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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소백산 철쭉제(010602)

by 길철현 2020. 6. 28.

<소백산 철쭉제>

 

[녹음한 부분]

*61944분 저녁 소백산 철쭉을 보러 출발한다.

*비가 약간 뿌렸고, 조흥 은행에서 현금 서비스 10만원을 받아서 가고 있다.

*한국은 21로 멕시코를 가까스로 이겼다. 경기 종료 바로 얼마 전에 유상철이 헤딩슛을 성공 시켰다. 그 전에 첫 골은 황선홍. 황선홍의 골과 유상철의 골은 모두 헤딩슛이었다.

*축구 시합을 보면서 얼핏 든 생각은 축구라든지 모든 시합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반면에, 전쟁은 시간과 공간, 어떤 규칙도 적용을 받지 않는 게임이라는 생각을 얼핏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그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물론 전쟁이라는 것은, 사실은 다르게 생각을 해보면 꼭 필요한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종족 보존, 특히 나의 보존을 최우선시 하는, 그런 동물적 본능의 결과이긴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볼 때 게임의 측면도 있다는 것,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이상하게 허둥되고 행동이 차분하지 못하다.

*또 왜 이렇게 차는 많은가? 빨리 서울을 벗어나고 싶다.

*Sister Golden Hair

* "를 들으면서, 인간의 비애를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엄마의 슬픔과, 소희의 슬픔과, 나의 슬픔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의 슬픔과,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삶은 두 가지 요소가 다 있다. 다 보잘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닐 지도 모르고, 결국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지만, 그렇지만, 헤엄쳐 나가야 한다. 나중에 이 부분의 생각을 좀 더 진척시켜 보자.

*그렇게 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안개가 끼여있다. 안개가 찌여 있다. 서해대교에서 들은 바를 빌어서 하자면.

*1226분에 단양에 도착했다.

*철쭉제로 포장 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사람들도 꽤 보인다.

*영주 방면으로 완행 시간표는 남아 있지 않다.

*915분에 첫차가 있고, 구인사 방면으로는 시간마다 한 대씩 있다. 540620730

*우리의 놀이 문화는 얼마다 단순하고, 천박하고, 거기다 얼마나 싸구려인가? 변함이 없고, 특색이 없다.

*원래 840분인 차가 36분에 출발을 한다.

*희방사쪽도 그 사이에 많이 개발이 되어서, 주차장도 생기고, 희방사로 가는 육교도 생겼다.

*현재 시각 920.

*희방사로 올라가는 이 길은 포장까지 깨끗이 2차선으로 포장까지 잘 되어 있다. 몇 시간을 걸어야 할까? 7시간 정도.

*오늘 날씨가 대단히 무더울 것이라고 하던데.

*산으로 들어서자, 그늘이 시원하고, 적긴 하지만 계곡 물소리도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철쭉은 어떤 모습으로 피어 나를 반길까? 아무 생각도 말고 그냥 걸어라.

*희방 폭포는 갈수기에 물이 이 정도 떨어져 내리는 걸로 봐서, 홍수가 나거나, 장마시에는 엄청난 위력으로 떨어져 내릴 듯 하다. 그러나, 직벽이 아니어서 폭포로서의 맛은 좀 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국립 공원이고, 철쭉제 기간이라서 그런지, 이른 아침부터 등산에 나선 사람들이 많다. 희방사까지는 무난한 편이다.

*치악산, 박사장한테 한 번 물어봐라. 죽을 뻔 안 했나! 애 먼니라. 경상도 북부의 사투리, 이모와 이모부 네의 사투리. 깔딱 고개를 넘어서 오르막을 좀 더 지나자 그 많던 사람들이 안 보인다. 그리고 나는 또 혼자가 되었다. 왁자지껄함.

*봉우리에 오르자 풍기 쪽과 중앙 고속도로가 보인다. 그 옆에 잘 안 보이는 길이 5번 국도가 아닌가? 전체가 뿌옇다. 맑은 날은 없는가?

*처음으로 떨어진 철쭉꽃을 보았다. 눈에 띄지 않는다.

*철쭉 군락지는 얼마나 가야 하는가?

*연화봉에, 실지로는 첨성대 정상에 1112분에 도착했다.

*말만 비로봉 비로봉, 하던 그 아저씨는 말이 많은 분이다. 젊은 남녀 둘이 오붓하게 산행을 못하게, 물고 늘어질 건 뭐냐.

*한국 멕시코 중계를 하던 아나운서가 방귀를 자주 뀌면 똥이 나온다는 표현은 좀 부적절하지 않았나 한다.

