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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밖의영상들

데인저러스 메소드(A Dangerous Method)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by 길철현 2020. 3. 28.


[만약 이 시점에서 예전에 본 크로넨버그의 [이레이저 헤드]라는 영화를 다시 본다면, 이 글을 완성시킬 수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워낙 오래 전에 보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인상을 쥐어짜 본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하루 아침에 거대한 곤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를 연상시키는 병든 아기, 그 아기의 머리를 해머로 치는 장면,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고 그 위에는 아기들의 머리가 놓여 있는데, 그 머리들을 해머가 내리치고 있다. 기억이 흐릿하고 왜곡된 대로 그와 유사한 장면이 있었던 듯하다. 음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을 화면 위에 노골적으로 끌어 올린 영화. 자료를 찾아보고 기억에 좀 더 논리적인 조작을 가하려다가 이 쯤에서 멈춘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감독은 크로넨버그가 아니라 데이비드 린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터넷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데이비드 린치는 [밀회], [콰이강의 다리]. [닥터 지바고]로 유명한 데이비드 린 감독을 소환한다). 왜 이런 착각을 했을까 하는 것이 흥미로운 부분인데, 일단 두 사람의 이름(first name)이 같다는 것이 소쉬르가 말하는 '인접성'의 원칙에 따른 흔한 착오이겠지만, 그 이상은 연상이 미치지 않는다. 수십 년 전에 본 이 영화가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가운데 나를 물고 늘어진다. 어둠 속에서 우는 아이. 이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나왔던 듯하다. 그리고, 이 우는 아이의 이미지는 내가 오랜 시간 시로 써보려고 했던 그런 것이기도 하다. 연상은 다시 조나산 스위프트의 [소소한 제안](A Modest Proposal)이라는 글로 이어진다. 이 글은 당시의 아일랜드의 기근과 처참한 현실을 폭로하기 위한 풍자문이지만, 기근을 해소하기 위해서 영아들을 식량으로 사용하자는 화자의 터무니 없는 주장은 어느 순간 나에게는 "영아 살해"로, 혹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유아기의 상흔," 더 나아가서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스위프트의 무의식적인 분노로 읽혔고, 그 당시 불안하던 내 마음에 끔찍한 공포를 안겨주기도 했다.


글이 착오로 시작을 해서 옆으로 새어버렸지만 그대로 밀고 나간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라고 생각했던 [이레이저 헤드]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다. 인터넷으로 조사를 해보니 내가 80년대와 90년대에 보았던 [더 플라이], [데드 링거], [M. 버터플라이]([The Fly] [Dead Ringer] [M. Butterfly]) 등의 감독이다. 글을 쓰면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의 영화에 흥미를 가져 초기작인 [비디오드롬](1983)이라는 영화도 찾아보았던 것도 떠오른다. 흐릿한 기억을 좇아 몇 자 더 써본다면 내가 본 그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인간의 심리, 그것도 병리적 심리, 공포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더 플라이]같은 작품은 뭔가 큰 기대를 갖게 하는 작품이었으나, 후반부에서는 완성도가 떨어졌던 듯하다. 인간과 파리의 결합이라는 소재는 흥미로우면서도 그로테스크하다. 이 영화는 공포와 공상과학이 기괴하게 만난 영화이다. 기억이 불확실한 대로 [데드 링거]는 카투사 시절 영내 극장에서 한 번 보고(자막없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듣지 못한 상당 부분은 내 상상력으로 채워넣었다), 나중에 비디오로 다시 보았던 듯하다. 이 영화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대로 뭔가 강력한 것이 있었다는 그런 느낌인데, 얼핏 내용을 읽어보니 대략 "분리-개별화"의 과정에서의 불안감이나 공포 등이 반영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였던 존재가 둘로 쪼개질 때의 느낌. 데이비드 헨리 황(우연의 일치로 이 사람의 이름도 데이비드이다. 다윗의 후예는 아마 수십 억에 이를 것이다)의 유명한 희곡을 영화화한 [M. 버터플라이]는 박사과정 수업 때 발표를 맡은 작품이라 영화도 구입을 해서 보았는데, 이 작품을 볼 때에는 이 감독에 그다지 주목을 하지는 않았던 듯하다(이것은 십 년 전 쯤의 일이라 그래도 기억이 꽤 또렷하다). 이 작품의 발표를 맡고 나는 이 작품에서도 정신분석적인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 풀어내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에(정신분석적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그 당시 쓴 글을 살펴보니, 조금 전에 썼고, 또 내 석사논문의 주제였던 마가릿 말러의 "분리-개별화"라는 이론의 시각에서 이 작품을 보려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전부터도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아마도 석사논문을 마치고 난 후부터 나는 언어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또 동시에 세상을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을 점차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던 듯하다. 칸트의 "물자체" 개념이나, 프로이트의 "사물"(thing)의 개념, 그리고 결정적으로 라캉의 "실재(계)"에 대한 이야기가 그런 인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비평 수업에서 배운 하이데거의 "알레테이아" 개념, 그러니까 존재(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은폐한다는 생각 또한 이러한 인식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생각해 볼 부분이다), 결국에는 좀 더 손쉬운 에드워드 사이드류의 "오리엔탈리즘"에 기대어 발표문을 썼다. 지금 시점에서 이 작품을 분석해 본다면 우리의 삶에서 "환상"이라는 측면이 갖는 중요성 내지는 위험성을 동시에 다루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이 희곡 작품이 주인공 갈리마르의 내면의 다양한 측면을 심층적으로 보여준 반면에,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은폐된 동성애"라는 문제를 평면적으로 제시하는 정도에 그친 듯하여 아쉬움이 많았다. 그렇게 크로넨버거는 망각에 빠졌다가, 이번에 이 영화와 함께 다시 기억의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융과 프로이트라니 좀 생뚱맞다. 아니 인간의 심층 심리, 혹은 인간 마음의 병리적인 측면의 두 대가를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니, 초기의 [비디오드롬]부터 [데드 링거]와 같은 작품과는 연결이 잘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M. 버터플라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기도 어렵다. 하긴 크로넨버거 작품의 흐름을 파악할 역량이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부분이 이 글에서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그래도, 몇 자 적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이 영화를 알게 된 것은 맹정현의 [프로이트 패러다임]이라는 책에서이다. 일단 맹정현이 융과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을 옮겨보도록 하자.


