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치악산 등반기 (010519)

by 길철현 2020. 6. 28.

--

전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와서 영민이 백일도 할 겸, 여름옷도 한 벌 살 겸, 집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 대구로 내려갈 차비를 꾸렸다. 양복과, 읽을 책과, 그 밖에 속옷가지 등등. 그리고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 차 있는 쓰레기도 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버리고, 재활용 할 것은 따로 분리하고 분주히 서둘렀다. 꽤 일찍 일어나서, 모든 일을 끝내고 난 뒤에도 시간은 930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차 세차와 지난 번에 잃어 버린 소형 음성 녹음용 녹음기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하이마트]에 가면 혹 있지 않을까 해서 [하이마트] 창동 지점을 전화로 걸어 위치와 개점 시간을 확인했다. 열 시.

시간이 좀 남아서 나는 일단 세차를 맡기려고 세차장을 찾아보았으나 창동역 주변에는 눈에 띄는 데가 없었다. 이리저리 차를 몰다가 시간이 열 시를 넘어서 일단 [하이마트]로 갔다. 그런데, 내가 찾는 녹음기는 아예 없었다. [이마트] 전자부에 음성 녹음용 녹음기가 있는 걸 봐 두었기 때문에 그걸 구입할까하고 [이마트로] 차를 돌렸다.

나는 등산용 조끼를 하나 구입할까 하고 보다가 직원이 밑에 있는 것은 꺼내지 말라고 간섭을 하는 바람에 그냥 놓아 버렸다. 그리고 전자부에 가서 [올림푸스]에서 나온 녹음기를 흘깃 보았으나,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운 상가에 나가서 다시 [소니]를 구입하는 것이 나을 듯 했다. 차를 몰고 나가다가, 차를 가지고 가봐야 더 시간이 걸리니까, 지하철을 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돈인데, 굳이 [소니]를 구입해야 하는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소니]와 좀 친숙해 졌기 때문이지, 성능면에서 [올림푸스]가 뒤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시 [이마트]에 차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나는 등산용 조끼를 구입했다. 들락날락 하면서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는 것이 미안했던 것인가? 어쨌거나 이제 진짜 등산가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판매 여직원에게 부탁해서 진열장 안에 있는 [올림푸스] 녹음기를 꺼내 살펴보았으나, 사용 설명서도 없는 데다가, 일단 너무 가볍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다음 생산지가 중국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격은 왜 십오만 팔천 원이나 하는 것인지? 두고두고 써야할 건데, 구입하고 후회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세운 상가로 향했다. 소니 대리점에서 직접 구입할까 하다가, 지난 번에 구입한 곳이 역시 마음이 편할 듯해서,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곳으로 가서 일사천리로 구입을 하고 다시 창동으로 왔다. 출발 시각은 열두 시 이십일 분.

구리 요금소에서 차가 많이 밀렸다. 요금을 정산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그런 듯 했다. 올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 구리 요금소에서 차가 많이 밀렸는데.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묘안이 있다면 좋을 듯 했다.

중부 고속도로에서 다시 영동 고속도로로. 은영이를 태우고 정선에 갈 때가 생각이 났다. 그 아름다웠던 하루. 그게 벌써 작년의 일이라니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벌써 오개 월이나 전의 일이라니. 시간은 정말 얼마나 빠른가? 그리고 지난 삼월 십오 일에는 이 길로 해서 제천에 갔었지. 물론 그 때도 또 정선엘 갔었다. 달콤한 쓰라림.

여주 휴게소에서 서둘러 늦은 점심을 먹고, 산행에서 마실 음료수도 약간 구입을 했다.

입산 금지는 아닐지.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지. 많은 것이 미지수였다.

녹음기에서는 은영이가 나에게 준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수록된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테입을 무던히도 많이 들었다. 쟝발장이 죽는 부분에 나오는 노래. 은영이는 코제트의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 가사 중, “To love someone is to see the face of god"라는 부분을 나에게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서해 대교를 보러 갈 때였지. 내가 내 자신을 잘 모르듯이, 은영이도 은영이 자신을 잘 모른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는 것은 자기 감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리라. 상대방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실패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은가? 삶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걸 신에게 맡기는 것도 아닐 터인데. 사랑하고, 미워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사람을 구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갈 따름인가? 몸버둥, 발버둥치면서 살아갈 따름인가?