*좀 더 큰 규모의 명성산 등성이를 걷는 기분이다.

*천문대 정상에서 비로봉까지는 사실은 초원 지대라고 해야 할 듯하다.

*너무나 손을 많이 대어서 인공적이다. 걷기는 편하지만, 산길을 걷는 맛은 덜하다.

*소변이 마려운데, 몸을 가리고, 볼일을 볼 만한 데가 없다.

*이쪽은 철쭉이 보기 좋게 피어있다. 소백산의 정상은 초원지대이다.

*너무나 시원스럽다. 그러나 주목 군락을 보호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쳐놓은 것은 안타깝다.

*바람이 풀을 몰아가면서, 꼭대기 방향으로 밀어올리는 것이 아름답다. 꼭 은빛 등을 내다보이는 듯하다.

*비로봉 도착 시간은 1217. 세 시간 걸렸다.

*정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유명한 곳에는 사람이 많이 몰린다. 특히 소백산처럼 등산하기가 쉬운 곳은.

*날씨가 맑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역시나 국망봉쪽으로 가는 사람은 없다. 이제는 거의 혼자 걷는 등산이 될 듯하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철쭉이 온 산을 뒤덮을 듯이 확 피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능선을 따라, 쭉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피어있다.

*풀숲에 숨어서 스르르 스르르 쓰르르 우는 저 풀벌레는 무엇인가?

*수돗물은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되었으며, 쓰레기도 쓰레기 봉투를 사서 버려야 하는 형편이다.

*원만이 아저씨에 대해서 시를 쓰자.

*이제 배낭이 많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프랑크 햄 소시지와 빵을 먹고,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몸이 나른하다. 다독여서 걸어가야겠지.

*배가 부르니까 역시 걷는 것이 힘이 많이 든다.

*탈색된 철쭉.

*그러고 보니까 소백산은 기암이 드물다. 저 위에 보이는 데가 국망봉인가?

*여기까지도 그래도 사람이 꽤 있다. 국망봉 도착 시간 142. 아 이제 힘들다. 네 시간을 넘었다.

*산행을 하면서 긴장이 풀리는 듯하다. 정신적인 불안감과 그런 것이 피곤함 속에 풀려나가는 그런 느낌이다. 거대한 남근을 연상시키는 바위가 있는 봉우리가 상원봉인가?

*지금 이 길이 형제봉과 마당치로 빠지는 길이라고 만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산행에, 이 길이 틀릴 지도 모른다는 상황 때문에, 산행에 조금 스릴이 넘치기 시작했다.

*안내 표지판에 신선봉 표지를 안 해놓은 것이 좀 께름직하기는 하다.

*방향으로봐서는 이쪽이 북쪽으로 가는 길이 맞다.

*찬찬히 생각을 해봤을 때, 신선봉으로 가는 길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감 있게 몰아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그 두 사람은 한 시간 정도는 허비할 것 같다.

*이쪽으로는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풀이 길을 곧 덮을 듯하다.

*신선봉을 지난 시각은 244.

*구인사까지는 7킬로가 남았다. 앞으로 두 시간 반 정도는 걸어야 하는데, 다섯 시는 넘어야지 도착할 것 같다.

*왼쪽 새끼 발가락이 대단히 아프다. 발가락 끝이 아픈 것이 예전에 양을 긁을 때, 그 때 손끝이 계속 양을 잡아 당겨서 아프다는 것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등산을 하는 것은 산의 비경을 보러 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짐승으로 돌아가서, 그 시대에 걷던 그대로, 자연 속을 마음껏 활보하는 것이다.

*산나물인지를 등에 가득 지고 내려가는 할머니 두 분을 만났다. 뒤에 걷던 할머니는 내가 다가가자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전화가 울리다 말고 끊어져 버린다. 전화가 올 때마다 은영이 전화가 아닐까 하는 기대에 찬다. 어리석은 기대. 이 기대를 확실히 떨궈버릴 수 있어야 한다. 거짓말이다. 얼마나 달콤한 기대냐, 어리석은, 달콤한, 헛된, 찬란한.

*진짜 끊임없는 내리막이다. 아 진짜 이정표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딴 데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발가락이 너무 아프다.

*숲 사이로 웬 길이 보인다.

