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안이라는 지명은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그 동일한 기표가 지니는 다른 의미, 즉 길의 안이라는 뜻 때문에 항상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거기다 1988년에 나온 장정일의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의 표제시이기도 해서 궁금증은 배가되었다. 하지만 나는 늘상 길안을 지나면서도 길안 면소재지가 있는 곳은 찾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저번달에 임하호를 가다보니 내 눈앞에 길안면이 마법처럼 등장했고, 나는 잠시 짬을 내어 면 사무소를 비롯하여 중심가를 한 바퀴 돌았다.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다방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어느 수퍼 앞에서는 세 분이 낮술을 들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이 큰 목소리로 욕을 섞어가면서 뭔가 답답하고 억울한 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말미에 장정일의 시도 실어본다.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 장정일
길안*에 갔다.
길안은 시골이다.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왔다. 라고
나는 썼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서두를 새로 시작해야 했던가?
타자지를 새로 끼우고, 다시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은 아름다운 시골이다.
그런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왔다.
별이 뜬다.
이렇게 쓰고, 더 쓰기를
멈춘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나는 끼워진 종이를 빼어,
구겨버린다. 이놈의 시는
왜 이다지도 애를 먹인담. 나는
테크놀러지와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갈등을 추적해보고 싶다. 종이를 새로
끼우고, 다시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에서 택시를 기다린다.
길안에 택시가 오지 않는다.
모든 도시에서 나는 택시를 잡았었다.
그러나 길안에서 택시잡기 어렵다.
쓰기를 다시 멈춘다. 너무 딱딱하지
않은가? 모든 문장이, 다.
로 끝나는 것이 이상하게도 번역투의
냄새를 풍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런 지적을 많이 들었지 않은가?
쓰던 종이를 빼어 구기고, 한 장의 종이를
다시 끼웠다.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에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모든 도시에서 쉽게 택시를 잡았건만
길안에서 택시잡기 어렵고
어느새 어두워진 길목마다 별이 쏟아진다.
문득 길안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다시 쓰기를 멈추었다. 좀더
매끄럽게, 좀더 구체적인 풍경묘사로부터
서두를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길안의 시골 풍경을 묘사한 다음
택시가 서지 않는 곳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여행자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묘사해내야 한다.
나는 종이를 빼어 구기고, 새로운 종이를
끼워, 이렇게 쓴다.
길안에 산이 높고
그 물이 맑다. 길안에 나무가 푸르고
나뭇가지 위에 비둘기떼가 지어올린 흰구름은
마치 건축같이 아름답고 웅장하다.
멀리서 바라봄이 아니라 길안 가운데 있을 때
길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행자는 독일빵같이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길가에 내려 놓고, 택시를 기다린다.
이쯤에서 쓰기를 잠시 멈춘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시작으로서는 적당히
내 구미를 돋우는 것 같고, 독자로 하여금
계속 읽어 내려가게 할 만큼 경쾌하다.
이제 길안에 밤이 내려오며, 나는 이 여행자를
존재론적 자기인식에 이르게 할 작정이다. 나는 쓴다.
웬일인지 꽤 오랫동안 택시가 오지 않고
택시를 기다린 시간만큼. 저녁이 가까워왔다.
이름 모를 잎새들의 흔들림,
여행자는 자신이 혼자임을 느낀다.
이름 모를 새떼가 햇빛 한 조각씩을 물고
서쪽으로 지고, 연이어
모래단지를 엎지른 듯 이름 모를 별들이 흩어졌다.
사십년 간의 도시생활이 어린시절 시골에서 익힌
동식물과 별자리 이름을 깡그리 잊게 했다. 모두가
이름 모를 것들. 여행자는 갑자기
심한 부끄럼에 휩싸인다.
쓰기를 더 멈춘다. 여행자의 고독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사십 년 간의 도시생활이,
생경스레 튀어나온 것은 아닌가? 나는 출판사의 사장이자
시인인 한 선배로부터, 비약이 심하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구체적이지 않은 시는
내 자신이 질색이다. 지금껏 쓴 것을
빼어 버리고, 다시 종이를 끼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쓸 결심을 한다. 나는 쓴다.
고향에서 떠나 도시에서 사십년 간 살았던
한 오십대가 있어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고향에 온다. 길안…….
