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재인폭포, 130725, 0731
에필로그까지 적은 글이고, 이제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처럼, 그래서 내 마음 속에 오롯이 간직해야 할 곳이라고 이야기했던 재인폭포. 그 재인폭포를 다시 찾은 이야기를 하려니까, 전편에서 죽었던 주인공이 어떤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그래서 다소 억지스러운 속편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내 생각과 다를 땐 세상에 나를 맞춰야지, 내가 무슨 독불장군이라고 세상을 내 생각에 맞추려 하겠는가? 더군다나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 한 자락이 가닿았던 곳을 되찾게 되었으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어야 할 경사로운 일이 아닌가? 누릴 수 있는 동안 누린다는 것.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좀 더 꼼꼼히 조사를 해보았더니, 한탄강 댐이 원래 계획했던 “다목적 댐”에서 순수 “홍수조절 용” 댐으로 변경되어 평소에는 물을 가둬두지 않기 때문에, 재인 폭포가 완전히 수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 물에 잠긴 곳이 물이 빠져나간 뒤에는 흙이나 기타 부유물들이 특히 나뭇가지를 중심으로 흉하게 남아 있게 되니까 예전의 모습이 어느 정도 훼손되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댐이 2014년에 완공될 예정이므로 시간이 좀 더 지나야 재인폭포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분명히 알게 되리라.
지난번에 글을 쓸 때 나는 이 한탄강 댐을 연천 댐이라고 잘못 명명했다. 왜 잘못 알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연천 댐이라는 말이 굉장히 귀에 익다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하는 가운데,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현재 신답리의 궁신교가 있는 자리가 연천 댐이 있던 자리이고, 이 연천 댐이 99년 홍수에 8월 1일 왼편 둑이 40미터 가량 무너져 댐 하류 지역에 상당한 피해를 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현재 건설 중인 한탄강 댐은 이 연천 댐보다 대략 2킬로미터 정도 상류에 있다). 이 기사를 보니까 아득히 묻혀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씩 떠오른다.
처음 재인폭포를 찾았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재인폭포에 갈 때 3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통현리 쪽으로 해서 들어가는 길(78번 도로)을 주로 택했는데, 나중에는 전곡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좌회전해서 들어가는 신답리 쪽, 그러니까 연천 댐이 있었던 쪽으로 해서 들어가기도 하고, 나올 때도 그 코스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 연천 댐을 지날 때는 물이 가득 차 제법 큰 호수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그런대로 볼만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 글을 적으면서 당시 일기를 살펴보니까, 연천 댐이 붕괴되기 직전인 7월 30일에 그곳을 지났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당시 동생을 간호하느라 대구에 내려와 있다가 오랜 만에 서울에 올라왔는데, 서울에 올라온 김에 이 재인폭포를 찾았던 것이다. 내 괴로운 심사를 재인폭포 앞에서 아침 일찍 홀로 달래고 싶어서 이 연천 댐 바로 옆에 있는 영빈각이라는 모텔에서 일박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일기에는 이 연천 댐 붕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고 “우연의 일치로, 내가 요번에 여행을 다녀온 동두천, 전곡, 연천, 백학, 적성 등이 어제 하루 종일 물난리가 나서 텔레비전이 야단법석을 떨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 연천 댐이 무너져 통행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보다 좀 상류 아우라지길(지금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에 있는 낮은 다리를 이용한 기억도 난다. 이 다리는 비가 많이 올 때면 물에 잠겨 지날 수가 없고, 또 그렇지 않을 때에도 차로 지나가려면 좁고 좌우에 난간이 없어 항문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언젠가 한 번 비가 많이 왔을 때 떠내려간 적도 있었다.