*산길은 다 벗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차도 다닐 수 있는 길이니까.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할까? 거리는 나와있지 않지만, 뭐 이삼십 분이면 되리라. 오래 걸으면 발가락이 이렇게 아프다는 것은 지난 번 지리산 등산 때부터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통증이 심할 줄은 몰랐다. 물론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또 나는 은영이가 나에게 전화 해 주기를. 사랑해 주기를 아직도 바라고 있구나. 누구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참 좋은 일이다. 그 길이 왜 나에게는 막혀 있는 것일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것일까? 못 만났을 수도 있다. 아직. 좋은 사람을. 틀에 맞추어서 보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많이 슬프고 비극적인 것도 사실이지만, 웃음과 즐거움도 많이 있다. 물론 나의 기질상, 슬픔과 비극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슬픔과 비극의 막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혜안을 가진다면, 좀 더 현명하게 이 삶을 대처하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아니 찾아내었다고 본다. 어려운, 어려운 문제이다.

*등산로가 끝나는 곳에서 초로의 할머니들이 나에게 식사를 권하고 있었다.

*저 아래도 포장 도로가 보인다. 지방 도로인 듯 한데. 구인사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구인사 2.4킬로 남은 지점에서 시각은 네 시 반. 밧데리는 다 되었다. (휴대폰)

*소백산에서 유일하게 험준한 바위산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 봉우리만.

*마지막에 고개를 만나서 나는 학을 거린다. 나는 할머니 말을 안 믿으려고 그랬다. 이 길이 구인사로 가는 길이라는.

*천태종에 대한 반감은, 성철 스님에 대한 글을 읽고 난 다음, 읽고 났기 때문이리라.

*구인사의 이 큰 법당은, 대웅전인지, 중국의 사찰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고, 색깔도 중국풍이다. 사천왕 석상 크게 지은 것도 눈에 띄고. 안에는 부처님 상이 아니라, 천태종의 종정인지 누군지의 상이 있다.

*박상월 종정은 누구인가?

*더 많은 법당을 지으려는지, 공사가 한창이다.

*위에 있던 건물은 조사전이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공사 소리

*산길을 따라서 진짜로 많은 건물들을, 많은 법당들을 지어 놓았다. 그렇지만 왠일인지, 정이 가지 않는다. 유서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대가 넘는 패러글라이더가 동시에 내려오는 광경은 장관이다. 나로서는 처음보는 그런 광경이다.

*해가 지기 전에 금월봉을 볼 수 있게 될 지 궁금하다.

*군대 있을 때, 이 충주에서 단양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타고 그 경관에 감탄 했었는데, 그 뒤로 그 경치를 다시 찾을 길이 없어서 대단히 안타까워 했는데, 오늘 옛날의 그 경치를 다시 보게 된다. 정말로 기암괴석들이 설악산에 버금가는 경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코딱지를 떼서 세게 달리는 차창 밖으로 날려보내는 것. 가장 기분 좋은 일.