원주를 지나서, 새말 인터체인지에서 국도로 빠져 나왔다. 거기서 막바로 치악산 구룡사 지구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95년 겨울이었던가, 아니면 96년 초였던가? (이 때의 일은 일기장에 적어두지 않아서 내 머리 속에 밖에 없다) 그 때 이 차를 몰고 구룡사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의 기억으로는 도로 표지판에 [치악산]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요번에는 새말이라는 표지판 밑에 [치악사 구룡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 때 구룡사로 이어지는 이 42번 국도에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두 사건 다 구룡사에 갔다가 돌아나올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초보 운전 상태였는데, 초보 특유의 무모함으로 앞에 가는 트럭을 추월하다가, 마주 오는 차와 부딪힐 뻔했다. 마주 오던 차가 내 차를 미리 발견하고, 경고 상향등을 켜면서 속도를 늦추었기 때문에 충돌을 면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 경고 상향등을 켜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게 상당히 신기했었다. 그 다음에는 지방도가 42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 부근에서의 일인데, 빙판길에 차가 미끄러져서 밖에 있던 사람들을 얼마나 놀라게 했던지. 나는 차가 미끄러지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고(빙판길에 차가 미끄러지면 어떻게 되나 하는 걸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역시 또 나의 무모함), 그래서 속도를 잔뜩 늦춘 상태였던 데다가, 다른 차도 없어서 그렇게까지 긴장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밖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내 차가 쭉 미끄러져 내리자 모두들 화들짝 놀란 눈동자로 내 차를 보고 있었다.

이 때의 기억을 생각나는 데로 좀 더 적어보기로 하자. 등산로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아이젠을 하나 구입했다. 산에는 눈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오후 한 시가 넘었기 때문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은 구룡사에서 조금 더 올라간 입산 통제소까지였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두 시가 조금 넘지 않았나 한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와서 산밑에서 빌빌 거리다가 그냥 돌아가야 한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나의 주특기는 이런 금기를 깨는 것이었다. 돌아나오다가 약초 재배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등산로를 찾아보았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우회 작전을 썼다. 입산 통제소 근처에서 산으로 올라가서 입산 통제소를 지나서 다시 등산로로 내려오는 작전이었는데, 그것이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나는 거의 한 시간 가량을 허비했다. 길 없는 곳을 나뭇가지를 헤치며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그날 나는 세렴 폭포까지 갔었다. (이 모든 것이 요번 등산으로 다시 또렷하게 상기된 것이었지만.) 세렴 폭포는 얼어붙어서 폭포인지 아닌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 갔을 때에는 가뭄으로 수량이 너무 줄어들어서 폭포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치악산에는 큰 폭포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세렴 폭포에 도착하고 나니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어서, 등산은 거기에서 끝났다. 사실 치악산의 등산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4월초에도 치악산 구룡사 지역에 왔었다. 괜찮은 장급 여관을 발견하지 못해서 다시 차를 돌리고 말았지만. 밤중에 원주에서 막 차를 달려서 왔더니만 치악산 구룡사 지구였다. 나는 상원사나 다른 곳에 가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구룡사 쪽이었다.

이번이 그러니까, 구룡사와 나와는 세 번째 인연이었다. 정상인 비로봉(1288m)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주차비를 사천 원이나 치뤘지만, 등산로 입구에는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거리에 있는 제2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이 때 시각이 세 시 경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온다는 것이 불가능할 지라도, 적어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좀 평탄한 등산로로는 들어서야 할 듯 했다. 산행 지도에 적힌 대로라면 다섯 시간은 잡아야 할 코스였다. 그렇다면 여덟 시가 되어야 내려올 수 있다는 말인데.

멋진 카우보이 모자를 쓴 매표원 아가씨가 세렴 폭포까지밖에 못 올라갑니다하고 못을 박았다. 나는 알았어요라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내 속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상까지 올라갈 것이다였다. 사정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한 시 이후에는 정상 등반을 금한다는 것이었다. 등산로를 개방해 둔 것은 좋았지만, (다른 곳은 대체로 산불 때문에 등산 자체를 금지하고 있었다) 등반 사고를 우려해서 한 시 이후의 등반을 금하고 있었다. 군대 있을 때, 우리와 막사를 같이 쓰던 516치과 사람들과 치악산 단풍을 같이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나는 사정상 가지 못했다. 그 때였는지, 아니면 그 당시 치악산 등반을 이야기하면서 나온 이야기였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험하다는 것이었다. 엉금엉금 기면서 내려왔다는 이야기. 등산에 상당히 자신감이 붙은 나로서는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반쯤만 믿게 되었다.

