각의 나무 (040914)
(참석자: 고종석, 권혁범, 여건종, 윤평중)
[감상]
김우창은 우리 시대의 현자이다. 우리 시대의 현자는 역시나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깊게 한 사람이다. 그리고, 또 기본적으로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의 말에 공감한다. 그의 말에 논박할 부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질상, 나는 그를 스승으로 받든다. 그는 나에게 이야기 한다. 좀더 열심히 책을 읽고, 좀더 곰곰이 이 생을 생각하라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살아온 삶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긍정할 부분은 긍정하라는, 그가 하지 않는 말도 듣는다.
다소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무리 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공부가 너무 부족함을(동범이 형이 느낀 것과 마찬가지 성질의) 절감하게 해 준 책.
<성장과 지적 편력>
*높고 낮고 잘나고 못난 것을 넘어가는 어떤 곳, 안이한 관념의 객관화 작용도 넘어가는 어떤 곳에 인간의 참모습이 있다는 생각은 나 자신을 생각하고 우리 사회와 정치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42)
<문학과 윤리>
*친일 작가의 경우 모두가 개인 나름의 진실과 객관적 진실의 모순에 따른 비극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개인의 허약함과 상황의 엄청남 사이에 존재하는 괴로운 차이를 살피는 일은 가능하겠지요. 판단 이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나쁜 놈이다’ ‘좋은 사람이다’라고 도덕적인 단죄에 들어가기 전에 상황을 밝히는 것이겠지요. (67)
<구체적 보편, 그리고 언어>
*역사적 사실과 긴박한 실천적 관심으로부터 시작해 지난한 성찰과 점검의 과정을 거쳐 보편적이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전망과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 일반적 호소력을 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헤겔 같은 철학적 체계는 건설하지는 않았지만 구체적 보편성의 이념에 부합하는 김우창 식 글쓰기에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84-5) (윤평중)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보편적인 상황에 다가갑니다. 말 못할 사정도 있지요. 어떻게 보면 개인의 진실이란 말 못할 사정에 속합니다. 말한다는 것은 언어의 상징 체계, 즉 라캉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미 개체적 자아에 대한 억압 체계를 이루고 있는 상징 체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지요. 이것은 말 못할 영역을 벗어나고 그 원초적인 영역을 눌러 없애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잘된 시란 이 말 못할 사정을 말하여주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억압적 상징 세계 안에서 그것을 깨트리면서 그것을 한껏 사용하여 그것을 넘어가는 언어지요. (87-8)
*움직임 안에 보편이 있어요. 포이에르바흐가 말했듯이 움직이지 않는 개념은 바로 거짓으로 떨어진다는 것과 비슷해요. 한 가지 보태자면, 지적인 언어는 상투적인 언어를 깨뜨리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상투적인 언어의 의미를 경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언어이니까요. 그러면 창조적인 언어와 상투적인 언어, 지적으로 분석적으로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하고 대중을 움직이는 언어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아직 답을 가지고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고 내가 쓰는 언어가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96)
<심미적 이성과 사회적 이성>
*서구의 근대적 이성에 대한 비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 아니었나 합니다. 계몽주의, 과학에서 그렇고 사회적 측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보편성 그리고 사회성의 원리인 이성이 근본적으로 지배 의지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비판적 견해를 계몽적 이성의 마지막 상속자를 자처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물론 당의 노선을 따르는 것은 아니면서도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여야 할 사람들이 선언한 것이지요. (110)
*사물은 그것이 위치하는 지평 속에 존재하고, 이성은 이 지평의 한 특성입니다. 그러나 이 지평은 사물에 따라서 또 사물을 보는 눈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지요. 앞에서 말했지만, 이성의 보편성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여야 하겠지요. (113)
*지나치게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이성은 주어진 대로의 자신을 넘어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120)
*정치적 결정에서 한 사람의 안위나 행복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하나가 전체에 복속되어야 하는 경우를 피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상황을 모순으로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특히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가령 전쟁과 같은 경우에 또는 혁명적 변화의 시기에, 개체의 삶의 요구와 전체적 과업의 요구 사이에 결정적인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개체적 생명은 어떠한 이성적 기획에 의하여서도 해소될 수 없는 비이성적 유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야 할 터이니까요. (124)
