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도에 탁구 동아리에 올렸던 글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술을 적당히 많이 마시고 온 날, 기분좋게? 깨어나, 술을 생각하다가(사실은 술에 대해서 시라도 한 편 쓸까 하는 생각으로), 예전에 조지훈 시인이 술에 대해 글을 적은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 책을 뒤져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술에 대한 글이 꽤 많이 실려 있네요. 그 중에서도 아래 글은, 주도(酒道)를 바둑에 견주어 설을 풀어나가는 솜씨가 가히 대가급?이라는 걸 엿볼 수 있게 해 올립니다. 백수라 정말 남는 게 시간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자를 일일이 옮기는 일이 수월치는 않네요. 거기다 원래 조지훈이 한어투와 고어투를 즐겨 쓴다는 건 잘 알고 있긴 하지만, 35년이라는 짧은 세월?이 이 글의 해독을 상당히 어렵게 하고 있는 점도 옮겨쓰면서 새삼 실감하게 되었네요(우리 언어가 얼마나 급속도로 변해왔는지를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요). 음독은 원래는 없는 것이지만 읽는 것을 돕기 위해서 괄호 안에다 적어보았습니다.
酒道有段(주도유단)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氣高萬丈(기고만장)하여 英雄(영웅) 豪傑(호걸)이 되고 偉人
(위인) 賢士(현사)도 眼中(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酒歷
(주력)과 酒力(주력)을 당장 알아 낼 수 있다. 주정도 敎養(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
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酒格(주격)은 높
아지지 않는다. 酒道(주도)에도 엄연히 段(단)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술을 마신 年輪(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세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네째는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 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段(단)의 높이가 어떤 것을 알 수 있다.
飮酒(음주)에는 무릇 十八(십팔)의 階段(계단)이 있다.
1)不酒(불주)--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2)畏酒(외주)--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3)憫酒(민주)--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4)隱酒(은주)--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어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5)商酒(상주)--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利(이)속이 있을 때만 술을 내는 사
람.
6)色酒(색주)--性生活(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7)睡酒(수주)--잠이 안 와서 술을 먹는 사람.
8)飯酒(반주)--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
9)學酒(학주)--술의 眞境(진경)을 배우는 사람(酒卒(주졸)).
10)愛酒(애주)--술의 趣味(취미)를 맛보는 사람(酒徒(주도)).
11)嗜酒(기주)--술의 眞味(진미)에 반한 사람(酒客(주객)).
12)耽酒(탐주)--술의 眞境(진경)을 體得(체득)한 사람(酒豪(주호)).
13)暴酒(폭주)--酒道(주도)를 수련하는 사람(酒狂(주광)).
14)長酒(장주)--酒道(주도) 三昧(삼매)에 든 사람(酒仙(주선)).
15)惜酒(석주)--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주현)).
16)樂酒(낙주)--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悠悠自適(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주성)).
17)觀酒(관주)--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주종)).
18)廢酒(폐주)(涅槃酒(열반주))--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不酒(불주) * 畏酒(외주) * 憫酒(민주) * 隱酒(은주)는 술의 眞境(진경) * 眞味(진미)
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商酒(상주) * 色酒(색주) * 睡酒(수주) * 飯酒(반주)는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 술이니 술의 眞諦(진체)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學酒(학주)의 자리에 이
르러 비로소 酒道初級(주도초급)을 주고 酒卒(주졸)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飯酒(반주)
는 二級(이급)이요, 차례로 내려가서 不酒(불주)가 九級(구급)이니 그 이하는 斥酒(척
주) 反酒黨(반주당)들이다.
愛酒(애주) * 嗜酒(기주) * 耽酒(탐주) * 暴酒(폭주)는 술의 眞味(진미) * 眞境(진경)
을 悟達(오달)한 사람이요, 長酒(장주) * 惜酒(석주) * 樂酒(낙주) * 觀酒(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 번 넘어서 任運自適(임운자적)하는 사람들이다. 愛酒(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酒道(주도)의 初段(초단)을 주고 酒徒(주도)란 칭호를 줄 수 있
다. 嗜酒(기주)가 二段(이단)이요, 차례로 올라가 涅槃酒(열반주)가 구단으로 名人級(명
인급)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段(단)을 맬 수 없다.
그러나 酒道(주도)의 段(단)은 때와 곳을 따라 그 質量(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降等(강등)이 심하다. 다만 이 大綱領(대강령)만은 確乎(확호)한 것이니 有段(유
단)의 실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幾百萬金(기백만금) 이 들 것이요, 修行年限(수행연한)
이 또한 幾十年(기십년)이 필요할 것이다(旦(단) 天才(천재)는 此限(차한)에 不在(부재)
이다).
요즘 바둑 열이 왕성하여 도처에 棋院(기원)이다. 酒道熱(주도열)은 그보담 훨씬 먼
저인 太初(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쇠미한 적이 없지만 亂世(난세)는 斯道(사도)마저 타
락케 하여 질적 저하가 심하다. 내 비록 學酒(학주)의 小卒(소졸)이지만 아마추어 酒院
(주원)의 師範(사범)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건만 二十年(이십년) 정진에 겨우 初級(초
급)으로 이미 몸은 觀酒(관주)의 경에 있으니 (돌돌) 人生事(인생사) 한도 많음이
여!
술 이야기를 써서 생기는 稿料(고료)는 술 마시기 위한 酒餞(주전)을 삼는 것이 제
格(격)이다. 글 쓰기보다는 술 마시는 것이 훨씬 쉽고 글 쓰는 재미보다도 술 마시는
재미가 더 깊은 것을 깨달은 사람은 글이고 무엇이고 萬事休矣(만사휴의)다.
술 좋아하는 사람 쳐놓고 惡人(악인)이 없다는 것은 그만치 술꾼이란 만사에 악착같
이 달라 붙지 않고 흔들거리기 때문이요, 그 때문에 모든 일에 야무지지 못하다. 飮酒
有段(음주유단)! 高段(고단)도 많지만 學酒(학주)의 境(경)이 최고경지라고 보는 나의
拙見(졸견)은 내가 아직 세속의 妄念(망념)을 다 씻어버리지 못한 탓이다. 酒道(주도)의
正見(정견)에서 보면 功利論的(공리론적) 경향이라 하리라. 天下(천하)의 好酒(호주) 同
好者(동호자) 諸氏(제씨)의 의견은 若何(약하)오.
(1965, [新太陽])
--조지훈, [詩人의 눈](고려대학교 출판부, 1978), 16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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