계곡은 가뭄 때문에 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구룡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며, 굴참나무, 졸참나무들이 있어서,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자꾸만 달려드는 각다귀들이 성가시기는 했지만. 하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어떻게 입산 통제를 피해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세렴 폭포에 도착하기 전에 오른쪽을 빠지는 등산로가 있으면 그곳으로 빠질 생각이었으나, 지도에 나와 있는 등산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세렴 폭포 주변에는 등산로가 많이 있어서 무슨 수가 있을 것도 같았다. 입산 통제소를 지키고 있는 아저씨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처럼 거기서부터 통제를 안 한다는 것이 일차 관문은 통과한 느낌이었다.

구룡사 바로 옆에 있는 구룡소와 구룡폭포는 수량이 많을 때라면 아름다운 경치겠지만, 이 날은 그저 그랬다. 구룡소에는 백 원짜리와 십 원짜리 동전이 많이 깔려 있어서 기만 원은 될 듯 했다.

세렴폭포까지의 등산로는 거의 산책로 수준이었다. 세렴폭포 바로 아래에 도착한 시각이 세 시 사십 분 경이었다. 등산로로 이어지는 다리 앞에는 예의 한 시 이후에는 등산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놓여져 있었고, 파란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꼭 감시원인 것만 같아서 일단 조심을 했다. 다리 밑 계곡에서 얼굴을 씻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도 일단 그들에 합류하여 눈치를 살폈다. 파란 모자를 쓴 젊은 남자는 감시원이 아니라 등산객인 듯 곧 자리를 떴다. 감시원은 없는 듯 했다. 그렇다면 올라가도 될 듯 했다. 언제나 규칙을 어겨야 한다는 것이 께름직하지만, 우리 나라의 규칙은 성인 남녀의 정상적인 판단을 전혀 믿지 않는 듯했다. 규칙을 따르다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아직까지 내가 규칙을 어김으로써 불이익을 당한 경우는 없으니까, 입산 금지 규정이라든가 하는 것은 하나의 경고라고 생각을 하면 되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세렴폭포 밑의 다리를 건너자, 정상으로 올라가는 두 개의 등산로가 나왔다. 하나는 사다리병창이라고 명명된 코스였고, 그 옆의 것은 계곡 등산로였다. 거리는 사다리병창코스가 2.7킬로미터, ‘계곡 등산로2.8킬로미터, 시간상으로도 사다리병창코스가 더 빨랐다.

사다리병창코스는 처음부터 계단이더니만, 정상까지 거의 계단이 아니면, 바위 위를 지나야 했다. 흙길을 밟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다. 날씨가 좋은 요즈음에야 그렇게 험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겨울에는 상당히 조심을 해야할 코스였다. 험하다기 보다는 정말로 숨을 채가는 정말 가파른 코스였다. 체력 훈련을 위한 코스로는 그만이었다. 간간이 내려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원주의 미군 부대에서 등산을 나온 미군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하이라든가, “헬로정도의 가벼운 인사. 미군들은 대부분 애인하고 같이 왔는데, 이 날 산에서 만난 미군들은 백 프로 백인이었다. 내 앞에 젊은 남자가 한 명 올라가는 것이 보였는데, 나중에 그를 따라 잡았다.

머리가 짧은 것이 방위 같아 보였는데, 서울 녹번동에서 왔다고 했다.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어디로 내려갈 거냐고 했더니만, “상원사 쪽으로 갈까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요라고 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야 할텐데.” 나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운동화를 신고 온 걸로 봐서는 전문 등산가는 아닌 듯 했다. 그리고 나에게 따라 잡힌 걸로 봐서 그다지 산행에 익숙하지도 않은 듯 했다. 무모한 점만이 나를 닮은 듯 했다. 젊은애라서 그런지 별로 말이 앞서서 내가 이것저것을 물어봐야 했다.

비로봉에서 한 9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진짜 고바위가 나왔다. 철제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했다. 나는 젊은애가 있는 데서 힘든 기색을 보이기가 싫어서 숨이 차는 것을 참으며 정상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군말 없이 나를 따라오던 젊은애는 그러나 결국 뒤쳐지고 말았다. 기다려 줄까 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그럴 필요는 없을 듯 했다.