*우리 문학에서도 전체는 검토되고 합의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환기되고 수용되어야 하는 당위로 사용되지요. 그리하여 구체적인 검토의 책임을 면해줍니다. 그것이 문학에서 섬세성을 없애는 데 기여합니다. 섬세성은 인위적으로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 위에 움직이는 사고의 족적이지요. (127)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언어 표현은 대상을 지칭하면서 대상을 언어 체계 속에서 기호화합니다. 단순화하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대상의 타자성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타자성이 없는 대상은 대상이기를 그친 것이지요. 그런데 이 타자 지향은 인식의 기능에 의하여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과 정서도, 현상학에서 말하듯이 중요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28-9)
*계몽주의 이후의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세계의 실재에 임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실재의 이성적 해명에 노력하는 것이 철학을 진지하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으로 가능한 것이며 옳은 것인가를 의심하는 것이 데리다의 철학적 작업 아닙니까? 그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인간의 실재 파악의 힘을 과대하게 평가한 잘못된 생각이지요. 그리하여 그는 이성의 철학, 현존의 형이상학을 모두 해체하겠다고 나섭니다. 그 대신 모든 의미 창조의 행위는 그것을 정당화해 줄 근원적 실재가 없는, 한없는 허공에 뜬 차이 만들기이고 근원 복귀를 피하는 늑장 부리기지요. 이것은 의미 허무주의로 귀착할 수도 있지만, 즐거운 의미의 놀이일 수도 있습니다. 윤 선생이 말씀하시는 유희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간 과학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라는 초기 글의 한 주장입니다. (132)
*감정과 이성은 다 같이 사람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입니다. 현상학적으로 말하여 그것은 다 같이 지향성의 여러 방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과학적 인간관이--근본적인 반성을 거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것은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반드시 이성적 또는 합리적인 인식 작용을 통하여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비합리적인 통로에는 인간의 감정이 포함됩니다. 감정도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최근의 감정 연구가들이 말하는 것을 빌려서, 가령 아이오와 대학의 안토니오 다마시오 같은 심리학자의 연구를 빌려, 생물의 항상성(homeostasis)에 관하여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물론 더 복잡하고 다기한 작용으로 뻗어나가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감정이 깊은 생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역설이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인간의 생존이 세계와의 공진화 관계(co-evolution)에서 생겨난 것인 한, 감정도 이성의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메를로 퐁티의 생각대로 느낌이나 감정이 이미 이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42)
<유희와 쾌락에 대하여>
*어느 사회학적 연구에 이탈리아 토리노의 공장 노동자와 그들의 고향 사람들 중 앞선 세대의 오락 방식을 비교한 것이 있습니다. 농촌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농삿일 이외에는 다른 오락을 모르는데, 공장 노동자들은 퇴근 후에 디스코장이나 술집에서 격렬한 오락을 추구합니다. 이 연구 논문의 저자는 공장 노동의 비인간성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153)
*역설적으로 금욕주의가 행복 추구의 한 방편인 면도 있습니다. 그것이 강제 규정이 될 때, 또 극단적인 것이 될 때,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이성적 자기 한정이라는 의미에서의 금욕주의는 삶의 불가피한 조건의 하나일 것입니다. 집단적으로 보면 이것은 더욱 그러하지요. 제한된 지구의 자원에서 무한한 욕망 추구가 허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갈등과 불균형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완전한 억압이 없는 사회란 프로이트가 인정한 것처럼 불가능합니다. 다만 억압이랄까 불가피한 불편이랄까 하는 것의 범위는 다른 쪽이나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하겠지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제한된 삶의 경제에서 금욕의 원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정신 차리고 밑천 뽑으면서 살려면 그렇습니다. (156)
<정치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
*덕치의 이상을 버리면 안 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폐단을 의식해야하고, 현실적으로 볼 때 덕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 제도를 확립하고 정치 제도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179)
*타자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사람은 자기를 벗어날 수 있고, 타자들이 이루는 사회를 통하여 보다 단순한 두 개체의 관계를 넘어서는 공간을 인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공간은 인간의 집합체이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일반성, 추상성을 포괄합니다. (194)
*자유는 질서에 위배됩니다. 그리고 어떤 명령의 체제를 갖지 않은 질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한 평등에 위배됩니다. 자유나 평등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거기로부터 질서에 필요한 만큼의 가감이 불가피하겠지요. (198)
*미국의 정치철학자 세일라 밴하비브(Seyla Benhabib)가 도덕과 윤리가 없는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법제화할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의 딜레마라고 말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민주적 체제의 핵심적인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도 도덕과 윤리를 법제화하면 민주주의가 곧 죽어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201)