*5월달 OB 모임에 이어, 6월달 OB 모임도 무산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7월달에는 래프팅이든 뭐든 좀 기획을 해서 참가 동기를 유발시키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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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헤로도토스의 [역사 History]를 집어들었으나, 이상하게도 산행을 떠난다는 흥분이(계속 해 온 주말 산행 중의 하나임에도) 나를 사로잡아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산행 지도]로 밟아본 등산 코스가 나를 들뜨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대구에 있는 중학교 동창 효준이와 영주쯤에서 만나서 같이 올라가기로 했지만, 며칠 전에 못 가겠다는 연락이 와서 이번에도 혼자 하는 산행이었다. 청량리역에 전화를 걸어보니까, 단양으로 가는 중앙선은 좌석이 모두 매진이라고 했다. 동서울 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단양으로 가는 차를 알아보았는데, 이미 막차까지 떠난 시각이었다. 원래는 토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떠날 예정이었는데, 소백산 종주 코스를 택한다면 산행에 걸리는 시간이 최소한 일곱 시간은 넘을 듯 해서(휴식 시간이나 식사 시간 이런 것을 넣지 않고 순수하게 산행에 걸리는 시간만) 아침에 갔다가 저녁 때 돌아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계획을 변경했던 것이다. 차를 몰고 가는 것은 경비도 부담이 되고, 또 거기다 출발했던 곳으로 내려와야 하는 결점과, 또 지친 몸을 이끌고 운전을 해야한다는 점 때문에 두고 가려고 했으나, 이 시각에 출발을 하려면 차를 가지고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양에다 차를 두고, 시외 버스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책을 덮고 컨페더레이션컵 한국과 멕시코 전을 보았다. 며칠 전 대 프랑스 전과는 달리, 이번 시합에서는 한국의 기량이 멕시코보다 앞서는 듯 했다. 하지만, 골 결정력이 부족했다. 골문 앞으로 공은 자주 갔지만, 거기서 결정적인 마무리가 잘 되지 않았다. 후반 10분 경에 황선홍이 멋진 헤딩골을 성공시켰을 때에 아나운서가 방귀를 자주 뀌면 똥이 나온다는 표현을 써서 나를 웃기기도 했지만, 호주가 프랑스를 이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골을 넣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멕시코의 프리킥이 골대를 맞는 듯 마는 듯 하면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는 역시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 날의 승운은 우리에게 있었다. 경기 종료 직전에 유상철이 황선홍의 골과 비슷한 멋진 헤딩슛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오른손을 권투할 때 어퍼컷을 치듯이 내뻗는 포즈가 인상적이었다(우즈가 흔히 취하는 제스처이긴 하지만). 21로 한국의 승리. 멕시코의 최정예 멤버가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요 몇 년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던 멕시코를 꺾었다는 것은 그래도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산행 준비는, 별로 준비할 것도 없었지만, 축구를 보기 전에 끝이 난 상태였으므로, 출발만 하면 되었다. 집앞 조흥 은행에서 10만원을 찾은 뒤 출발을 했다. 축구가 끝날 때쯤 천둥소리가 울리고 해서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는가 했으나, 비는 서울을 벗어날 때까지 오는 둥 마는 둥 하기만 했다. 3주 연속 같은 방향으로 떠나는 산행이었다. 내부순환로, 구리판교간 외곽도로,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그리고, 지난 주에 이어서 이번 주도 남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는 그런 코스였다. 10시가 넘었는데도, 차가 많았고, 웬일인지 마음이 불안했다. 사이드 미러는 빗방울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고라도 날 것만 같은 느낌. 그러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아마도 축구 시합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이 때 떠오른 듯 했다. 무슨 생각이냐 하면, 운동 경기는 시간과 공간과 규칙의 제약 아래에서 행해지지만, 전쟁은 그런 제약에서 벗어나서 승패를 가리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훨씬 더 재미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 아쉽게도 전쟁은 우리에게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 파편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흥분하는가? [역사]를 읽어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전쟁사]에 다름 아니라는 것. 인간이 전쟁을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일차적으로 자기 종족 보존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류에 내재해 있는 공격 본능을 충족시키려는 측면도 도외시할 수는 없으리라. 지든 이기든 개인의 생명이 극도로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 그러한 상황이 주는 불안과, 초조함과, 스릴과, 분노와, 그 밖의 온갖 감정들.

구리 요금소는 밤이라 그런지 지난 번과는 달리 무사히 통과했다. 이어서 중부고속도로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여주 휴게소에서 음료수와 먹을 것을 사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 이 주유소는 이상하게도 카드를 사용할 때 손님의 사인을 받지 않았다. 제천으로 가는 중앙고속도로는 한적하리만치 조용했다. 안개가 옅게 깔린 도로를 나는 지나친 과속을 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달려나갔다. 비틀즈 [넘버 1] 테이프를 듣고 싶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아메리카 베스트를 들으면서 가고 있었는데, 를 듣는 순간 울음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볼륨을 높이고, 바락바락 고함을 질렀다. 삶은 지긋지긋해. 인간의 비애. 어느 부분 때문이었을까? “Can't live without you. Can't you see it in my eyes"라는 통속적인 부분? 엄마의 슬픔, 소희의 슬픔, 나의 슬픔. 조용히 입 다물 줄 알아야 하는데. 조용히 입 다물고 이 모든 것을 차분히 기록해 나갈 줄 알아야 하는데. 산다는 것의 심연을, 초월하고 싶지만 초월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 (이 노래는 전체적인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Sister Golden Hair surprise"라는 부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가사를 읽어보니까, 한 남자의 외로움을 토로한 것인데, “Sister Golden Hair"는 그리움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펜팔의 대상이었다. 이 노래가 나를 울렸던 것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부분이 다가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6/4)서제천 톨게이트를 지나서 지난 주에 달렸던 5번 국도를 신나게 달렸다. 제천에서 자고 아침에 단양에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빈 방이 없을 정도로 단양이 붐비지는 않을 듯 했다. 곳곳에 과속 감시용 카메라가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서 달려야 했다. 왜 제한 속도 내에서 달리지 못하는 것일까? 왜 항상 사고의 위험을 안고 달리는 것일까?

