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산 등산기: 5월 11일 금요일]
이번 한 주일은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다시 한 주일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등산을 떠나는 것이 필요할 뿐더러, 내 몸도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신경을 쓰면서 [문학의 이론 Theory of Literature]을 읽었기 때문인지 목 뒷부분이 많이 뻐근했다. 허리도 별로 좋지 못했다. 운동을 게을리 한 탓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상 부근에도 가보지 못한 지난 주의 낭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등산 지도를 구입하러 “두레 문고”로 향했다. 사만 오천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222 산행기]와 [한국 100 명산] 두 권을 구입했다. 두 권 다 등산 지도가 꽤 상세하게 나와 있어서 등산에 많은 도움이 될 듯했다. 특히 [한국 100 명산]은 바인더 제본이라 산행 시에 한 장 씩 빼서 가지고 갈 수 있게 되어 있어서 편리함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명성산이었다.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덕릉 고개를 넘어 47번 국도를 타고 달렸다. 덕릉 고개를 다 넘고, 수락산과 그 뒷산의 신록이 점점 짙어가는 걸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환희로 가득 찼다. 사람의 진리의 한 편린을 잡은 듯한 느낌이었다.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고, 무슨 일이 나에게 닥쳐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마음.
교통량이 많아서, 차의 흐름이 느린가 했으나, 주 원인은 군대 작전 차량들 때문이었다. 전방에서는 어디를 가나 군인이었다. 일동을 좀 지난 다음 좌회전하여 339번 지방 도로를 타고 산정 호수로 향했다. 예전에는 이쪽 도로로 올 때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쪽 도로로도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산정 호수에 놀러온 것도 아닌데 입장료를 내야 한다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그 보다는 등산 출발을 어디서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더니, 근무자가 “주차료는 받지 않고 입장료만 받겠다”고 해서 그냥 산정 호수로 들어섰다.
호수가 눈에 들어오고 상가가 있는 곳에 커다랗게 [등산 안내도]가 있었다. 그 외 표식은 없어서 좀 헛갈리기는 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그곳이 비선폭포와 등룡폭포가 있는 계곡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틀림없는 듯 했다. 오랜 가뭄 때문에 계곡에 물은 거의 마르다시피 했고, 또 이상하게도 물 빛깔이 우유를 풀어놓은 듯 탁했다. 가까운 곳에 산행을 갔다가 내려오는 지 나이 드신 분들이 꽤 눈에 많이 띄었다.
얼마를 걸어갔을까? 잿빛 산토끼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참 오랜만에 보는 야생 동물이었다. 무론 지난 번 “학 저수지” 옆의 야산에서 노루를 보긴 했지만. 사진으로 담아 두려고 사진기를 꺼내는 사이에, 잠시 나를 보던 토끼는 몸을 돌려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자, 명성산 건너편의 산이 위용을 드러내었다. 신록의 그 푸르른 빛깔이 내 눈을 싱그럽게 하는 듯 했다.
등룡폭포는 수량이 많으면 꽤 볼만한 폭포일 듯 했다. 아래에서는 상단 폭포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등산로를 따라 올라오다 보니까 상단 폭포도 높이가 꽤 높았다. 바위가 구십 도가 아니라서 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형국이었으나, 수량이 많을 때는 또 어떤 모습을 보일지. 등룡폭포 위로 곧바로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었으나, 그곳을 내려오는 분들이 상당히 가파르다고 해서, 돌아가더라도 평이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명성산의 오른쪽은 군작전용 부지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능선에서 올라서 보니까, 포격 훈련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 산은 반나마 깎여 나가버린 상태였다.
산을 돌아서 올라가자 억새와 낮은 풀들이 자라는 초지가 나왔다. 명성산은 산의 이쪽과 반대쪽, 그러니까 북쪽이 대조적이었다(내려오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북쪽은 바위산인데다가, 숲이 울창했는데, 이쪽 면은 이상하게도 초원지대였다. 어쩌면 전쟁이나 포격의 흔적이 아닌지.
능선에 다 다다랐을 무렵,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정상까지 가는 길입니까?
그런데요.
그럼 같이 가시지요.
이렇게 해서 이 사람과 나는 명성산 등산을 같이 하게 되었다.
이 분은 이름이 이주성으로, 오십 오세인데, 작년에 명예 퇴직을 하고, 등산에 취미를 붙여서 늘 등산을 다닌다고 했다. 이 날도 산악회 멤버들과 주왕산을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차를 놓치는 바람에 명성산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등산을 시작하기 전에는 몸무게가 94킬로까지 나갔는데, 지금은 78킬로로 뺐다는 이야기도 했다.
“살을 빼고 나니까 얼마나 좋은 지 모르겠어요.”
