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ublic>(국가*정체) 박종현 역주(서광사).
B. Jowett, Modern Lib.
[정리]
[국가]는 플라톤의 저작 중에서 분량면에서도 [법률]을 제외하고는 제일 길 뿐만 아니라, 중심 주제인 ‘올바른 상태(올바름)’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그 내용의 짜임새에 있어서도 단연 돋보이는 글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요약하자면 ‘올바른 상태’가 무엇인지를 좀 더 수월하게 추적해 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그 대상을 일개인에서 국가(정체)로 확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그런 글이다.
플라톤 철학의 출발은 지금까지 내가 읽은 그의 글로써 미루어 보건대, 인간이 ‘인식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의 이러한 태도는 사실상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영향이 크며, 또 그의 이러한 관점은 지식 혹은 인식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당대 소피스트나, 또 불확실한 인식을 아무런 반성 없이 믿고 살아가는 일반 대중의 태도에 대한 반박 내지는 반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절대적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플라톤의 이러한 기본적인 태도는 그대로 견지 되어, ‘올바른 상태란 과연 무엇인가’ 또 ‘올바른 인간이 과연 행복한가’라는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어지고 있다.
플라톤이 주장하고 있는 올바른 정치 체제는 간단히 말해서 귀족주의이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엘리트시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주장하고 있는 이 정치 체제는 실제성을 띤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뿌리를 내린, 그리고, 현재로서는 이상으로 추구하고 있는 민주주의와는 상반된다.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지만, 당시 아테네는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적인 사회였는데, 왜 플라톤은 당시의 체제를 부정하고, 우리가 보기에 계급적이고, 더 봉건적이라 할 수 있는 귀족주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일까? 플라톤은 이 책 <제8권>에서 그가 주장하고 있는 정체가 잘못될 경우에 나타나게 되는 나쁜 정체의 예를 명예지상 정체, 과두 정체, 민주 정체, 참주 정체의 순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그가 민주 정체의 약점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이 정체가 일반 대중의 무지로 인해 진리의 추구와는 관계없이 인기를 추구하고, 선동을 일삼는 상황에 놓이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플라톤이 귀족주의 혹은 최선자 정치를 주장하는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에 넣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기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여 사실상 스파르타의 반통치 아래에 놓였던 시기이며, 이로 인해 아테네의 정세가 극도로 혼미했던 때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것도 플라톤이 질서 있고 체계를 갖춘 정체를 모색한 배경이 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플라톤이 주장하고 있는 이상적인 정체는 인간 삶의 현실이라는 보다 큰 카테고리를, 인간 사고라는 좁은 카테고리로 감싸 안으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일반인이 그 자신의 무지로 인해 사사로운 의견을 확실한 인식으로 믿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플라톤 자신도 자신의 인식을 끝까지 말고 나가지 않음으로 인해서, 자승자박 격으로, 이러한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데, 그가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했다고 보는 부분이 현재로서는 오류이거나 미해결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의문으로 남겨 두었어야 할 부분에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식의 확실성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바람직해 보이는 전제에서 출발한 플라톤의 철학은 인식의 확실성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 위험과 오류를 보이는데,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하고 있는 ‘이상 국가’도 그와 마찬가지로 닫혀 진, 그래서 유연함을 잃은 국가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물론 플라톤의 사고를 현대적인 잣대로만 평가하려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영아 유기를 주장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그를 잔혹한 인간이라고 평하게 될 것이며, 또 그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부분이 그다지 혁명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을 것이다. 플라톤의 인식이 당시의 시대적인 한계 때문에 우리가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점은 사실이지만,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우리 현실의 문제점과 해결책도 동시에 어느 정도는 인식의 지평에 떠오르게 된다는 걸 그의 글을 통해 배우게 된다.
#플라톤의 생애와 철학
*이 이성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단순히 ‘의견’(판단: doxa)에 불과한 것을 ‘지식’(episteme)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런 용도로 이용되는 절차가 바로 ‘논박’(elenchos)이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의견’은 각자의 ‘감각적 지각’(aisthesis)에 근거한 것일 뿐이지만, ‘지식’은 ‘이성’(logos)의 능력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해서다. (26)
*“주어져 있는 걸 선용할지어다”(to paron eu poiein). 이건 헬라스인들의 잠언들 중의 하나다. 따지고 보면, 플라톤 철학은 바로 이 잠언의 실천을 위한 이론 체계라 말할 수도 있다. (33)
*우주 및 자연 속에는 지성(nous)[적인 것]과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작용하고 있어서 우주 및 자연이 ‘아름다운 질서 체계’(kosmos)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라의 다스림도 그 우주 질서에 맞도록 해야 하며, 인간도 그렇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에 따른’(kata physin) 삶이라 해서다.