단양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쳐서 다시 되돌아와야만 했다. 도담 삼봉 옆의 지방 도로를 들어서서 얼마를 달렸을까 단양에 도착했다. 이 때 시각은 1226. 집에서 출발해서 세 시간이 채 안 걸린 셈이었다. 일단 차를 시외 버스 터미널에 세우고, 희방사 방면과 구인사 방면의 차들을 알아보았다. 영주 행 첫차는 915분으로 보았으나,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영주까지 가는 시내 버스도 있을 뿐만 아니라, 직행도 840분부터 있었다. 우려한 것과는 달리 교통 편은 편리한 편이었다. 구인사로 가는 차도 많이 있었다.

늦은 시각인데도 포장 마차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사람들도 꽤 많이 보였다. 축제의 한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호수 산장]이라는 여관에 묶으려고 했다가 아무래도 시끄러울 듯 해서, 차를 몰고 좀 더 도로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마음이 계속해서 왠지 모르게 초조했다. 그래서 좁은 골목에서 후진을 하다가 뒤에서 카트를 몰고 오던 할머니인가를 칠 뻔했다. 젊은 남녀만 보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후진을 했던 것인데, 그 앞에 할머니가 카트를 몰고 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트가 차에 부딪히는 바람에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고, 다행히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큰일 날 뻔한 일이었다.

축제가 열리고 있는 강변 도로 곁에는 새로 생긴 여관이 많이 있었는데, 나는 그 중 하나, 물침대 완비라고 써놓은 성수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의 여관 선택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자기 전에 맥주나 한 잔하고, 또 내일 산에서 먹을 것도 사둘 겸해서 밖으로 나왔다. 축제라고는 했지만, 거리의 풍경은 일반 유원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농구공 던져 넣기, 사격, 야구공으로 깡통 쓰러트리기, 다트, 동전 던져서 금에 안 물리면 거기에 적힌 금액만큼 가져가는 돈 놓고 돈 먹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무런 특색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거기다 먹자와 마시자판. 저급한 놀이 문화. 하지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내 옆에 있던 흰 런닝만 걸친 사람이, 도로 공사가 있을 때 자주 쓰는 원뿔형의 플라스틱 붉은 표지봉?으로 그 옆에 있는 야윈 사람의 등을 쳤다. 맞은 사람은 달아나고, 때린 사람은 감히 누굴 가지고 놀려라고 중얼거리면서, 그 사람을 좇았다. 나는 그 사람이 갑자기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와 [헬 레이더스]라는 삼류 공포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옆 방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남녀였다. 욕실문이 크게 한 번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나고, 두 사람은 한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만, 이윽고 섹스가 시작되었다. 여자의 교성이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생오디오에 자극을 받아 딸딸이를 쳤다. 나의 딸딸이가 끝나고 나서도 두 사람의 교접은 한참이나 더 지속되었고 여자의 교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방에도 사람들이 들어와 한국과 멕시코의 축구 중계 재방송을 큰 소리로 듣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면 이쯤에서 자야 했지만, 잠이 그다지 오지 않고, 또 양옆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잠이 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헬 레이더스]를 다시 틀었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살인. 용의자는 대학 교수. 눈을 감고 돌아누워서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들으면서, 잠을 청했다. 비몽사몽간에 전화벨이 울려서 받았더니,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다시 [헬 레이더스]를 좀 더 보다가 어떻게 어떻게 잠이 들었다. 원래는 휴대폰의 알람을 여덟 시 반에 맞춰 놓았으나, 너무 늦게 잠이 들어서(세 시쯤이 아니었든가 하는데), 나는 알람을 해지해 버렸다. 하지만 아침 일찍부터 지나가는 차 소리며, 결정적으로 헬기 소리 같은 굉장히 큰 소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계를 보니 79분이었다. 머리가 무겁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거기다 꿈에서는 주백이가 내 시를 보고서 쓸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혹평을 한 것이 기분이 영 찜찜했다.

다시 잠을 청하거나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잠이 좀 부족하더라도 이대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세수를 하면서 나는 수건도 갖다 놓지 않은 여관 주인이 다시 한 번 짜증이 났다. 어젯밤에도 수건이 없어서 애를 먹었는데. (주인을 부르려다가 너무 늦은 시각인 듯해서 그리고 휴지로 대충 닦으면 될 듯해서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지를 입으면서 보니까, 원래 약간 찢어져 있던 오른쪽 엉덩이 아래 부분이 훨씬 더 찢어져서 그냥 입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시각에 문을 연 옷가게도 없을 것이고, 이래저래 짜증나는 일이 겹치고 있었다. 산행을 나선 것이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차로 가서 트렁크를 뒤져보니까, 예전에 입다가 그냥 벗어둔 청색 기지 바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임시 변통으로 그거라도 입어야 할 듯 했다.