[이 영화에 대해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공부를 좀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융을. 어쨌거나 흥미로운 영화이다. 두 사람의 편지를 모은 책도 나와 있으니, 읽어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Carl Jung] Wikipedia

Individuation : the lifelong psychological process of differentiation of the self out of each individual's conscious and unconscious elements.


[전기]

- 형이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죽음

- 아버지 : 목사

- 어머니 : an eccentric and depressed woman. 밤에 특히 이상증상.

- Trudi(9살 아래 여동생) : 비서 역할

- 2중적 성격 ; 당대적, 18세기적

- 기절하는 버릇(fainting)

-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죽음. 경제적 어려움.

- 1903년 : 부유한 집안의 딸 Emma와 결혼(7살 연하) ; 다섯 명 자녀. 그녀 역시 정신분석가가 됨. (1955년 죽음)

- 리비도의 본질에 대한 융의 다른 견해

- Jung de-emphasized the importance of sexual development and focused on the collective unconscious: the part of the unconscious that contains memories and ideas that Jung believed were inherited from ancestors

- Another primary disagreement with Freud stemmed from their differing concepts of the unconscious.[51] Jung saw Freud's theory of the unconscious as incomplete and unnecessarily negative and inelastic. According to Jung, Freud conceived the unconscious solely as a repository of repressed emotions and desires.[52] Jung's observations overlap to an extent with Freud's model of the unconscious, what Jung called the "personal unconscious", but his hypothesis is more about a process than a static model and he also proposed the existence of a second, overarching form of the unconscious beyond the personal, that he named the psychoid—a term borrowed from Driesch, but with a somewhat altered meaning.[53] The collective unconscious is not so much a 'geographical location', but a deduction from the alleged ubiquity of archetypes over space and time. Freud had actually mentioned a collective level of psychic functioning but saw it primarily as an appendix to the rest of the psyche.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 개념의 차이]

 he avoided a meeting with Ramana Maharshi. He described Ramana as being absorbed in "the self".(자아라는 개념에 빠져 있음)



 그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공포와 공상과학이 뒤섞여 있는   

(데이비드 황. 계속)


 

데이비드 린치/


융의 공시성 이론


1898년 모건 로버트슨 이라는 작가가  타이타닉호라는 배를 소재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배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다는 소설을 썼다. 그리고 실제로  1912년  타이타닉호는 침몰한다.

융은 가끔 직면하게 되는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합리적인 인과율로 설멍할 수 없는 다른 미지의 것과 연관된  심리적 평행현상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공시성 혹은 동시성이라고 이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