*‘자기 술어화’가 이 ‘세번째 인간과 관련된 논쟁’과 연결되는 것은 형상과 사물을 같은 지평의 존재로 놓고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다. 이를테면 앞에서 든 예를 다시 들어 말하면, 큰 것들이 크듯, 큼의 형상, 즉 큼 자체도 크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개별자-보편자의 관계로 해서 결국 이것들을 포섭하는 또 다른 ‘큼’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큼 자체와 큰 것들, 침상 자체와 침상들, 북 자체와 북들은 각기 존재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쪽은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들’이지만, 다른 쪽은 ‘감각에 의해 지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세번째 인간과 관련된 논쟁’과 ‘자기 술어화’의 문제는 플라톤 철학의 기본 특성인 존재론에서 일탈한 논리적인 논의일 뿐이다. (37-8)
*존재를 하나로만 말할 경우에, 그래서 ‘각종 사물의 이데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철학적 대화가, 이른바 변증술적 논변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한 인식이, 진정한 의미의 실천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이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며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39)
*<국가> 해제
*어떤 형태로든 지성이 지배하고, 지성이 실현되어 있는 나라가 그의 꿈이었다. 요즘 말로 해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경영되는 나라가 그가 생각한 나라였다. (44)
<제1권>
*본격적인 지혜에 대한 사랑의 활동인 철학(philosophia)이 있기 이전의 헬라스인들에게 있어서는 시가(詩歌: mousike)가 그들의 교육 또는 교양의 전부인 셈이었다. 따라서 시가에 능하거나 밝은 (mousikos) 사람이 곧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있어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는 가히 경전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의 등장은 이런 지위를 누려온 시가에 대한 도전처럼 시인들에겐 느껴졌을 것이다. 철학과 시 사이의 불화는 여기서 발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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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좀 꼼꼼하게 읽어볼 양으로, 각 권을 읽고 정리를 하려 했는데, 정리는 이미 역서에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핵심 사항이나,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플라톤이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흔히 영어로 Justice, 우리말로는 정의라고 번역되나, 역자인 박종현은 올바른 상태(올바름)라고 보고 있고, 나로서도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 소크라테스의 입을 빈 플라톤의 논의는 어떤 부분에서는 공감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명석한 논의 전개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Rawls의 [Justice]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데, 얼핏 듣기로 롤스는 트라시마코스의 정의 ‘더 강한 자의 편익’에 가까운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하던데, 그 점은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와 “정의”라는 용어가 갖는 의미의 차이라는 면도 간과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제2권>
*플라톤은 자기 시대의 철학적 논의의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오히려 지나치게 철저하리만큼 일상 언어의 틀 속에서 대화편들을 썼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역주68,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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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에는 ‘가게스의 반지’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인용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에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끔 한다.
그리고, 신화에 대한 비판과 검열에서는 플라톤의 독재적 사고방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기도 하지만, 이 당시 신화와 신이 갖던 의미를 재조명해보게 한다. 플라톤의 신관(플라톤은 신이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신이 없는 세계를 상정하지는 않는 듯 하다)에는 신화에 나오는 인간적 신이, 절대자적인 신으로 변모하는 걸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 밖에 ‘시와 과학’을 분리시켜 보지 못하는 측면, 신에 대한 논의가 당시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등도 이 [권2]에서 엿볼 수 있다.
