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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좌충우돌 백령도(첫째 날 1)[20220228-0302](백령도 가기 전)

by 길철현 2022. 4. 16.

[백령도에 다녀온 지 벌써 한 달 반이 지났다. 사진 외에 따로 남겨둔 메모도 없고 해서 큰 인상들만 따라가 보려 한다. 허리 근육통으로 가고오는 길이 무척이나 힘이 들었으나 도착한 다음 날은 차를 렌트해서 허리가 아픈 대로 그래도 관광을 좀 즐겼다. 생각만큼 적을 것이 많지 않을 수도.]

 

왜 백령도일까? 2019년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찾게 된 울릉도에서 느꼈던 그 황홀감, 그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문득 어떤 여자분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초등학교 동창이 대령인가로 근무 중인 백령도로 연락을 해서 2박 3일 있다가 왔다고 이야기를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 분은 그 때 백령도가 다른 곳과는 차별되는 그런 곳이라는 취지로 말을 했던 듯하다. 그 분은 나와 잘 알던 분은 아니었고 지인의 지인인데 우연히 합석한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듯한다. 그 분이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고, 기혼자이면서 혼자 초등학교 동창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당당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돌한 구석이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백령도 행을 결심했을 당시에는 내 의식에서 가라앉아 버렸지만 예전에 인터넷에서 확인한 백령도의 큰 저수지, [백령호]도 저수지 덕후인 나를 그 섬으로 이끈 것 중의 하나였다. 물론 의식적으로는 백령도의 대표적인 명승지인 두무진이 나를 백령도로 향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거기다 현재 내 삶의 큰 낙이 전국을 두루두루 여행하는 것이므로 가기 쉽지 않은 백령도가 좋은 여행지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날씨와 내 허리의 근육통이었다.  

 

요가를 하면서 만성질환인 허리 근육통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몸에 대한 자만심을 몸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무너뜨려 버렸다. 1월 중순에 서울에 올라갔을 때 매일 탁구를 치고 술을 마시는 생활을 일 주일 가까이 했더니 몸에 무리가 갔고 급기야 대구로 돌아와 요가를 하다가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며칠 휴식을 취했더라면 쉽게 회복이 될 수도 있었으나 곧바로 병원에 들어가 어머니 간병을 해야 했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느라, 집에 있는 허리 보호대를 착용하긴 했지만, 아픈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요통은 좀 좋아지다가 다시 한 번 병원에 들어가면서 별로 좋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래도 난 동생과 교대를 한 다음 차를 몰고 익산을 거쳐 거의 비워두다시피 하고 있는 서울의 내 아파트로 향했다(2월 23일 익산에서 일박). 좋지 않던 내 허리는 다음날 책을 나르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대학원의 지도 교수님이 정년 퇴임을 하면서 지도학생들에게 연구실에 있는 책 중 필요한 것을 가져가도 좋다고 했는데, 학생들은 책 욕심도 없는지, 내가 정해진 기한의 마지막 날에 방문했음에도 책은 그대로 인듯했다. 원래 내 생각은, 비록 마치지는 못했지만 내 박사논문의 주제였던 조지프 콘래드와 관련된 책을 중심으로 열 댓 권만 가져오는 것이어서 쇼핑백 하나만 들고 갔는데, 책들을 모두 폐기처분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책 저책 마구 뽑다보니 이백여 권에 달했다. 이 책들을 3층에서 1층으로(교수님 연구실이 있는 건물은 구식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 다음 차가 교정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교문 밖까지 이백여 미터를 한 번에 열댓 권 씩 나르다 보니, 책을 옮기고 정리하는데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나였지만, 허리에 다시 한 번 과부하가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나를 때는 책 욕심에 허리가 아픈 것도 잘 몰랐다).