 

첫 차는 840분이었다. 식사를 하고(다른 사람들이 올갱이 해장국을 먹는데, 나 혼자만 산채 비빔밥을 시켜서, 또 그것도 뭔가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들었다.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은 나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에서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라는 위기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차에 올랐다. (6/5)다음 차가 곧바로 있어서인지 운전수는 836분에 출발했다. 나야 나쁠 것이 없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약속을 지키는 것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중간한 시간이라서 그런지 승객은 열 명이 채 안 되었다. 커다란 배낭을 가진 아저씨가 있어서 그도 소백산을 가는 것은 아닌가 했으나, 나의 짐작은 빗나갔다. 할머니 한 분이 운전사에게 희방사에 서느냐? 안 서면 돈을 더 줄테니, 세워 주이소라고 하자, 운전사가 돈 더 준다고 안 서는 데 세워 주는 줄 아소. 돈 많으면 영주까지 끊지라고 핀잔을 주었다. 나는 할머니가 내릴 때 같이 내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 차가 희방사에 서지 않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앞에 가는 커다란 트럭 때문에, 버스는 거북이 걸음을 하며 죽령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5번 국도의 옆에서는 중앙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었고,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죽령 터널 공사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산은 푸르기 그지 없었으나, 계곡은 물 한 방울 없이 말라 있었고, 도로 옆에 있는 나무들은 먼지를 뿌옇게 덮어쓰고, 비가 뿌려주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이 죽령은 몇 번이나 넘었건만 언제나 생각보다 커브가 많고 길었다. 이번에도 희방사에 다 온 듯해서 버스 앞쪽으로 나와 있었는데, 버스는 한참을 더 달린 다음에야 겨우 희방사에 도착했다. 우려와는 달리 버스는 희방사에 섰고, 좌석에 다리를 올리고 웅크린 채 자던 할머니도 깨어나서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못 본 사이에 희방사는 엄청나게 개발이 되어 있었다. 대형 주차장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도로에는 육교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다 희방사로 올라가는 곳은 2차선으로 잘 포장이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는 끊임없이 도로를 새로 내고, 보수를 하고 있다는 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매표소의 아가씨들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상냥하게 나를 맞이했다. 희방사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이 때 시각은 930. 이제 본격적인 산행이었다. 날씨가 무덥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차도 옆의 등산로로 들어서자 나무 그늘이 시원했고, 계곡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도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희방사로 가는 할머니 두 분이 차도를 따라가지 않고, 등산로로 왔다가, 힘이 많이 들었는지, 그 중 한 분이 아이구 죽겠대이라고 했다. 내 앞에 철제 계단을 올라가던 한 분은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두 발을 모으고, 잠시 쉰 다음 다음 계단으로 올라갔다. 허리가 많이 구부러진 할머니. 머지 않아 나도 그 할머니들처럼 되리라. 누구도 늙음과 죽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리니.

희방사 바로 아래 있는 희방폭포는 조선시대 서거정인가가 극찬을 한 곳이라고 했는데, 이 가뭄에도 물이 꽤 떨어져 내리는 걸로 봐서, 홍수가 나거나, 장마시에는 엄청난 위력일 듯 했다. 그러나, 직벽이 아니어서 폭포로서의 맛은 좀 떨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높이 약 20미터 정도의 이 폭포는 주변 경관이라든지 그런 것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폭포 옆의 철제 난간을 타고 가파른 곳을 올라서 조금 더 가자 희방사였다. 희방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절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중건한 것은 최근인지 절로 별로 유서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문화재도 별반 없는 듯 했다.

희방사까지 무난하던 산길은 거기서부터 한 삼십 분간 상당히 가파른 고개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름도 깔딱 고개였다. 국립 공원이고, 철쭉제 기간이라서 그런지, 아침부터 등산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이 고개만 해도 백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단체로, 친구들과, 연인들끼리, 부부끼리 오르고 있었고, 모두 한 마디씩 거들고 있었다.

비로봉요, 내가 마 연화봉 옆에다 옮겨 났다 아닙니까?”

치악산, 박사장한테 한 번 물어봐라. 죽을 뻔 안 했나! 애 먼니라.”

