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해도 좋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어디론가 나들이를 떠나는 것도 좋으리라. 가을 태풍도 지나가고, 아침 저녁으로 다소 쌀쌀해진 이번 주의 하늘은 정말 '눈이 부시게 푸르'러 내 마음은 자꾸만 밖으로 나돌았다. 그러다가 오늘, 목요일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자 내 발길은 잽싸게 재인폭포로 향했다(멀리 떠날 여유는 없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자니 좀이 쑤셔서).
1997년 1월 1일, 재인폭포의 존재를 알게 된 시점에서 거의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나의 거처는 한 자리였고, 재인폭포야 수몰 위기를 맡기도 했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기에, 나는 나의 애마 아반떼를 타고 가서 - 지금은 아반떼 XD구나 - 주말 부부처럼, 혹은 숨겨둔 정부처럼 주말에, 또는 평일에, 어떤 때는 신새벽에, 심지어 한밤중에도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정말 몇 번이나 재인폭포를 찾았을까? 따로 세어 본 적이 없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백 번은 족히 넘을 것이고 잘 하면 이백 번에 도달할 지도 모르겠다. 서울 월계동의 우리집에서 연천군 고문리에 있는 재인폭포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처음에는 두 시간이 넘게 걸리던 것이 이제는 도로 사정이 많이 좋아져서 한 시간이 조금 넘으면 된다.
동부 간선도로를 타고, 동일로를 지나, 새로 생긴 3번 국도로 의정부 민락동, 남양주 고읍동을 지나, 이 3번 국도의 공사가 끝난 부분 - 이곳의 이름은 봉양 교차로이다. 지도를 그려나갈 정도로 훤한 길이지만 새로 생긴 이곳 지명은 몰라 살짝 컨닝 -에서, 동두천을 달리고, 동두천의 천변 도로를 달리고, 다시 원래의 3번 국도를 신나게 달려, 한탄강을 건넌 다음 전곡을 지나고, 전곡이 거의 끝나는 곳에서 우회전해서 37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신답리로 좌회전, 또 한참을 달리다, 우회전 해서 조금 가다보면 공사가 거의 끝난 한탄강댐이 거대하게 버티고 있고, 거기서 또 조금만 더 가면 도로가 끝나는 곳, 군부대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곳 바로 앞이 재인폭포의 입구이다.
이것은 오늘 갈 때 이용했던 경로이고 - 요즈음은 가장 빠른 이 경로를 자주 애용한다 - 돌아올 때에는 적성이나 백학, 아니면 백의, 포천 쪽으로, 심지어는 더 북쪽으로 동송 쪽으로 가서 빙 둘러오기도 한다. 그러고보니 재인폭포뿐만 아니라, 경기도 북부의 지역들은 내 한가한, 슬픈, 고독한, 즐거운 시간의 놀이터였다. 사진 찍는 실력만 좀 뒷받침이 된다면 "경기도 북부의 가볼 만한 곳"이라는 이름으로 안내 책자를 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나는 유독 이 재인폭포에 흔히 하는 말로 필이 꽂혔을까? 그것은 한두 마디 말로 정리될 수 있는 것도, 또 정리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또 폭포까지 가는 협곡이 아름답고 또 폭포를 둘러싼 절벽이 주상절리를 이루고 있는 데다가, 폭포가 떨어지는 곳은 보기 드물게 수직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재인과 재인 아내의 그 서럽고 안타까운 사랑의 이야기와, 사또의 욕망을 둘러싼 전설에 한 마디로 매료되었다는 것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거기다 재인폭포는 내 창작의 소재이기도 해서, 나는 재인폭포를 소재로 해서 산문을 쓰기도 했고 - 이 글 또한 그러한 글 중 한 편이다 - 시를 쓰기도 했다. '재인 아내의 말'이라는 시도 썼고, 마지막으로는 '현감의 독백' 즉 사또의 말을 소재로 시를 쓰기도 했다. 언제간 붓이 움직여 준다면 전설의 중심에 있는 '재인의 말'도 시로 써보고 싶다.
오늘의 나들이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인폭포가 별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없이, 그냥 가서 - 폭포가 말랐더라도 - 그냥 내가 좋아하는 바위에 앉아 한 30분 명상이나 하고 오자는 그런 생각으로 향했다. 기대도 별로 없고 마음도 가벼워서일까, 폭포는 오늘 기대 이상의 광경을 나에게 선사했다. 폭포에 도착해서 수첩에 적은 글을 약간만 수정하여 옮겨본다. 폭포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반 정도였던 듯하다.
"물이 거의 말랐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며칠 전에 이 지역에도 꽤 비가 왔는지, 폭포가 우르릉 쾅쾅은 아니더라도 쏴쏴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고 있다. 수첩을 보니 꼭 한 달 만에 다시 재인을 찾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폭호가 곧 마를 듯한 기색이었는데 - 그러면 폭호 속에 살던 물고기들은 어디로? - 오늘은 맑은 옥빛 물을 가득 담고 있다. 폭포의 하단부에는 퍼져나가는 물보라를 따라 피어난 무지개가 바라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하고, 나이 지긋한 분들로 이루어진 대여섯 분의 사진 동호회 회원들은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높다랗게 세운 삼각대 위에 놓은 카메라의 렌즈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폭포의 왼쪽 편 주상절리에는 맑은 날이면 늘 그렇듯이 반사된 물빛이 하얗게 어룽거리는 것이 묘한 느낌을 준다.
물 비린내도 너무 심하지 않아 상큼한 느낌이었고, 제철을 만난 잠자리들이 나비며 이름모를 새들을 대신하여 폭호 위를 여유롭게 날다가 갑자기 급선회를 한다. '수직의 파문' 대신 팔랑개비처럼 빙글뱅글 돌면서 나뭇잎들이 이따금씩 폭호로 투신을 하고, 폭포를 둘러싼 절벽 위의 나무들 중 한두 그루는 막 단풍이 들었다.
절벽을 타고 흐르다 하얗게 알알이 부서진 물방울들이
폭호의 옥빛 물에 부딪히며
더욱 흰 알갱이들로 다시 한 번 잠시 빛났다가
이내 폭호의 물과 하나가 된다
정말 좋은 날씨다. 온갖 걱정이며 근심이며 불안이며 치욕이며 핵무기며 파멸이며 그런 것들은 모두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듯하다.
등 뒤로 내리쬐는 약간은 따가운 가을 햇살이 어릴 적 어머니의 따뜻한 품 - 사실 기억도 안 나지만 - 처럼 마음을 평화롭고 여유롭게 한다."
재인과 나의 또 한 번의 짧은 만남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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