 

이 장면은 2016년 책방(책 보관 방)의 책을 정리하던 때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무턱대고 책을 사는 책 수집벽 때문에 내 좁은 아파트에 다 보관할 수가 없어서 근처 주택가에 전세로 책방을 얻었는데 그곳이 재개발되면서 책을 옮겨야 했다. 전세도 많이 오르고 책을 갖고 있는데서 오는 효용보다, 보관하는데 드는 비용이나 노력이 더 크다는 생각에 당시 그곳에 보관하던 7천여 권 중 3천 권 정도는 처분을 하고, 2천 권은 다시 내 아파트로 올리고, 나머지 2천 권 정도는 대구의 어머니 아파트로 옮겼다. 이후로 정돈된 서재를 갖겠다는 내 꿈은 깨어지고 말았으며, 이 때에도 책을 옮기다가 요통이 재발했다. 이 작업은 한 달 이상 걸렸는데 그 작업을 마치고 나는 영국으로 2주간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여행을 했다(이 때의 경험을 칠십 페이지 정도 적어 두었다. 기회가 될 때 정리를 하면 좋을 텐데, 그 시도는 번번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다음날 후배와 함께 보령으로 1박 2일 일정으로 여행을 갔는데 허리 통증으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서는 보령의 정형외과에 가서 진통제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약까지 처방을 받았다(진통제 주사는 반나절 정도는 통증을 상당히 완화시켜 주었다). 내 개인적 경험으로 볼 때 근육통이라는 것이 통증의 강도에 비해 의료적으로는 심각하게 취급되지 않는 듯하다. 요통은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에게는 감기처럼 흔한 병이라 한 번도 앓지 않은 사람은 보기 드물다. 나도 허리가 약해 20대부터 요통으로 간헐적으로 고생을 했는데,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인 30대 초쯤에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다가 갑자기 허리가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쓰러지다시피 바닥에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당시 내 느낌에는 몸에 큰 탈이 난 듯했다. 택시를 타고 가까스로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에 가 끙끙 대고 있자니 담당의사가 와서 단순 근육통이라고 했다. 그 다음 날 일어나서 보니 몸이 우측으로 쏠려있었다(나의 요통은 대체로 탁구를 무리하게 친 데서 기인했다). 이후로 나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요통으로 고생을 했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2년 전 요가를 시작하고는 요통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친 자신감이 화를 불러 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요통으로 고생하면서 나름대로 대처하는 노하우도 조금씩은 늘었다. 근육통이라는 것이 주로 근육이 뭉치고 몰린 데서 오는 현상이라 앉아 있을 때면 통증이 심하고(특히 운전) 걸으면 통증이 완화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백령도로 가겠다는 내 생각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요통보다도 섬으로의 여행은 날씨가 더 큰 변수였다. 태풍이 올 계절도 아니었고 폭풍우 소식도 없었으나 보령에서 올라온 다음 날은 강풍으로 인해 배가 뜨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기다려 볼 심산으로, 나는 청계천으로 나가 다가올 대선에 대한 글을 쓰다가 관심을 갖게 된 1987년 KAL기 실종(폭파) 사건과 관련된 서적을 구해보려 했다. 하지만 35년이나 지난 사건이라 책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한 권도 책을 구하지 못한 나는 발걸음을 이문동 [신고서점]으로 돌렸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그래도 이 서점에 관련 서적이 한 권 있어서 미리 주문을 해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고서점]은 재개발로 사라지고 없었다.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해보니 덕성여대 앞으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1990년 정도부터 이 서점을 이용했는데 내가 대구로 내려간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 이전한 [신고서점]은 [알라딘]을 제외하고는 헌책방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현재 상황(대구의 경우 그 많던 헌책방들이 전멸하고 말았다)에서 그래도 꿋꿋하게 나아가고 있는 헌책방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헌책 매니아인 나로서는 정말 흐뭇했다. 이날은 마침 현재 사장님인 아드님과, 원래 사장님, 사모님도 다 뵙고 오랜만에 인사도 드릴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원래 사장님의 연세가 여든이 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간이 참 많이 지났다는 걸 새삼 느꼈다). 지하1층에서 지상4층, 다세대 주택을 개조한 듯한 서점은 1층에는 커피숍이 있는 데다가, 옥상에서는 북한산을 조망할 수도 있어서 북카페로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뒤편에는 주차장까지 있었다(주차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에 차를 댔다가 7천 2백원의 주차료를 내야했다).

서점 옥상에서 바라본 북한산

요통도 한결 줄어든 듯하여 이날 오후의 나머지 시간들은 양주의 저수지들을 탐방했다. 특히 어둔리저수지(남방저수지)를 한 시간 정도에 걸쳐 한 바퀴 돈 것은 약간의 스릴을 동반한 즐거운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