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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폭포행

폭포 이야기

by 길철현 2019. 10. 2.

 

90년대 말 정도에 나는 심한 가슴앓이를 하면서 연천의 재인폭포에 내 아픈 마음을 위탁하곤 했다. 이후 폭포는 내가 즐겨 찾는 자연 경관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우리나라 폭포 중 그 으뜸은 내 생각으로는 설악산의 토왕성폭포가 아닌가 한다. 물론 토왕성폭포는 수량 변화가 심한 우리나라의  폭포들 중에서도 특히나 비가 많이 온 뒤가 아니면 300미터에 이르는 그 길이를 온전히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걸 보기 힘들긴 하지만 자신의 최대치를 보여줄 때의 토왕성 폭포는 정말이지 산꼭대기에게 수직의 절벽을 따라 상하 2단으로 떨어져 내리고 난 다음에도 또 급경사를 따라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가히 오래된 동양화에 나오는 별유천지비인간의 전형이라고 할 정도이다. 이 토왕성폭포로 가는 길은 금단의 영역인데, 예전에 나는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이 선경을 찾아가기도 했다. 현재는 비룡폭포 옆으로 이 토왕성폭포를 잘 조망할 수 있는 등산로를 개발했지만 폭포 바로 아래에서, 흑은 옆에서 보는 그 느낌에는 비할 수가 없다(금단의 영역인 이 토왕성폭포에서 즐긴 그 은밀한 즐거움에 대해서는 따로 상세하게 적어보고 싶다). 설악산은 남한을 대표하는 명산일 뿐만 아니라 이름난 폭포도 많은데 내설악에 위치한 높이 88미터의 대승폭포도 허공을 가르며 수직으로 떨어지는 그 장쾌함이 우리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그리고 십이선녀탕 계곡은 크고 작은 폭포들이 이어지고(91년인가 설악산 종주를 할 때 이곳 폭포 중 하나에서 쉬다가 같이 갔던 형이 폭포 아래로 떨어질 뻔한 것을 내가 손을 잡아 주어 사고를 막은 기억이 난다), 설악산을 대표하는 계곡인 천불동 계곡에도 오륜폭포, 양폭, 음폭, 천당폭포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두타산의 용추폭포는 한꺼번에 폭포 전체를 보기가 쉽지는 않지만 상중하로 구성된 3단 폭포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그런 폭포이다. 오대산 소금강 지구에 있는 구룡폭포는 폭포 하나하나의 모습이 뛰어나다기보다는 9개의 폭포가 연달아 이어진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 이곳도 예전에 내가 찾았을 때에는 제일 규모가 큰 8폭포 위쪽으로는 입산 금지였다). 이곳처럼 폭포가 연달아 이어지는 곳은 내연산의 12폭포 계곡이다. 관음폭포와 연산폭포로 대표되는 이곳 또한 기억에 남는다. 명성산 자락에 위치한 삼부연폭포, 오랫동안 출입 금지 지역이었다가 해제된 비둘기낭폭포(이 폭포는 영화에 많이 등장했다), 그리고 내변산의 직소폭포에서는 아침 일찍 올라가 약간 높은 곳에서 폭포를 조망하며 수첩을 꺼내들고 시를 적고 있었는데, 그 곁을 지나던 등산객 중 한 분이 죽지 말라고 해서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지리산의 불일폭포는 비가 많이 올 때가 아닌데다 60미터에 이르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 풍광이 기대만큼 멋지지는 않았다.

 

몇 달 전에 찾았던 순창의 강천산에도 폭포들이 많았는데, 암벽 꼭대기에서 두 줄기로 물이 흘러내리는 장군폭포는 작은 토왕성폭포라고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는데, 알고 보니 인공폭포라 실망감이 컸다. 지형적으로 보아 그 정도의 물이 떨어내릴 수 없는 곳이어서 인공폭포라는 것을 쉽사리 눈치챌 수도 있었을 턴데, 자연적으로 그런 광경이 형성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것일까? 영동 달이산에 있는 옥계폭포 또한 높이도 높고 주변의 절벽도 아름다워 손꼽을 만한 폭포인데, 폭포 뒤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설치한 커다란 관을 발견하고는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 [추노]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괴산의 수옥폭포, 주흘산 중턱에 있는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연상시킨다는 여궁폭포, 소백산의 희방폭포, 그 전설이 흥미롭고 높이도 상당히 높은 데다가 폭호의 물빛이 바닥의 석회암? 종류의 암석 때문인지 푸른 청자빛깔이라 특이한 느낌을 주는 삼척의 미인폭포,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많은 수량을 자랑하는 함양 기백산의 용추폭포(용추폭포라는 이름은 아마도 폭포 이름 중에 가장 흔한 이름이리라. 백운산이 가장 흔한 산 이름이듯이), 감악산의 은계폭포 등도 기억에 남는다.

