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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재인폭포

재인 폭포에서 - 재인 아내의 말

by 길철현 2016. 4. 15.


재인 폭포에서

                 -- 재인 아내의 말


서방님하고 나지막이 불러 보지만

이제 서방님은 돌아올 수 없는 곳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저승으로 가버렸지요

아니면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에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나요

그래도 자꾸만 왜 하던 그 목소리 들릴 듯하고

길쌈을 하는 내 손을 은근히 잡아줄 것만 같네요

서방님, 서방님은 진정 가버리신 것인가요

서방님과 저는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자라

스스럼이 없었지요 지체도 신분도 없는

천하디 천한 상것이라 남녀유별이라는 말도 몰랐고요

서방님은 갖바치의 아들

저는 백정의 딸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지만

배곯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요

하지만 동무들과 어울려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 피는 산으로

또 여름 들판 강가에서 놀던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거기다 서방님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많았지요

소리면 소리 탈춤이면 탈춤 못하는 게 없었고

거기다 줄타기는 인근에 소문이 파다했지요

머리도 비상해서 어깨너머로 언문을 배워

저에게도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그렇게 가버렸으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서방님 부모님과 저의 부모님도 돈독한 사이였기에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언약도 없었지만

서방님의 나이 스물

제 나이 열여덟에 자연스레 부부의 연을 맺었지요

서방님은 인근 부자들 놀이에 불려 다니며

자신의 재주를 팔았고

또 그 재주 값으로 받은 곡식 등으로

우리 두 식구 먹고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봄이면 칡뿌리나 감자를 캐 먹거나

터무니없는 고리로 양식을 빌려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우리의 형편은

그래도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서방님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으나

제 앞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지요

저 또한 가슴이 많이 아파

금슬 좋은 우리 부부를 시기하는 잡귀를 달래느라

새벽이면 마을 앞 느티나무 앞에 정한수 떠놓고

치성을 올리기도 했지요

아쉽고 서운한 대로 그렇게 서방님과 저

한 평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천하디 천한 우리에게도 이 삶은 살만한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지체도 높고 학식도 높은

거기다 풍채도 좋은 신관사또는

부인에다 첩까지 두고서

왜 저를 탐하는 것일까요

저를 탐하다 못해 서방님까지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만 했나요

미천한 태생에다 배운 것이 없는 저도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는데 말이지요

법이 법을 어겼으니

누구한테 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나요

세상이 진창처럼 더러우니

그 속에 몸담고 살기 위해서는 저도 적당히 더러워져

호구지책이나 하며 이 생을 건너야 하는가요

서방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지막이 서방님하고 부르면

금방에라도 왜하는 서방님의 목소리 귓가에 들릴 듯한데

서방님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저에게도 이 삶은 더 이상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네요

                                    

(14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