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인폭포 안내문
재인폭포는 주위 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맑고 깊으며, 한탄강 상류에 인접한 관광지로서 연천이 자랑하는 명승지의 하나이다.
이 폭포는 이 고장의 줄타기에 뛰어났던 재인의 한과 그 부인의 절개에 관한 전설이 깃든 곳으로, 그 높이는 18.5m나 되며, 밑에는 넓고 깊은 연못을 이루어 피서지로서 특히 이름 높다.
폭포의 주위에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가을 단풍 또한 매우 아름답다.
옛날 고을 원님이 절색의 미모를 가진 재인의 아내를 탐한 나머지,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 위에서 줄을 타는 재주를 보이게 한 뒤 줄을 끊어 죽였다. 그리고 재인의 아내에게 수청을 들게 했으나, 이때 그 아내는 원님의 코를 물어뜯은 뒤 혀를 깨물고 마침내 자결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재인의 한이 서린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에 절개 굳은 코문이(재인의 부인)가 살았다 하여 ‘코문리’로 부르게 되었고, 후일 어음의 변화로 ‘고문리(古文里)’라 다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 재인 아내의 말
서방님하고 나지막이 불러 보지만
이제 서방님은 돌아올 수 없는 곳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저승으로 가버렸지요
아니면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에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나요
그래도 자꾸만 왜 하던 그 목소리 들릴 듯하고
길쌈을 하는 내 손을 은근히 잡아줄 것만 같네요
서방님, 서방님은 진정 가버리신 것인가요
서방님과 저는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자라
스스럼이 없었지요 지체도 신분도 없는
천하디 천한 상것이라 남녀유별이라는 말도 몰랐고요
서방님은 갖바치의 아들
저는 백정의 딸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지만
배곯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요
하지만 동무들과 어울려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 피는 산으로
또 여름 들판 강가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거기다 서방님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았지요
소리면 소리 탈춤이면 탈춤 못하는 게 없었고
거기다 줄타기는 인근에 소문이 파다했지요
머리도 비상해서 어깨너머로 언문을 배워
저에게도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그렇게 가버렸으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서방님 부모님과 저의 부모님도 돈독한 사이였기에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언약도 없었지만
서방님의 나이 스물
제 나이 열여덟에 자연스레 부부의 연을 맺었지요
서방님은 인근 부자들 놀이에 불려 다니며
자신의 재주를 팔았고
또 그 재주 값으로 받은 곡식 등으로
우리 두 식구 먹고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봄이면 칡뿌리나 감자를 캐 먹거나
터무니없는 고리로 양식을 빌려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우리의 형편은
그래도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서방님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으나
제 앞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지요
저 또한 가슴이 많이 아파
금슬 좋은 우리 부부를 시기하는 잡귀를 달래느라
새벽이면 마을 앞 느티나무 앞에 정한수 떠놓고
치성을 올리기도 했지요
아쉽고 서운한 대로 그렇게 서방님과 저
한 평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천하디 천한 우리에게도 이 삶은 살만한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지체도 높고 학식도 높은
거기다 풍채도 좋은 신관사또는
부인에다 첩까지 두고서
왜 저를 탐하는 것일까요
저를 탐하다 못해 서방님까지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만 했나요
미천한 태생에다 배운 것이 없는 저도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는데 말이지요
법이 법을 어겼으니
누구한테 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나요
세상이 진창처럼 더러우니
그 속에 몸담고 살기 위해서는 저도 적당히 더러워져
호구지책이나 하며 이 생을 건너야 하는가요
서방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지막이 서방님하고 부르면
금방에라도 왜하는 서방님의 목소리 귓가에 들릴 듯한데
서방님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저에게도 이 삶은 더 이상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네요
2. 현감의 독백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일장춘몽만 같다
사태가 그토록 걷잡을 수 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아니 막무가내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마냥
그렇게 진행이 되고만 것이
모두 내 탓이라고 혹은 내 탓이 아니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서에 이르기를 시위를 떠난 화살은
누구도 잡을 수 없다고 했던가
모든 일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의 소산인가
인간 동물로 살아가는 무늬인가
뭍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이제는 무심하다
