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부분이라 다시 거론하는 것이 낯 간지럽기도 합니다(국역본과 영역본을 올립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시작한 정신분석이 미칠 영향력 혹은 파급력을 인간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은 과학상의 이론들인 지동설과 진화론에 스스로 견주고 있는 다소 낯 간지러운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이런 발언을 하고 백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생각대로 정신분석이 우리 인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는가는 아직도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신분석이 프로이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과학 내에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학문인가에 대해서 조차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제 지동설을 부인하고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종의 기원]이 나온지 거의 백육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계 내에서는 거의 진화론쪽으로 수렴되는 듯이 보이긴 합니다.
프로이트는 평생에 걸쳐 인간의 정신에는 무의식적 과정이 있고,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이 무의식, 혹은 무의식적 과정이 의식, 혹은 의식적 과정보다 더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철학사의 맥락에서 보자면 인간의 이성이나 의식보다 의지를 강조한 쇼펜하우어, 또 그를 이어 '힘에의 의지'를 내세운 니체 등의 계보 위에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생각은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반대된다는 점 - 꿈이 큰 의미를 담고 있다든지, 단순한 실수로 보이는 것이 실수가 아니라는 등 -에서, 그리고 인간이 금기시하는 성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지금도, 특히 우리처럼 동방예의지국?을 내세우며 체면이나 의례를 중요시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더, 반감과 비판 더 나아가서는 무시의 대상이 되어왔지요. 하지만 그의 생각들은 한 번만 더 되짚어 본다면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더 적절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무의식(Unconscious. das Unbewusste)은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베일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나 또 어렴풋이 보이는 몸짓 등 분명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느끼는데 막상 베일을 젖히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정말로 이 비유는 매력적?인 구석은 있는데 무의식을 호도하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대하여](1915)라는 제목으로 쓴 심혈을 기울인 그래서 난해한 논문을 다시 한 번 더 읽고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인류는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소박한 자기애에 대한 두 가지 모욕적 사태를 견디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째, 인류는 우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 크기가 전혀 상상 불가능한 우주 체계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들도 비슷한 언급을 했지만, 그 같은 모욕적 체험과 함께 우리에게 연상되는 이름은 코페르니쿠스입니다. 인류의 자존심에 대한 두 번째 모욕은 생물학적 연구에 의한 것입니다. 생물학은 소위 인간이 창조에 관한 특권을 지닌다는 생각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인간은 단지 동물계에서 유래한 존재로서 자신의 동물적 본성을 제거해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의 전환은 우리 시대에 다윈과 월리스Wallace 그리고 그들보다 앞선 선구자들의 영향력에서 이루어졌는데, 당대 사람들의 매우 거센반발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인간이 지닌 과대망상증은 현재 진행 중인 심리학적 연구에 의해서 가장 민감한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심리학적 연구는 자아가 자신의 집안에서도 더 이상 주인일 수 없으며, 자신의 정신생활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서 오직 초라한 정보들만을 접하고, 이제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자아에게 입증해 보이고자 했습니다. 물론 우리 정신분석학자들이 처음으로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는 경고를 한 것은 아닙니다. 또 우리가 그런 말을 한 유일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 같은 경고를 가장 긴박한 형태로 주장하고, 모든 개인들과 직접 연관된 경험적 자료들을 통해서 뒷받침한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이 우리 학문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저항하고, 모든 형태의 학술적인 예절에 대한 배려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과정에서 모든 공정한 논리의 굴레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 [정신분석강의]. 임홍빈, 홍혜경 옮김. 388-89. 열린책들)
In the course of centuries the naϊve self-love of men has had to submit to two major blows at the hands of science. The first was when they learnt that our earth was not the centre of the universe but only a tiny fragment of a cosmic system of scarcely imaginable vastness. This is associated in our minds with the name of Corpenicus, though somethin similar had already been asserted by Alexandrian scinece. The second blow fell when biological research destroyed man's supposedly privileged place in creation and proved his descent from the animal kingdom and his inerdicable animal nature. This revaluation has been accomplished in our own days by Darwin, Wallace and their predecessors, though not without the most violent contemporary opposition. But human megalomania will have suffered its third and most wounding blow from the psychological research of the present time which seeks to prove to the ego that it is now even master in its own house, but must content itself with scanty information of what is going on unconsciously in its mind. We psycho-analysts were not the first and not the only ones to utter this call to introspection; but it seems to be our fate to give it its most forcible expression and to support it with empirical material which affects every individual. Hence arises the general revolt against our science, the disregard of all considertaions of academic civility and the releasing of the opposition from every restraint of impartial logic.
([Introductory Lectures on Psycho-Analysis](Part III). James Strachey. Vol XVi. 284-85. Hogar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