나는 한 숨을 쉰다. 종이를 홱
빼어 던진다. 이놈의 시가 나를 골탕먹이는군.
나는 테크놀러지 이용에 대한 이율배반의
모순성을 갈파하고자 한다. 즉 테크놀러지를 이용할
때의 편리성, 그로 인해 그것에 종속되어가는
현대인들을. 그리고 덧붙여, 테크놀러지에
노예화됨으로써 테크놀러지를 이용할 수 없는
자연적인 상황에 부딪쳤을 때 보이는 현대인의
초조한 반응을 묘사하고 싶었다. 어떻게 될까?
그런 상황 앞에서 비로소 테크놀러지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겠고, 도리어 테크놀러지화되지 않은
자연에 대해 신경질 부릴 수도 있겠지.
새로운 종이를 끼우고,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이 아름다워 나는 울었다.
길안에 어둠이 내렸다.
길안에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길안 바깥에서 나는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생각을 한다.
길안이 불편해진다.
길안이 내 모든 약속을 퍼지르고 앉았다.
길안이 불안하다.
연을 띄우고, 잠시 멈춘다. 이 어조로 쓰는 거야,
독하게 마음먹는다. 누가 뭐라건 말건
이런 생각을 한다. 우표를 모으는 우표수집가가
자신의 스토크 북 속에 우표를 수집해두는
일같이, 시 쓰기 또한 내 가슴 속에
시를 모아두는 일일 것! 새로운 시를 쓰고 싶은
열망은 우표수집가가 자신의 스토크 북 속에
없는 볼리비아산 나비 우표를 간직하고 싶어하는
그 열망 이상의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우표
수집가가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귀한 우표를 구해
간직했다 한들, 그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 않듯
시인이 아무리 좋은 시를 쓴들, 또한 세계는 변함
없는 것. 우표수집가와 시인 가운데 어느쪽이 더
위대한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우표수집가의
그, 성취의 기쁨을 위해 시를 써야 한다. 이렇게
밑도끝도없는 생각을 하곤, 나는 다시 타자기를
두드려갔다.
길안의 바깥에 있을 때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빼먹던 생각을 한다.
길안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
길안 벗어날 수단이 없구나.
길안이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길안의 산과 물이 역겨워 진다.
길안의 나무들이 유령같이 곤두섰다.
아아 상종 못할 자연
이해 못할 자연이다.
길안의 비문명이 공포스럽다.
연을 띄우고 잠시 쉬기로 한다. 여행자는 이미
충분히 불안해졌고, 그는 테크놀러지화되지 않은
길안의 자연상태에 대하여 추악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 이쯤에서
그가 가야 할 곳에 대한, 현대인의 회의를
끄집어내면서 이 시를 마무리하자. 나는 쓴다.
그러나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내가 가야 할 거기가 어딘가?
택시를 쉽게 잡기 위해
택시잡기 어려운 이곳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할
그곳은 어딘가?
과연, 길안을 떠나 다시 길안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길안에서 처음으로
길안 바깥이 불안으로 닥쳐온다.
나는, 너는, 모든 길들은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 있을 데가 없다.
다 썼다. 3연의 시.
나는 그것을 읽어본다. 엉망이구나.
한숨을 쉰다. 이렇게 어려운 시.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하며, 한평생
사는 것이 내 꿈이었다니! 나는
방금 쓴 3연의 시를 찢는다. 커피를 한
잔 끓여 마신다. 생각이 이어졌다. 유년시절에
계집애들이 하던 고무줄 놀이가 아닐까, 시 같은
것은. 점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 자꾸
고무줄 높이를 높이면서 고통을 즐기는 것,
고통을 즐기는 것! 이 밤 기어이,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쓰고야 말겠다. 나는 무섭도록 새하얀
종이를 끼운다. 다시 쓴다.
풀이 우거진 자리에
한 무전여행가가 검은 슈트케이스를 든 채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늬엿늬엿 해가 지고 있었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행가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쓰자 아침이 밝고, 나는 세수를 하러 일어선다.
하룻밤 꿈을 꾼 듯. 밤샘한 어제가
어릿하다. 더운물에 찬물을 알맞게
섞는다. 생각이 떠올랐다.
물과 물이 섞인 자리같이
꿈과 삶이 섞인 자리는, 표시도 없구나!
나는 계속,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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