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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언어 단상 II(170612)

by 길철현 2017. 6. 12.



언어는 우리에게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분법적인 사고는 언어의 기본 메카니즘이겠지만, 좀 더 고차원적인 사고는 이분법을 뛰어 넘어 변증법적으로 뭔가 통합적이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 그러니까 생각의 한계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지난번에 적었던 것처럼 '인간 언어라는 것이 진화의 산물이요, 생존의 필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출발을 한다면(언어를 갖게 된 인간은 저마다의 생각을 펼친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각 시대는 저마다의 에피스테메가 있어서 그 시대에 통용되는 혹은 그 시대의 지배 담론'이 있다. 푸코의 말을 따른다면 시대의 지배 담론을 잘 파악하는 것이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들의 홍수 속에서 어떤 말을 '삶의 지침'으로 지니고 가야 하는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좋기만 한 것은 없다'는 것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할 지라도 부작용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은 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리라. 우리에게 언어가 주어져 있고 언어가 여러 모로 편리하기 때문에 '언어 자체'에 대해, '언어 현상' 또는 '언어 행위'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한 발자욱만 벗어나서 이러한 것에 의문 부호를 던진다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 마주하게 된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왜 나는 여기에 의문 부호를 던지고 있는가? 그것은 나의 지적인 탐사의 결과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도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언어를 갖게 되었고, 언어가 타당성을 지니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 나에게는 해묵은 질문이다.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란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여기저기서 제시되자 '1886년 파리언어학회는 "본 회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어떤 논의도 수용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제정'(루소.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책세상 11) 하기도 했다. 당시의 결정은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언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여러 가지 분란을 유발한다는 상황과 맞물려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인간의 지적인 탐사는 지칠 줄 모르고 진행되어 왔다. 니체의 경우 인간 언어의 출발 자체에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을 던지고 있으며 한 동안은 나도 그의 견해에 동조했다. 지금도 '언어가 인간 중심의  일면적인 해석이거나 비약'이라는 그의 생각은 유효하다고 본다. 조금 바꿔 말해 본다면 인간은 '언어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말이 될 것이다.


얼마 전에 루트 베르거가 쓴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책을 읽었다. 현대의 과학적 발견들을 토대로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책은 인간 언어의 기원을 아주 오랜 과거로까지 끌어 올리고 있으며, 언어가 진화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진화를 촉진시킨 것으로 본다(그다지 어렵지 않은 이 책에 대한 정리를 해둘 필요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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