능선을 타고 걸어가는 길은 거의 산책을 하는 수준이었다. 안내도에서는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코스가 대여섯 시간으로 보고 있었지만, 순전히 산행에 걸리는 시간은 그 정도가 안 될 듯 했다.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기는 했지만 큰 재미는 없는 산행이었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산행을 하는 사람도 우리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앞 초원지대에 빨간 옷을 입을 여자가 보이다가 금시 사라졌다.
정상도 다른 봉우리에 비해서 특히 높다거나 하지 않아서(그리고 원래 출발 지점의 해발이 높아서 체감 높이는 표고인 923미터에 훨씬 못 미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별 흥이 없었다. 두 시간 여만에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서는 철원 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궁예가 태봉의 도읍으로 삼은 곳. 그 당시에도 겨울에는 추위가 극심했을 터인데. (내려오는 길에 후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동행한 아저씨는 원래 산안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예상보다 빨리 정상에 도달해서 그런지, 내가 제시한 강포쪽으로 가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정상에서부터는 내가 갖고 있는 지도와 실지 등산로가 맞지가 않아서, 우리는 계획과는 달리 “궁예 계곡”을 타고 내려오게 되었다. 올라올 때와는 달리 내려오는 길은 돌투성이에다, 숲도 상당히 깊었다. 등산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인지, 길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나는 한 번 길을 놓치기까지 했다.
반나마 내려왔을까? 동행한 아저씨가 오렌지며, 떡이며, 빵이며 먹을 것을 내놓았다. 속이 안 좋아서 점심을 걸렀던 나는 아저씨가 내놓은 것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아저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이야기도 듣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었다. 결혼도, 직장도,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낙엽이 많이 쌓인 곳에서 갑자기 아저씨가 내 쪽으로 쓰러지듯 달려오며 뱀을 보았다고 했다. 뱀에 대한 공포를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뱀은 정말 무서워서 말이죠.
저도 뱀이라면 딱 질색이에요.
전날 텔레비전에서 본 땅꾼들의 이야기. 보신 문화도 문화이다. 뱀탕 집이 많이 사라졌다.
가물어서 계곡의 물이 거의 말랐는데, 물이 좀 있는 곳에 이르자, 무당 개구리?가 떼를 지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가 모여있는 광경은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등산은 끝이 났다.
그런데, 지난 주에 이어 이번에도 군인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포진지를 구축하는지 군인들이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었고, 좀 더 내려가자 신병들이 훈련을 받는 모습도 보였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던 길에, 훈련병이 두어 명 길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또 한 명은 못 걷겠다고 했는지 얼차려를 받고 있었다. 쓰러진 훈련병을 일으켜 세운 조교가 훈령병의 총과 군장까지 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조교를 보게 되었다. (내가 조교를 보는 각도는 훈련병의 그것이었는데, 이번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교를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예전처럼 무섭거나 부조리하기만 한 조교가 아니라, 똑같이 힘겨운 입장에 처한 사람으로 보게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산에서 내려오자, 동행한 아저씨는 목소리가 커지는 듯 했다. 그는 아주머니들에게도 이야기를 걸고, 대대장인 중령에게도 이야기를 걸었다. 상대적으로 나의 목소리는 위축 되었다.
계곡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탁족을 했다. 등산모를 벗은 그의 머리가 대머리인 것이 참 우스꽝스러웠다.
군대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 월남까지 갔다 왔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자식들 이야기도.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버스를 타고, 나는 내 차를 타고 동송으로 가야했다.
*동송에서의 일:
토교 저수지가에 앉아서 약간은 멍한 상태에서 저수지의 아름다움과 잔잔함을 감상하고 있었다. 시는 떠오르지 않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 두어 사람이 산 그늘에서 낚시인지 뭔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간 캔 맥주를 마시고 계속해서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군인이 세 명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훈련을 하는가 했다.
아저씨, 지금 뭐 하십니까?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아저씨, 여기로 올라오십시오.
나는 못둑 아랫부분에 있었고, 군인들은 못둑 위에 있었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더니, 소령이 나를 기다리다가,
낚시대는? 하고 물었다.
이 아저씨는 그냥 있었습니다.
나는 “왜 그러냐?” 이의를 제기했다.
못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못이 아름다워서 못을 보고 있었다. (떫냐?)
여기는 민통선 지역이라서 허가 없이는 못 들어오는 것 아십니까?
못 들어오게 막지도 않는데, 내가 못 들어오는 곳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내가 군인들의 제지를 뚫고 들어왔다면 위법이겠지요. 하지만, 그냥 도로를 달려와서, 못이 크고 좋아서 그걸 보는데, 그것가지고 뭐라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 도로 북쪽은 민통선인데, 이곳 지역 농민들이 농로를 여러 개 내 놓았어요. 우리가 그것까지는 통제를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군이 국민들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주민들의 편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시고 가세요.
나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그곳을 떠나왔다.
앞으로는 이 저수지에 올 수 없으리라.
(01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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