<겹눈의 사유와 담론적 실천의 문제--민족문학론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세계는 행동의 세계보다 훨씬 넓은 세계입니다. 전통적 유교 사상에서 지행합일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사람의 삶을 도덕과 윤리에 한정하는 결과를 갖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의 세계 또는 미적인 세계가 반드시 그러한 도덕과 윤리의 세계는 아니지요. 오히려 지행분리가 우리의 세계를 넓히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면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세계가 행동과 관계없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그것은 매우 복잡한 경로를 통해서 행동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 것입니다. (215)
*메를로 퐁티는 전쟁 중 프랑스 사람이 단지 프랑스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독일인을 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하여 총을 겨누어야 한다는 부조리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보편적 이성의 철학의 입장에서 그것은 부조리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것이 엄연한 현실 세계의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입장을 잊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민족이나 국가는 오늘의 인간에게 하나의 사실성에 속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실성은 가치를 획득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이념이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223)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주의가 아니라 현실이 중요한 거죠. 주의라는 것을 일종의 렌즈라 한다면, 우리 현실을 보는 렌즈를 너무 오래 이야기하다 현실을 잊어버리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249)
<한국현대사에서 문학 지식인의 역할>
<동양과 서양의 학문, 그리고 외국 문학을 한다는 것>
*외국 문학의 연구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기는 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문학의 보편적 이해를 넓히는 논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한국 문학도 저절로 포함되는 것이겠지요. 한국 영문학은 세계 영문학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동시에 세계적인 문제의식을 피력하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보다 쉬운 기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특정한 위치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방법론적으로 문화인류학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가와 작품의 문학적*사회적 컨텍스트에 주의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282-3)
*서양 고전 음악은 내 생각으로는 바하에서 쇤베르크에 이르는 200년 동안 인류에 크나큰 공헌을 했습니다. 서양이 200년 동안에 만들어 남긴 공헌입니다. 바하 이전의 음악을 보면 역사적 의미는 있겠지만 재미가 없어요. 쇤베르크 이후 실험적인 현대 음악이 나왔지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끝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200년간의 음악이 인류의 정신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데 공헌했어요. 가령 고려 시대의 청자는 한국 고유의 업적입니다. 고려 시대에만 가능했던, 한국 사람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예입니다. 인류의 유산은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뛰어난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접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떠나서도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지요. (290)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근본은 사람이 단순히 자연 속에 있다는 것, 우주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감각적 존재로 있다는 것,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세계 속에 하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은 같습니다. 느낌으로 테두리를 벗어나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척도는 없지만, 시가 있지요. 또 칸트 식으로 공동의 감각(sensus communis)이 있습니다. 이성을 들여다보게 되는 창은 이러한 조건 속에 들어 있습니다.
<문자 매체와 영상 매체>
<언론, 공적 담론, 권력>
<세계화, 내면성, 그리고 행복한 삶>
*욕망에 들떠서 정신이 없어지는 것을 피하고 정신을 온전히 하고 금욕적으로 사는 것은 행복한 삶의 방법이기도 하고 생태학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는 삶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안분지족의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 부가하여야 할 점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자비도 행복한 삶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라는 점입니다. (356)
*속됨을 무릅쓰고 인생론을 펼친다면, 사람의 삶은 거창하게 말하는 것보다 행복이라는 척도로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의 기본 조건은 생물학적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이지요. 의식주가 두루 해결되어야 하겠지요. 그 다음은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일 겁니다. 그런데 이 충실의 내용은 봉사에 있지요. 자신의 진정한 마음에 봉사하고, 안에서 오는 진리에 대하여, 다시 밖에서 오는 진리에 봉사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과 이웃과 나라와 우주와의 평화를 아는 것이지요.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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