연천 댐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는데, 이 부분을 적다 보니까, 그 동안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던 사실, 한탄강 댐 건설을 추진하는 정부 측과 댐 건설을 반대하는 환경단체와 지역주민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뒤늦게나마 한 마디 적어보고 싶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에 섣부르게 말을 내뱉기는 어렵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나로서는 이 한탄강 댐 건설이 내 마음의 한 거처라고 할 수 있는 재인폭포에 어떤 식으로든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달가울 수가 없는 노릇이나 지금 일의 진행 상황은 그래도 최소한의 타협점은 찾은 상태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올해 초에 다시 한 번 재인폭포를 찾았으나, 그 때에도 재인폭포의 출입은 여전히 통제되고 있었고, 그래서 재인폭포는 정말로 이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각인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7월 21일 폭포가 보고 싶어 신철원 삼부연 폭포로 향하다가, 운천 교차로에서 비둘기낭폭포 안내판을 보고는 그 쪽으로 향했다. 이 비둘기낭폭포의 존재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으나, 나는 이 폭포가 “상수원 보호구역 내에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서 몇 년 전에 보호가 해제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위치도 나는 관인면의 중리 저수지 부근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날의 만남은 전혀 뜻밖이었다. 재인폭포와 마찬가지로 한탄강에 위치하고 있는 비둘기낭폭포(재인폭포보다 대략 십 킬로미터 상류)는 평지에서 내려간 협곡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나, 바위를 정으로 쪼아 작은 기둥들을 붙여 놓은 듯한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는 점이나, 침식 작용(플럭킹 현상)으로 동굴이 발달해 있다는 점 등 여러 모로 재인폭포와 흡사한 점이 많았고, 이 날은 특히 비가 많이 온 다음이어서 그랬겠지만 그 사이로 거센 물결이 흘러가는 폭포 아래쪽의 협곡, 그 높이가 15미터는 족히 될 협곡이 특히나 환상적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재인폭포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폭포를 재인폭포 대신으로 삼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한치 앞을 제대로 내다보기가 힘든 것이 세상일이었다.
며칠 뒤 점심을 먹으면서 신문을 보다가 이 비둘기낭폭포를 소개하는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 글에서는 인근의 재인폭포도 함께 찾으면 좋을 명승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재인폭포는 들어갈 수 없는데 기자가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쓴 것이라고 속으로 혀를 찼다. 집으로 와서 “뜻밖에 찾은 비둘기낭폭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진입로를 새롭게 정비해서 두 달 전부터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재인폭포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이미 시간이 저녁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날(7월 25일) 아침 일찍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가면서 재인폭포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전날 자기 전에 나는 오랜만에 내 소니 카메라를 충전시켰다. 캠코더는 배터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전원을 꽂으면 작동이 되는데, 배터리만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의 일 년 만에 다시 찾게 된 재인폭포. 재인폭포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도 자못 궁금했다. 인터넷으로 보니 진입로도 새로 내고 폭포 바로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높다란 계단도 새로 만들었던데. 7시에 출발하여 3번 국도를 타고 내처 북쪽으로 달렸는데, 덕계, 덕정 등 시 외곽에도 생각보다 차가 많아 마음만 앞서 달려 나갔다. 재인폭포에 도착한 시각은 8시 40분. 새로운 진입로는 이전에 주차장이 있던 곳보다 3,4백 미터 위쪽에 있었는데, 부근을 소공원식으로 깔끔하게 단장해 놓았다.
