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혹
이 성 복
햇빛이 푸른 잎새들과, 잎새들 위에 드리워진 다른
잎새들의 그림자와 뒹굴며 엎치락뒤치락 드잡이하다
가 서로 물고 빨고 킥킥거리다가 또 한동안은 무슨
화가 그리 났는지 잠잠하다가 고운 먼지 이는 흙길
위에 잠시 졸다가 또 미친 듯이 찧고 까불고 오만 춤
을 다 추더니, 저녁 무렵에 어두워지면서 가는 빗줄기
뿌린다 끝내 저 가는 빗줄기는 하루종일 잘 놀던 햇
빛의 맨살을 만져보지 못한 것이다
시집 [호랑사시나무의 기억](문학과 지성사) 중에서
<감상>
햇빛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근원일 뿐 아니라, 물 위에 나리는 햇빛을 가만히 바라 보노라면 어떤 황홀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잎사귀 위에 내리는 햇빛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느낌을 받는다. 이 시는 우리 주위에 편재해 있지만 늘상 있기 때문에 의식을 제대로 하지 않게 되는 햇빛을 의인화하여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햇빛은 잎새들과 드잡이하다가, 사랑하기도 하고, 잠잠하기도 하고, 또 길에 나가 잠시 졸기도 하고, 미친 듯이 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고는 저녁이 찾아오고 비가 뿌린다. 그 빗줄기는 햇빛을 만져보지 못한다. 햇빛의 이러한 모습에서 한 발짝 나아가 우리 삶의 모습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저녁을 죽음이나 그런 것으로 보는 것은 이 시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보는 것이겠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다가 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나뉘어져 결코 합치할 수 없는 삶과 죽음, 그런 것도 짚어 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시의 제목을 ‘유혹’이라고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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