 

제주도의 폭포들은 대체로 육지의 폭포들보다 규모도 크고 수량도 풍부한 편인데, 제주도의 대표적인 폭포인 천지연 폭포가 그 전형일 것이다. 그리고, 바다로 곧바로 떨어지는 정방폭포는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폭포의 물소리가 야릇한 화음을 이루는 곳인데, 나는 이곳에서 캠코더를 들고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뛰어다니다 그만 미끄러져 오른쪽 팔뚝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 폭포에 취한 나머지 사고의 위험성을 잠깐 망각한 탓이었는데 자칫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이곳은 또한 43사건과 관련해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을 이후에 알게 되었다. 3개의 폭포로 이루어진 천제연 폭포 중 제1폭포는 내가 찾았을 때에는 폭포 자체는 말라버린 상태였는데,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보랏빛을 띤 폭호의 빛깔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눌러야 했다. 비가 많이 온 다음에야 볼 수 있는 50미터 높이의 엉또폭포 또한 내가 찾았을 때에는 건폭이었는데, 그 입구에 세계 4대 폭포라는 안내문이 있어서 이 또한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해외 여행은 별로 하지 않아서 해외 폭포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의 3대 폭포 중 하나라는 닛코 시 인근에 있는 높이 97미터의 게곤폭포와 백두산의 장백폭포 정도이다. 게곤폭포는 그 규모나 수량에서 우리나라의 폭포를 능가하고 주변 풍광 또한 아름답다. 윗쪽에서 무료로 감상을 할 수도 있고, 입장권을 사면 바위 속으로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폭포의 진면목을 좀 더 잘 관찰할 수도 있다. 장백폭포 또한 그 수량이나 높이가 상당하지만 백 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봐야 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폭호에 뛰어들어 그 바닥을 짚어보고 싶은 욕망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것은 두타산의 용추폭포였다. 바닥에 쌓인 나뭇잎들 때문인지 물빛깔이 검어서 그 깊이를 잘 갸늠할 수 없을 정도로 위압감을 주는 이 폭포에서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사람들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은 틈을 타 나는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가 바닥을 손으로 짚자말자 허겁지겁 올라오고 말았는데 생각만큼 깊지는 않았다.

 

폭포는 물길이 끊어진 곳에서 어쩔 수 없이 추락하고 마는 물이 빚어내는 현상이다. 그 수직의 자유낙하는 죽음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넘어간다. 예전에 번지 점프를 할 때 느꼈던 두려움과 그 다음에 찾아오는 자유로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이 낙하에 오롯이 내 몸을 맡길 때 찾아오는 해방감. 그리고 쉴 새 없이 물이 떨어져 내리는 시끄러운 소리 가운데에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정적감. 폭포가 전해주는 무언의 말을 포착하고자 하는 어쩌면 무모하고 헛된 시도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국경에 자리한 세계 최대의 폭포인 이구아수폭포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이 폭포의 엄청난 힘은 영화 [해피 투게더]나 [미션] 등에 잘 드러나 있다. 가장 높은 폭포로 알려져 있는 베네수엘라의 엔젤 폭포는? 아프리카의 빅토리아폭포와 북미의 나이아가라폭포는? 하지만, 이름난 폭포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뜻밖의 기쁨을 선사할 때가 있다. 언젠가 비가 많이 온 그 다음 날 무작정 나섰던 길에서 만났던 양산 천태산의 무명폭포(이 폭포는 이제 용연폭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도 수직의 바위를 따라 힘차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