서울말도 많이 들렸지만, 경상도 북부의 사투리, 청송에 사는 이모 네의 사투리가 특히 많이 들려서, 그래도 인근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깔딱 고개를 넘어서 오르막을 좀 더 지나자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부터는 다소 완만한 오르막이라 한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철쭉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지도에 천문대 정상이라고 적힌 봉우리에 도착한 시각은 1112. 왼편 아래쪽에는 돔 지붕을 몇 개 얹은 천문대의 건물이 보였고, 그 너머에는 중계탑인지가 커다랗게 보였다. 그리고 풍기와 중앙고속도로도 눈에 들어 왔다. 천문대 정상에 오르기 얼마 전에 어디선가 목탁 소리가 들려와서 근처에 암자라도 있는가 했는데, 스님이 앉아서 목탁을 두들기며 탁발을 하고 있었다. 턱수염을 길게 기른 풍채가 아주 좋은 스님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도를 좀 닦은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사기꾼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시주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그와 다시 눈이 마주쳤는데, 나에게 뭔가 말을 하려는 듯 했다. 아니 내가 그에게 뭔가 할 말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도와는 달리 이 봉우리 정상에는 연화봉이라는 표지석이 커다랗게 서 있었다. 정상 둘레는 철쭉 군락지였으나, 날이 가물어서인지 꽃은 그다지 화사하게 피어있지 않았다. 뭔가 불이 확 붙는 듯한 그런 광경을 나는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채 피지도 못하고 말라버린 꽃이며, 또 활짝 핀 꽃들도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부족한 듯 했다. 하지만 철쭉들은 비로봉까지, 그리고 그 너머 국망봉까지 능선을 따라 아주 화려하지는 않을 지라도 화사하게 피어서 등산길을 밝혀주었다.

천문대 정상(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는 두 시간 거리였는데, 대체로 초원을 걷는 듯한 그런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천문대 정상에서 어떤 아저씨에게 사진을 찍어 주었는데, 나들이 차림으로 나온 이 아저씨는 나선 김에 비로봉까지 가야겠다고 했다. “말로만 비로봉, 비로봉하고 한 번도 못 갔는데를 연신 중얼거리며, 나와 젊은 남녀의 앞에 서서 걸었다. 이 아저씨는 꽤 잘 걸을 듯 했으나, 얼마 안 있어서 내 뒤로 쳐지더니만 보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소백산에는 단체 등산객과, 또 연인들끼리 온 등산객이 많이 눈에 띄였는데, 아무래도 등산로가 험하지 않고, 전망이 시원하기 때문인 듯 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명성산 능선의 초원길을 떠올렸다. 다만 워낙 많은 등산객들이 찾기 때문에 등산로가 확장되고, 등산로 주변이 황폐화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비로봉 주변은 진짜 초원 지대로 마음껏 뒹굴어 보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바람이 정상쪽으로 불어오자, 풀들이 은빛 등을 내보이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정상 아래에는 주목 군락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훼손을 해서 그랬는지 못 들어가게 울타리를 쳐놓았다. 비로봉 도착 시각은 1217. 세 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었다.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바람에 기회가 나지 않을 듯 했다. 정상 표지석만 찍고 나는 국망봉 쪽으로 향했다. 비로봉 주변의 풀밭에서는 단체 등산 온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비로봉을 지나자 등산객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시 좀 넘은 시각에 어제 저녁에 산 [프랭크 햄소시지]와 빵, 그리고, 캔 맥주로 점심을 대신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길가에 앉아서 그냥 먹었는데, 몇 사람인가가 식사를 하는 동안에 지나갔다. 맥주를 한 잔해서 그런지, 아니면 피가 위로 몰려서 그런지, 몸이 노곤하고 걷는 것이 힘이 들었다. 거기다 숨도 약간 차올랐다. 소백산은 전체적으로 바위가 참 드문 산인데, 국망봉의 바위는 의외라고 할 만큼 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국망봉에 도착한 시각은 142. 네 시간 넘게 산행을 한 셈인데, 보통 때 같으면 산행이 거의 끝날 시간인데, 이제 반을 좀 넘게 걸었다. 그다지 힘든 코스는 없을 듯했다.

