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 폭포에서
-- 현감의 독백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일장춘몽만 같다
사태가 그토록 걷잡을 수 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아니 막무가내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마냥
그렇게 진행이 되고만 것이
모두 내 탓이라고 혹은 내 탓이 아니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서에 이르기를 시위를 떠난 화살은
누구도 잡을 수 없다고 했던가
모든 일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의 소산인가
인간 동물로 살아가는 무늬인가
뭍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이제는 무심하다
우리 집안은 조부와 선친 대에 이르러
그 명망이 약간 수그러들긴 했어도
충청도 지방에서는 모르는 이 없는 권문세가
십육 대 조부께서는
조선의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
조부와 선친은 관운이 없으셨는지
대과에 거듭 낙방하시자
집안과 향리의 일을 살피시며
장자인 나에게 기대를 걸었지
삼강오륜을 인륜의 근본으로 강조하던 선친
내가 몇 번의 고배 끝에 대과에 급제하자
선친은 내 두 어깨에 가문의 중흥을 매다셨어
선친이나 나나 중앙에 자리를 얻기를 바랬으나
위태로운 성적으로 급제한 나에게는
연천현만 해도 언감생심이었어
지방 한촌이긴 해도
한성에서 그리 멀지 않고
인근 철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평야도 꽤 넓어 벼 소출도 좋은 편이라
삼사 년 무탈하게 잘 다스리면
중앙 요직으로 불러주겠다던
오촌 당숙 도승지의 언질이 없었어도
작은 지방이긴 하나 내가 직접
백성들의 안위를 살핀다는 것은
나름대로 가슴 벅찬 일이었지
선정을 베풀겠다는 내 야심찬 포부는
이미 축하 연회에서부터
방향성을 잃기 시작했어
새로 부임한 사또를 위해
이 지역 토호들이 마련해준
연회 행사에는 남사당패의 놀이마당도 있었는데
재주가 많다 해서 재인이라 불리는 사내가
지금껏 본 어떤 줄꾼보다도 출중하게
줄타기 솜씨를 선보였어
사람들은 저마다 재인의 솜씨에 칭찬을 더 하다가
그 다음 그 아내의 미모를 두고 갑논을박
양귀비가 울고 갈 얼굴이요
초선과 서시는 이름도 못 내민다는 둥
난 그냥 한성 기녀들은 보지도 못한
촌로들의 한담으로 귀를 흘렸지만
내심 그 자태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
지방 현감이 말단직이긴 해도
이런 저런 공사가 다망하여 세월은
쏜 화살처럼 휘휘 지나가는데
그날, 잊을 수 없는 그 날,
바람도 없는데
벚꽃잎이 눈처럼 하얗게 떨어져 내리던 날
먼 산에는 아지랑이 피던 춘삼월의 그 날
고을 시찰을 나갔다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지 종종걸음 치는
그 여인과 맞닥뜨리고 만 것이야
길 맞은편에서 스쳐가는 그녀를 잠시 본 것뿐이지만
그 누구의 설명이 없어도 난
그녀가 재인의 아내라는 걸
촌로들이 침 튀기며 칭찬하던 그 여인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차렸지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예리한 칼날처럼
내 가슴 한 켠을 베고 지나간 그런 느낌이랄까
매혹이라는 단어의 뜻을 난 그 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상처 난 가슴을
천민이라고 해도 그녀, 엄연한 남의 부인이요
나에게도 부인이 있고
기방에서 눈 맞아 데려온 소정이도 있는데
부질없는 욕망이요
잊어야 할 꿈이더라
떨쳐도 떨쳐도 다시 와 붙는 욕망이요
잊어도 잊어도 살아나는 꿈이더라
사서삼경에서 이르는 신독의 예를
무슨 주문처럼 외워도 나 그만
군자의 도리를 놓치고 욕망의 노예가 되었던가
자꾸만 공사를 놓치고
시름이 깊어가면서 몸도 시름시름이라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마음을 토로했던가
귀 밝고 눈 밝은 형방이
(형방의 모친이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내가 급전을 주어 좋은 약재를 구하게 해주었는데)
그녀에게 다리를 놓아주려 애썼는데
워낙 은밀하고 은밀해야 할 일이라
도무지 한 치의 진척도 없었던 터
형방의 충성심이 그 도를 넘고 말았던가
아니 내 간절함이 그 도를 넘고 말았던가
형방은 재인의 재주를 부추켜
폭포를 둘러싼 절벽 양쪽에다 밧줄을 묶고
그 위를 건너게 했던 것이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 누구도 그 전말을 정확히는 모르는데
혹자는 형방이 몰래 그 밧줄을 끊었다고 하고
혹자는 재인이 자신의 재주를 과신하여
현란한 재주를 보이다가 그만 떨어졌다고 하는데
내가 내 코를 꿸 수는 없는 노릇
단순사고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천우신조의 기회가 왔으니
이제 때만 기다리면 되는 법
천한 신분에 뭐 그리 대단한 절개가 있겠는가
서방마저 떠난 지금 호구지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순순히 나의 부름에 응했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그 자태는
호롱불에 비친 그녀의 그 모습은
한 줄기 서늘한 바람으로 내 가슴을 베고 간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어
내 마음은 거친 바다처럼 출렁이면서도
있어야 할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그런 심정이었어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내 술잔에 술을 따를 때
그리고 내 곁으로 다가와 앉을 때
이상한 말이지만 내 가슴의 상처는 점점 커지면서
또 점점 아물어 갔지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삶의 모든 의미가 거기에 있음을 보았어
그리고 그녀가 내 코를 있는 힘껏 물어뜯어
내 코가 반 이상이나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갈 때
이 또한 이상한 말이지만
난 비로소 그녀와 한 몸이 된 느낌이었어
나 이제 떨어져 나간 코를 하고
비록 조선팔도를 유리걸식하는 신세가 되었건만
경서에 이르듯 시위를 떠난 화살은 누구도 멈출 수 없으니
바람도 없는데
벚꽃잎이 눈처럼 하얗게 떨어져 내리던 날
먼 산에는 아지랑이 피던 춘삼월의 그 날
그녀가 한 줄기 서늘한 바람으로
내 가슴 한 켠을 베고 간 것을
난 후회하지 않아,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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