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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by 길철현 2022. 5. 20.

바둑을 잘 두는 편은 아니지만 예전엔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바둑 프로그램을 보곤 했다. 해설을 맡은 유창혁 기사가 바둑판이 복잡해지자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는 걸 처음 듣고는, '저런 천재적인 기사가 자신의 전문 분야인 바둑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어떻게 보면 겸손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책임한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하고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말하는 걸 두 번 세 번 듣게 되자, 그 말이 어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복잡한 상황에 대한 유창혁 기사 특유의 말버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의 삶에 대해, 또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더 나아가 우리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확한 비전과 의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반대되거나 자신의 생각과 불일치하는 부분을 너무 쉽사리 무시하거나 아니면 빠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지울 수 없다. 물론 '기표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는 라캉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생각만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족하더라도 시간이 되면 시험을 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식은 언어(혹은 기호)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인간의 언어가 어떠한 믿을만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떻게 인간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확보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언어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고, 대단한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생각만으로도 벅차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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