정상 부근에서는 젊은 남녀를 만났다. 남자가 여자에게 힘을 북돋우며 힘겹게 한 걸음씩 옮기고. 이들을 좀 지나자 또 다른 남녀 한 쌍을 만나고, 또 남자 두 명인가를 만났는데, 모두 일행인 듯 했다. 정상 바로 앞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걸음을 헤아리며 전진해 갔다. 그러다가 비로봉은 생각보다는 쉽사리, 물론 올라가는 과정은 상당히 힘겨웠지만, 내 발아래 있게 되었다.

 

큰 산은 그 주변에 항상 많은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가파른 김에 아무것도 없이 허덕허덕 거리며 올라왔다. 사람들은 무슨 기원이 그리도 많아, 이 정상에 돌탑을, 커다란 돌탑을 세 개나 쌓아 놓았을까? 가뭄이 길 긴 하지만 초여름의 신록은 정말 푸르다. 비가 한 번 뿌리고 나면 정말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를 건데. 황사 때문인가, 공해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날이 흐려서인가? 시계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바람이 꽤 많이 분다. 현재 시각 다섯 시 이십 육분. 세 시 육 분(실지로는 두 시 오십육 분)에 출발을 했으니까, 상당히 빨리 올라온 셈이다.

 

비로봉 정상에서의 느낌을 녹음한 것을 옮겨 보았다. (펩시 500밀리리터 한 병, 생수 500밀리리터 한 병, 이렇게 음료수를 준비했었는데, 정상에 도착하자 다 떨어졌다.) 비로봉의 특이한 점은 그 높은 꼭대기에 사람들이 상당히 큰 돌탑을 세 개나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 중간에 있는 돌탑. 미완성인 돌탑에다 꽤 큰 돌을 하나 꽂았다. 그러면서 무엇을 기원해야 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무엇을 기원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 같은 생각이 들어서 기원할 것이 없지 않은가 했다. 세상이 최상의 상태에 있어서 기원을 할 게 없다는 말이 아니라, 기원을 한다 하더라도 들어줄 목소리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아니라, 또 거기다 기원을 하기 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만 같았다. 나에 대해서도 뭔가를 기원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원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 논리성 너머에 있는 우리의 삶. (그럼에도 오늘 이 글이 그런대로 잘 나아가는 것은, 어제의 기원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여섯 명인가 같이 놀러온 젊은애드의 사진을 찍어 주고, 또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도 하고, 나는 하산을 서둘렀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최소한 세렴폭포 밑에 까지는 도착해야 별 탈이 없을 듯 했다. 녹번동에서 온 젊은애는 이때 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은 계곡 등산로를 택했다.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다른 길을 내려가는 것이 나을 듯 해서였다. 계곡길은 사다리병창길보다는 덜 가팔랐으나, 큼직큼직한 돌투성이의 산길이었다. 그래도 이 코스를 선택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걷기가 사다리병창보다는 훨씬 나았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세렴폭포 밑 다리까지 내려왔다.

다리를 건너려는 데 나이 지긋한 세 분이 구룡폭포가 어디라요라고 사투리로 물어 왔다. “이미 지나 왔는데요. 구룡폭포는 구룡소 있는데 있는데.” 세렴폭포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으나, 나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상태였다. 여기까지 온 김에 세렴폭포를 안 보고 갈 순 없어서, 세렴폭포 쪽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다리 있는 곳에서 채 백 미터도 안 되는 곳이었다. 앞에서 쓴 대로 나는 실망만 하고, 그 세 분에게도 볼 것이 없다라고 잘라 말해 주었다.

산길을 걸어 내려와 매점에서 캔맥주를 하나 마셨다. 등산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의 맛은 과연 일품이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미군이 보여서 말을 걸어 볼까 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의 애인이 옆에 있었다. 상당히 서두른, 그리고 힘겨운 등산이었으나, 기분은 상쾌한 치악산 산행이었다.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백산 철쭉제(010602)  (0) 2020.06.28
금수산 등반, 그 외(010526-27)  (0) 2020.06.28
명성산 등산기  (0) 2020.06.28
강촌 나들이  (0) 2020.06.26
비슬산을 탐하다  (0) 202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