공원의 오른편에는 고동색으로 된 재인폭포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재인폭포로 내려가는 철제 계단이 있었는데, 철문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어 아래로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계단 왼쪽편에는 주전망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요즈음 유행을 따르려고 그랬는지, 바닥을 강화 유리로 만들어 놓아서 사람의 가슴을 다소 졸이게 했다. (바닥이 강화 유리이므로 덧신을 신고 들어가라는 안내문에 따라 덧신을 신고 들어갔는데 내 뒤로 온 사람 중에서 덧신을 신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망대에 들어서자, 짐작했던 대로, 유난히 길고 수량도 많았던 장마 탓에 계곡으로 물이 많이 차올라 계단 하단부는 물에 잠긴 상태였다. 폭포 아래로 내려가서 폭포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27미터 높이라는 전망대에서 폭포를 내려다보았다. 폭포의 약간 왼쪽편에서 폭포를 내려다보는 이 위치는 예전에는 누릴 수 없던 것이기에 나름대로 흥취가 있었다. 폭포는 흰빛으로 우렁차게 떨어져 내리고, 용소는 옅은 옥빛의 물을 가득 담고 있었는데 용소가 끝나는 곳에서는 역류해 온 흙탕물과 묘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얼마쯤 그렇게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일찍 나들이를 나선 30대 정도의 부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들의 포토존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호젓이 폭포를 감상할 기회를 놓치게 되어 기분이 상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려면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폭포를 바라보던 여자 분이 뜻밖에 말을 했다. 폭포를 둘러싼 절벽의 상단부 끝에 자리한 나무들의 나뭇잎에 남아 있는 흙탕물이 마른 흔적이 무얼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대답처럼 물이 거기까지 차오른 흔적이라고 한다면(달리 무얼 의미하겠는가?) 물이 최대로 가득 차올랐을 때는 재인폭포가 거의 수몰 상태에까지 갔다는 말이었다. 이 높은 계곡 전체에 18미터가 넘는 재인폭포 높이까지 물이 차오른다는 것은 아무래도 눈으로 보지 않은 다음에야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아쉬움이 남았던 나는 약간의 위반을 했다. 계단이 있는 철문 아래와 바닥 사이가 많이 떨어져 있어서 몸을 잔뜩 숙인 다음 그리로 들어갔던 것이다. 실제 계단이 시작되기 전 3,4미터는 지면과 평행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폭포를 정면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폭포 윗부분의 개울과 폭포가 떨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실제 계단 입구는 산업용 테이프를 대각선 방향으로 마구 감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놓은 상태였다.) 한두 명씩 오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그냥 폭포를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수첩에 담으려 했으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고, 햇살도 점점 더 따가워져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려 하류 쪽을 보니 연두빛을 약간 띤 누른 물이 계곡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이 날의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 날의 방문이 폭포 아래쪽으로 내려가지 못했고, 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와서 호젓하게 폭포를 즐길 수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아서 그저께, 7월의 마지막 날에 다시 재인폭포를 찾았다.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빨리 출발했기 때문에 폭포에 도착한 시각은 일곱 시 사십 분. 폭포 근처에 들어설 무슨 시설인지를 만드는 인부들은 벌써 나와 일을 시작한 상태였지만, 재인폭포는 고즈넉하기 짝이 없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철문도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다. 며칠 전보다 물이 많이 빠져서 계단 아랫부분도 제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나는 부푼 마음으로 폭포 앞으로 다가갔다. (몇 년 전부터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폭포 앞 출입을 금지했었는데, 지금은 안전이 확보된 상태인가? 개인의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공적인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왔다 갔다 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걸 따라야만 하는가?) 그리고는 폭포 정면 용소가 끝나는 곳에 있는 높이 1미터 가량의 바위 위에 앉았다. 예전에는 비가 아주 많이 온 상태가 아니면 늘 그 앞에서 앉아서 폭포를 바라보았는데, 지금은 물이 차올라서 위에 앉아야만 했다.
폭포를 앞에 두고 간단하게 사진을 몇 장 찍고, 가져온 수건을 바위 위에 깐 다음(바위가 많이 젖어 있는 상태였다) 폭포를 바라보면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수첩에다 몇 자 적었다. 요즈음 내 나름대로의 명상(명상이라기보다는 가만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추적하고, 그것을 또 컴퓨터에다가 적기도 하는 것인데)을 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작은누나에 대한 거친 욕설과 맹렬한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급기야는 폭포를 앞에 두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안의 파괴적 욕망, 에너지는 <글로 풀어나가는 것>이 하나의 답이 될 듯하다’는 식으로 단락을 지었다.
한 시간 이상을 그렇게 폭포 앞에 앉아 있었고, 그 동안에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돌아서 나오는데 들어올 때는 쉽게 건너온 바위들이 물이 차올라 자칫 잘못하면 신발이 젖을 지경이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내가 내려오고 난 다음에 비가 온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계단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아뿔사, 새벽에 내린 비가 강물로 유입이 되었는지, 아니면 방류를 중단 한 것인지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강물이 역류하여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이 물에 잠기고 말았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계단까지는 5,6미터 정도였는데, 물이 완전 흙탕물은 아니어도 희뿌윰했기 때문에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알 수 없는 깊이가 나를 두렵게 했다. 119에 고립 신고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곳은 휴대폰 통화도 안 되는 지역이었다. 수영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생명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어도 다른 무엇보다 휴대폰이 물에 젖는다면 못 쓰게 될 것이 염려스러웠다. 당황한 가운데에서도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는 일단 긴 나뭇가지를 하나 주어 가장자리의 물의 깊이를 재어보았다. 오륙 십 센티미터는 될 듯했다. 가장자리가 이 정도라면 중간이 얼마나 깊을지 모르겠는 걸. 그러면서 또 물 위로 튀어나와 있는 계단 난간의 기둥이 마지막 난간 기둥이기 때문에 내 키는 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가 불분명한 추측도 했다.