산행이 주는 육체적 피로감이 정신적인 불안감 같은 것을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산에 와서 자연 가운데 호흡한다는 것이 많은 것을 잊게 해주고, 또 가볍게 여기게 해주는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산행은 산의 비경을 보러 오는 것이라기보다, 원시 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그 시대에 걷던 그대로, 자연 속을 마음껏 활보하는 데서 오는 쾌감을 즐기는 것이 더 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리산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 아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국망봉을 지나 상원봉쪽으로 갈 때인가, 나이드신 분이 혼자 왔느냐라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젊은 사람이 대단하다라고 했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대한 남근을 닮은 바위가 있는 <상원봉> 옆을 지나 <신선봉>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등산로도 좁아지고 등산객도 정말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갔을까? 반대편에서 두 사람이 오더니 어디로 가는 길이냐라고 했다. “구인사로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이 길은 형제봉과 마당치로 빠지는 길이라고 했다. 표지판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길을 잘못 접어들었을 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직접 가본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도상으로 보거나, 지금껏 걸어온 길을 볼 때 다른 길은 없는 듯 했으므로 나는 그냥 걸어나갔다. 표지판에는 실제로 신선봉으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약 이십 분 정도 더 걸어갔을까, 형제봉과 신선봉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큰 소리로 그 사람들을 불렀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신선봉을 지난 시각은 244. 구인사까지는 7킬로가 남은 거리였다. 앞으로도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은 걸어야 할 듯했다. 무성한 풀이 등산로를 덮을 듯한 길을 걸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신선봉을 지나고도 곧바로 내리막은 아니었다. 신선봉보다 백 미터는 더 높은 봉우리를 지나고 나서야 본격적인 하산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했다. 정말 이 날 몇 개의 봉우리를 넘었는지 모르겠다. 내리막길을 걸을 때는 등산화와의 접촉으로 발가락 끝이 상당히 아팠는데, 특히 새끼발가락이 심하게 아팠다. 이 때부터 산나물을 잔뜩 인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등산로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뒤에서 걷는 할머니 한 분은 내 발자국 소리에 깜짝 놀라셨다). 별다른 특색도 없는 그냥 숲이 무성한 산길을 끊임없이 내려와야 했다.

(어느 순간 전화벨이 울리다가 받으려고 호주머니에서 꺼내는 순간 끊어져 버렸다. 혹시라도 은영이가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를 떨칠 수가 없는 것을 보면,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빛도 그다지 들지 않는 끝없는 내리막을 걸어 내려왔다. 조금 남은 개울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토끼 한 마리가 부시럭 소리를 내면서 달아났고. 연이어, 참새들도 파다다 날아올랐다. 그리고 얼마를 더 내려갔을까? 발가락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데, 숲 사이로 넓은 길이 보였다. 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었다. 등산로와 그 넓은 길이 만나는 곳에서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다가 같이 와서 먹자라고 불렀다. 나는 많이 먹었다고 극구 사양을 했다. 실질적인 등산은 이쯤에서 끝이 난 셈이었다.

그러나, 구인사까지는 아직도 3킬로 가까이 남아 있었다. 다른 곳은 아무 이상이 없었으나, 발가락이 심하게 쑤셨다. 그래서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걷기도 하다가, 또 뒤로 걷기도 했다. 그렇게 콘크리트 포장을 해 놓은 도로를 따라 얼마를 걸어갔을까, 갈림길이 나왔는데, 이정표가 없었다. 나는 할머니 한 분에게 구인사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내 기대와는 달리 언덕쪽의 길로 가야한다고 했다(내려가는 길과, 언덕길 두 갈래가 있었는데). 나는 할머니의 말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 언덕을 하나 더 넘어야 한다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욕을 입에 가득 물고, 언덕을 넘자, 한국 천태종의 총 본산이라는 구인사가 눈에 들어왔다.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3층으로 신축한 큰 법당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조사전이었다. 이 조사전의 양옆에는 커다란 석조 사천왕이 서있었고, 건물 자체의 단청이라든지 색조가 우리 나라의 사찰보다는 중국의 그것을 연상시킬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문을 여고 들여다 본 법당 안에는 불상이 아니라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금동상이 놓여 있었다. 이 분이 상월원각 대조사님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절이 평지에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법당이 몇십 채인지도 모르게 여기저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성철 스님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조계종과 태고종의 반목을 보고는, 태고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편견이 이 천태종에게까지 미치는 듯, 구인사라는 절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건물이 많은 데도 또 건물을 짓는지 요란스럽게 공사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천태종이 상월원각이라는 분이 새롭게 창건한 불교의 한 종파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구인사 바로 아래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더 걸어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이 때 시각이 530. 540분에 단양으로 가는 직행 버스가 있었다.

구인사에서 단양으로 들어오는 지방 도로는 경치가 좋았다. 관광을 나온 중년의 아저씨들이 강가의 바위산들을 보면서 찬사를 연발했다. 하지만 진짜 진풍경은 단양에 들어왔을 때였다. 여러 대의 패러글라이더가 하늘을 수놓고 있는 광경은 진짜 장관이었다. 그리고, 금월봉을 보기 위해서, 36번 국도를 타고 달렸는데, 이 때 월악산의 광경은 내가 군대 있을 때 본 바로 그 절경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금월봉에 도착하기 위해서 나는 급하게 차를 몰았고, 또 중앙선을 넘어서서 차를 몇 대 추월했다. 금월봉은 역시나 자연의 작은 기적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막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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