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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주요한 - 불놀이 [한국현대대표시선 I]

by 길철현 2020. 3. 20.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벌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 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우에 내여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이 설움 살라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아아, 좀 더 강렬한 열정(熱情)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煙氣),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4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느끼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봄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드러벡이고, 물결치는 뱃숡에는 조름 오는 ‘잊음’(리듬)의 형상(形象)이 오락가락 ―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 소리, 달아 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情欲)을 이끄는 불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없는 장구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리는 욕심(慾心)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제, 뜻있는 듯이 삐걱거리는 배잣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愛人)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는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 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다른 표기]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시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우에서 나려다 보니, 물냄새, 모랫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차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와 버릴까, 이 설움 살라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꽃을 날리면서 튀어나오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드러백이고, 물결치는 뱃숡에는 졸음 오는 리듬의 형상이 오락가락- 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 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의 정욕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를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제,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 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설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1919, 『창조』 창간호

 

[어휘]

흥성시러운 : 매우 번성하여 흥겨운

매화포 : 종이로 만든 딱총. 불꽃놀이의 도구. 불똥이 튀는 모양이 매화 떨어지는 것과 비슷함.

청류벽(淸流璧) : 대동강 가에 있는 절벽 이름

뱃슭 : 배의 옆부분

리듬 : 니즘 

3연의 '니즘'이 '리듬'이냐 '잊음'이냐. '니즘'은 '리듬(rhythm)'으로 통용되어 왔으나 '잊음'의 평북 사투리식 발음이다. 조창환 교수는 '이즘(-ism)'은 문맥상 도저히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 김학동 교수는 물결의 흔들림 속에서 되살아나는 '망각'의 형상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겹고 : 지겹고

치마깃:

배젓개 : 노

사로라: 불태우라

 

[내용]

그 그림자 -- 과거의 퍼런 꿈의 그림자인지?

 

 

초파일 밤에 화자의 느낌을 낭만적으로 그려낸 시이다. 사랑을 잃고 새로운 사랑(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을 꿈꾸는 젊은 화자는 고통스럽더라도 이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최초의 산문시로 일컬어 지는 이 작품은 식민 치하의 시대상과 겹쳐져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좀 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