물이 점점 더 차오를 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재빨리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던 것이 수첩, 카메라, 점퍼, 수건 등을 담기 위해서 조그만 배낭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윗도리와 바지를 벗어서 넣고, 신발과 양말도 넣었다. 마지막 한 장 남은 사각팬티를 두고 잠시 망설이다가 아직은 이른 시각이니까 재빨리 건너간 다음 입어야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두 손으로 가방을 높이 치켜들고 서너 걸음 나아갔을까, 뭔가 구령 소리 비슷한 것이 나더니만 젊은 군인들이 수십 명이 계단을 돌아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아마도 이들은 인근부대에서 훈련을 받던 신병들이었던 것 같은데)! 건너는 것에 너무 신경을 쓰느라 군인들이 무리를 내려왔음에도 그 소리를 못 들은 것이었다. 이럴 수가? 당황한 나는 재빨리 철제 계단을 지지하고 있는 굵고 높다란 쇠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정신이 없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물은 배 정도까지 찼던 듯하다. 그러나 계속 그곳에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면서 이 군인들이 거의 내 아들뻘인 젊은 남자들이고, 목욕탕에서라면 거리낌 없이 서로의 알몸을 보여주었을 것 아닌가 하고 자기합리화를 했다. (예전에 중학교 때인가 대구의 앞산 달비골이라는 계곡에 갔다가 남자 어른들이 모두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 적이 있었는데.) 계단을 향해 몇 걸음을 옮긴 다음 그들 앞에 알몸을 드러내어야만 했다. 그 다음엔 재빨리 몸을 돌려 몸을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팬티를 걸쳤다. 팬티를 입고 나자 좀 여유가 생겼다. 나 다음의 첫 번째 방문객인 이 군인들은 물이 차올라서 계단 아래까지는 내려오지 않고 중간쯤에서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어주는 담당자가 있고 세 명이 난간을 꽉 채우고는 내 쪽으로는 등을 돌리고 찍고 있어서, 오히려 좋은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창피한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옷이 젖지 않고 무사히 건너왔다는 것, 또 좋은 글감 내지는 이야기 거리를 하나 얻었다는 생각이 오히려 마음은 흐뭇한 쪽이었다. 당황한 순간에 배낭 밑 부분이 물에 살짝 젖기도 했으나 안쪽까지 물이 스며든 것은 아니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신발의 흙이 배낭에 가득했으나 뒤집어서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바지를 입고 윗도리를 걸치고 양말에다 신발을 신고 나니,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던 군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내가 앉아 있던 바위는 물에 거의 잠긴 상태였다.
위로 올라오니 한 가족이 전망대에서 폭포를 보고 있었는데, 여섯 일곱 살 된 사내아이 한 명은 유리로 된 전망대가 겁이 나서 가지를 못했고, 또 그보다 어린 사내아이는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 보지 않았던 새롭게 단장된 “재인폭포 안내판”을 보니까 새로운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 전문을 소개한다.
가마골 입구에 있는 18.5m의 폭포, 현재 이 폭포는 고을원의 탐욕으로 인한 재인의 죽음과 그 아내의 강한 정절이 얽힌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문헌에는 전설과 상반된 기록으로도 전해내려 온다.