우리 집안은 조부와 선친 대에 이르러
그 명망이 약간 수그러들긴 했어도
충청도 지방에서는 모르는 이 없는 권문세가
십육 대 조부께서는
조선의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
조부와 선친은 관운이 없으셨는지
대과에 거듭 낙방하시자
집안과 향리의 일을 살피시며
장자인 나에게 기대를 걸었지
삼강오륜을 인륜의 근본으로 강조하던 선친
내가 몇 번의 고배 끝에 대과에 급제하자
선친은 내 두 어깨에 가문의 중흥을 매다셨어
선친이나 나나 중앙에 자리를 얻기를 바랬으나
위태로운 성적으로 급제한 나에게는
연천현만 해도 언감생심이었어
지방 한촌이긴 해도
한성에서 그리 멀지 않고
인근 철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평야도 꽤 넓어 벼 소출도 좋은 편이라
삼사 년 무탈하게 잘 다스리면
중앙 요직으로 불러주겠다던
오촌 당숙 도승지의 언질이 없었어도
작은 지방이긴 하나 내가 직접
백성들의 안위를 살핀다는 것은
나름대로 가슴 벅찬 일이었지
선정을 베풀겠다는 내 야심찬 포부는
이미 축하 연회에서부터
방향성을 잃기 시작했어
새로 부임한 사또를 위해
이 지역 토호들이 마련해준
연회 행사에는 남사당패의 놀이마당도 있었는데
재주가 많다 해서 재인이라 불리는 사내가
지금껏 본 어떤 줄꾼보다도 출중하게
줄타기 솜씨를 선보였어
사람들은 저마다 재인의 솜씨에 칭찬을 더 하다가
그 다음 그 아내의 미모를 두고 갑논을박
양귀비가 울고 갈 얼굴이요
초선과 서시는 이름도 못 내민다는 둥
난 그냥 한성 기녀들은 보지도 못한
촌로들의 한담으로 귀를 흘렸지만
내심 그 자태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
지방 현감이 말단직이긴 해도
이런 저런 공사가 다망하여 세월은
쏜 화살처럼 휘휘 지나가는데
그날, 잊을 수 없는 그 날,
바람도 없는데
벚꽃잎이 눈처럼 하얗게 떨어져 내리던 날
먼 산에는 아지랑이 피던 춘삼월의 그 날
고을 시찰을 나갔다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지 종종걸음 치는
그 여인과 맞닥뜨리고 만 것이야
길 맞은편에서 스쳐가는 그녀를 잠시 본 것뿐이지만
그 누구의 설명이 없어도 난
그녀가 재인의 아내라는 걸
촌로들이 침 튀기며 칭찬하던 그 여인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차렸지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예리한 칼날처럼
내 가슴 한 켠을 베고 지나간 그런 느낌이랄까
매혹이라는 단어의 뜻을 난 그 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상처 난 가슴을
천민이라고 해도 그녀, 엄연한 남의 부인이요
나에게도 부인이 있고
기방에서 눈 맞아 데려온 소정이도 있는데
부질없는 욕망이요
잊어야 할 꿈이더라
떨쳐도 떨쳐도 다시 와 붙는 욕망이요
잊어도 잊어도 살아나는 꿈이더라
사서삼경에서 이르는 신독의 예를
무슨 주문처럼 외워도 나 그만
군자의 도리를 놓치고 욕망의 노예가 되었던가
자꾸만 공사를 놓치고
시름이 깊어가면서 몸도 시름시름이라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마음을 토로했던가
귀 밝고 눈 밝은 형방이
(형방의 모친이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내가 급전을 주어 좋은 약재를 구하게 해주었는데)
그녀에게 다리를 놓아주려 애썼는데
워낙 은밀하고 은밀해야 할 일이라
도무지 한 치의 진척도 없었던 터
형방의 충성심이 그 도를 넘고 말았던가
아니 내 간절함이 그 도를 넘고 말았던가
형방은 재인의 재주를 부추켜
폭포를 둘러싼 절벽 양쪽에다 밧줄을 묶고
그 위를 건너게 했던 것이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 누구도 그 전말을 정확히는 모르는데
혹자는 형방이 몰래 그 밧줄을 끊었다고 하고
혹자는 재인이 자신의 재주를 과신하여
현란한 재주를 보이다가 그만 떨어졌다고 하는데
내가 내 코를 꿸 수는 없는 노릇
단순사고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천우신조의 기회가 왔으니
이제 때만 기다리면 되는 법
천한 신분에 뭐 그리 대단한 절개가 있겠는가
서방마저 떠난 지금 호구지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순순히 나의 부름에 응했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그 자태는
호롱불에 비친 그녀의 그 모습은
한 줄기 서늘한 바람으로 내 가슴을 베고 간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어
내 마음은 거친 바다처럼 출렁이면서도
있어야 할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그런 심정이었어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내 술잔에 술을 따를 때
그리고 내 곁으로 다가와 앉을 때
이상한 말이지만 내 가슴의 상처는 점점 커지면서
또 점점 아물어 갔지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삶의 모든 의미가 거기에 있음을 보았어
그리고 그녀가 내 코를 있는 힘껏 물어뜯어
내 코가 반 이상이나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갈 때
이 또한 이상한 말이지만
난 비로소 그녀와 한 몸이 된 느낌이었어
나 이제 떨어져 나간 코를 하고
비록 조선팔도를 유리걸식하는 신세가 되었건만
경서에 이르듯 시위를 떠난 화살은 누구도 멈출 수 없으니
바람도 없는데
벚꽃잎이 눈처럼 하얗게 떨어져 내리던 날
먼 산에는 아지랑이 피던 춘삼월의 그 날
그녀가 한 줄기 서늘한 바람으로
내 가슴 한 켠을 베고 간 것을
난 후회하지 않아, 정말로
3. 줄 위에 오른 재인
간밤 내리던 비 그쳐
하늘은 높푸르고
폭포는 맑고 힘차게 흰빛으로 부서져 내린다
우리네 인생살이는 아무리 곱씹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요
일장춘몽인 것만 같구나
허나 이 절벽과 저 절벽 사이
수십 길 허공에 걸어둔 길 위에
맨몸으로 올라서서
바람의 방향 가늠하고
두 팔을 벌린 채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취한 듯 홀린 듯 위태롭게 흔들리며
나아가는 이 순간
온갖 상념들은 뒤로 물러나고
길이 끊어진 곳에서
스스로 길로 일어선
폭포 소리만 다시금 번개처럼 나를 꿰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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