옛날 어느 원님이 이 마을에 사는 재인(才人) 아내의 미색을 탐하여 이 폭포 절벽에서 재인으로 하여금 광대줄을 타게 한 뒤 줄을 끊어 죽게 하고 재인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절개 굳은 재인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짓으로 수청을 들며 원님의 코를 물어뜯고 자결하였는데, 그 뒤부터 이 마을을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코문리’라 불리게 되었으나, 차츰 어휘가 변하여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반면 옛날에 한 재인(才人)이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과 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게 되었으나, 자기 재주를 믿고 흑심을 품은 재인은 그 자리에서 장담하며 약속하기를, ‘이 절벽 양쪽에 외줄을 걸고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하자 마을 사람은 재인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 아내를 내기에 걸게 되었다.
잠시 후 재인은 벼랑 사이에 놓인 외줄을 타기 시작하는데, 춤과 기교를 부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평지를 걸어가듯 하자, 이에 다급해진 마을 사람은 재인이 줄을 반쯤 지났을 때 줄을 끊었고 재인은 수십 길 아래 구렁으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로 부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상반되는 전설을 담고 있기도 하다.
현재 재인폭포는 보개산과 한탄강이 어우러지는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맑은 물로 인하여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연천군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문헌에 실린 상반되는 전설에는 원래 전설이 담고 있는 애틋함이나 슬픔도, 또 지배 계층의 핍박에 대한 분노와 서러움도 없는, 두 촌부의 개인적인 자만심과 시기의 차원만 있다.이 안내문을 세운 사람은 ‘안내판’에서 ‘판’이라는 말이 갖는 억센 어감이나, ‘간판’을 떠올리게 하면서 묘하게 상업성과 결부된다는 점 등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 생각이 재인폭포의 원래 전설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전의 안내문이 좀 전형적인 대로 운치가 더 있지 않나 한다.
그 기간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누릴 수 있는 동안 누린다는 것.
되찾은 재인폭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재인폭포에서의 해프닝]
안녕하세요! 지라시 애청자 여러분!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서울하고도 노원구에 살고 있는 사십대 후반의 노-노총각 길철현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펜을 들게 된 것은 한탄강의 명승지라고 할 수 있는 재인폭포를 지라시 애청자분들에게 널리 알리고, 또 그곳에서 며칠 전에 생긴 작은 해프닝을 이야기할까 해서입니다. 물론 그 해프닝의 주인공은 바로 접니다.
한탄강 상류인 연천 고문리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재인폭포는 주위 풍광이 아름답고 특이한데요. 거기에 덧붙여 이 마을에 살던 줄타기의 명수, 재인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에 관한 슬프고도 애절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지요. 저 역시도 첫눈에 이 재인폭포의 아름다움에 반해 벌써 이십 년 가까이 이곳을 즐겨 찾고 있었는데요. 몇 년 전 하류에 한탄강 댐 공사가 시작된 뒤로는, 비가 많이 올 때는 계곡에 물이 차올라 들어갈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이전의 진입로보다 훨씬 위쪽에 새로 진입로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지요. 바로 그 다음 날 저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떠지지 않는 눈을 연신 비벼대며 재인폭포로 향했습니다. 혼자서 오롯이 폭포를 감상하려고요.
새로 단장한 곳에는 바닥이 유리로 된 높다란 전망대와, 또 계곡으로 내려가는 엄청나게 긴 철제 계단이 절벽 옆 공중에 설치되어 있었는데요. 여기서 잠깐 설명을 덧붙이자면 대부분의 폭포와 다르게 재인폭포는 평지가 움푹 꺼지면서 생긴 협곡에 위치해 있어서 폭포를 정면에서 보려면 오히려 계곡으로 내려가야 하지요. 거기다 계곡의 양옆은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고요. 요즈음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비둘기낭폭포와 흡사한 지형이라고 할까요.
저는 이 길고 아찔한 계단을 따라 내려간 뒤 폭포 정면에 놓인 바위 위에 앉아 폭포를 바라보기 시작했답니다. 긴 장마에 폭포는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힘차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저는 그 우렁찬 폭포를 바라보면서 오십이 다 되도록 장가도 못 간 신세한탄을 속으로 털어놓았답니다. 아는 사람들이 저더러 “이상해졌다”고, “노총각 히스테리가 심하다”고 하던데요. 애청자 여러분! 이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못 갔으면 이상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요?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반쯤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답니다. 아침 이른 시각이라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너무 오래 있은 것은 아닌가 하고 몸을 돌려 나오는데, 뭔가가 이상했습니다. 들어올 때는 쉽게 건너온 바위들이 물이 차올라 자칫 잘못하면 신발이 젖을 지경이었던 거지요.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예감과 함께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강물이 역류하여 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이 물에 잠기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혼자 생각에 너무 빠져 있느라 물이 차오르는 것도 몰랐던 겁니다.
어떡하지?
112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아니, 여긴 휴대폰도 안 되잖아?
어떡하지?
당황한 제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저는 마음을 가다듬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계단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어림짐작해 보았습니다. 대략 7,8미터는 될 듯했습니다. 물빛이 탁해서 그 깊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고요. 바로 얼마 전에 지나온 길인데도 바닥이 어쨌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데요. 일단 긴 나뭇가지를 주워 가장자리의 물 깊이를 재어보았더니 5,6십 센티는 되는 듯했습니다.
물이 점점 더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행동을 취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조그만 배낭을 가져온 것인데요. 저는 먼저 윗도리와 바지를 벗어서 배낭에 넣고, 그 다음 신발과 양말도 넣었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장 남은 사각팬티를 두고 잠시 고민에 빠졌지요.
팬티는 입고 건널까?
혹시 누가 내려오면 어떻게?
아직은 이른 시간이니까 아무도 안 올 거야.
팬티가 젖으면 얼마나 찜찜한데.
그래, 재빨리 건너가서 후다닥 입으면 되지 뭘.
그렇습니다. 저는 코앞에 닥칠 일은 상상도 못한 채, 과감히 팬티를 벗어 배낭에 넣고는 물로 들어갔습니다. 혹시라도 배낭에 물이 들어갈까 배낭을 든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요. 그렇게 서너 걸음 나아갔을까요? 갑자기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만, 거짓말처럼 젊은 군인들이 계단의 꺾어진 부분을 돌아 떼를 지어 제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엉겁결에 저는 바로 옆에 있는 계단 지지용 굵은 쇠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는 곰곰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떡하지?
군인들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그러기에, 팬티는 왜 벗었단 말이야, 이 미친놈아!
하지만 때늦은 후회이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보니까,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인근 부대의 군인들이 무슨 기념촬영이라도 나온 듯했습니다. 그들은 계단 아래까지는 내려오지 않고 중간쯤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세 명이 한 조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요. 쉽게 떠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것, 당당하게 행동하자.
여학생들이 단체로 온 것도 아닌데, 뭐.
사실, 뭐, 이 군인들은 내 아들뻘 아닌가?
또 목욕탕에서 수도 없이 서로의 알몸을 보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마냥 그렇게 몸을 숨기고만 있을 수 없었던 저는 아무 일도 아닌 양 태연하 게 계단을 향해 물을 헤치고 나아갔지요. 사실 정신이 없어서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다행히도 물은 깊은 곳에서도 내 배 이상으로 올라오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군인들 앞에 내 보잘 것 없는 알몸을 드러내야만 했지요. 뭐, 생각보다는 그렇게 창피하지도 않더군요. 그 다음에는 재빨리 몸을 반대로 돌려 수건으로 몸을 닦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팬티를 걸쳤습니다. 팬티를 입고 나니까 그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군요.
저는 다시 한 번 수건으로 몸을 꼼꼼히 닦은 다음 천천히 바지를 입고 윗도리를 걸쳤지요. 그 와중에 군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가면서 계속 사진을 찍고 있었고요. 어차피 그 많은 군인들 사이를 뚫고 지나갈 수도 없고 해서, 저는 신발에 묻은 모래며, 배낭 안에 들어간 모래까지 최대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털어내었지요. 그러고 나니까 군인들은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더군요. 나는 빈 계단을 천천히 걸어올라 갔습니다.
애청자 여러분! 이것이 제가 며칠 전 겪은 재인폭포에서의 해프닝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어 마디만 덧붙일까 합니다. 재인폭포 관리 담당자 분! 저처럼 정신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안전관리에 좀 더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 재인폭포에서 못 볼 걸 보고만 군인들! 그 날 본 아저씨, 변태 아저씨 아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는 걸 양해해 주기 바라며, 이만 펜을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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