철학의 주제 중 ‘절대자’의 문제도 큰 비중을 지닌다. 시간/공간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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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존속을 위해 개개인의 삶을 분류하고 통제하며, 또 적합한 교육이나 생활 양식 등까지도 제시하고 있는 점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이 가지는 다양성과 복잡성, 개별성 등을 존중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존속 자체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그래서 개인의 생존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 둘 다를 강조하는 것은, 요즈음까지도 지 혹은 덕과 체 모두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삶에 대한 플라톤의 확실성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제4권>
*동일한 것이 동일한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것에 대해서 상반된 것들을 동시에 행하거나 겪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이. (293)
--모순율에 대한 플라톤의 이 언급은 소립자 세계에 있어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의 수행, 즉 참된 자기 자신 그리고 참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들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마치 영락없는 음계의 세 음정 즉 최저음과 최고음 그리고 중간음처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308)
*Temperance, I replied, is the ordering or controlling of certain pleasures and desires; this is curiously enough implied in the saying of 'a man being his own master'; and other traces of the same notion may be found in language. (144)
*Then we may fairly assume that they [the souls] are two, and that they differ from one another; the one with which a man reasons, we may call the rational principle of the soul, the other, with which he loves and hungers and thirsts and feels the flutterings of any other desire, may be termed the irrational or appetitive, the ally of sundry pleasures and satisfa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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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상을 설립해 나가는 가운데, ‘올바름’의 정의에 이르게 된다(308). 플라톤의 생각은 그 의도는 좋지만, 인간의 삶을,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너무나도 단순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신의 문제만 해도, 당시의 신들에 의구심을 던지지 않고 있으며(실제로 그가 보여주는 신의 상은 신화나, 호머에 나타난 신의 상에 비판을 가하고 있긴 하지만--이 당시만 해도, 문학에 있어서 허구의 부분과 실제의 부분이 미분화된 채 받아들여지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영혼의 문제에도 좀더 세심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당시로서는 플라톤의 생각이 하나의 극점이고, 또 최대한 나아간 사고였으리라. [어떻게 철학을 할 것인가]에서 지적한 대로, 철학의 문제는 몇 가지 큰 카테고리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몇 가지 중 1)시간 2)공간 3)절대자 4)정신 5)윤리 등을 우선적으로 손꼽아 볼 수 있다. 플라톤이 ‘올바름’이라는 용어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윤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논의의 한계는 그가 인간의 이성 및 감정 활동에 작용되는 인간의 의식 및 무의식적 활동을 너무나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리라(그렇긴 하지만, 인간의 혼(정신)을 헤아리는 부분과, 욕구적인 부분으로 나눈 것은 이후 사고의 한 출발점은 될 듯하다).
내 나름대로 어렴풋하게 생각되는 바가 있긴 하지만, 그 생각들이 구체성을 지니기에는 내 공부가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읽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제5권>
*반면에 열등한 부모의 자식들은, 그리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자식으로서 불구 상태로 태어난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듯,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숨겨 둘 걸세. (339)
*모든 배움을 선뜻 맛보려 하고 배우는 일에 반기며 접근하고 또한 만족해 할 줄 모르는 사람, 이 사람을 우리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369)
*The proper officers will take the offspring of the good parents to the pen or fold, and there they will deposit them with certain nurses who dwell in a separate quarter; but the offspring of the inferior, or of the better when they chance to be deformed, will be put away in some mysterious, unknown place, as they should be.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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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권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남녀평등 사상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지만, 그 반면에 영아 유기를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현대적 시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이고, 동시에 명백한 인간 차별이다. 플라톤의 사고의 전체적 흐름은 ‘국가’라는 틀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출발점에서(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안녕과 불가분이므로 중요한 것이다), <의심스러운 가정 몇 가지를 가지고>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고, 또 권력을 지닌 자가 과도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플라톤에게서도 역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감당할 수 없는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 오류가 엿보인다.
<제6권>
*이런 표현들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대중의 지적 수준에 대한 플라톤의 기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들에서 보듯, 대중이 철학을 이해하게 되기를 기대하기보다도 오히려 철학적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철학을 계속해서 하게 되는 데 대해 거의 절망적인 그의 심정을 읽게 된다. 그의 이런 현실 판단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우선 당시의 문맹률을 들 수 있겠다. 아테네의 아고라에 도편 추방을 결의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 중에는 자기가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도편에 적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으로는 책을 접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26d에 보면, 아낙사고라스의 책 한 권 값이 1드라크메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의 건장한 기능공의 하루 품값에 해당된다. 이집트에서 수입된 파피루스에 필사된 책이 그리 싸지도 않았겠지만, 또한 현실적 입신 출세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철학에 대한 관심을 대중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406, 역주, 플라톤의 말, ‘그렇다면 대중이 ‘지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이.‘)
*실재들에 자신의 생각을 진실되게 향하여 갖고 있는 이에게는 아마도 인간들의 일을 내려다볼 여가도, 그들과 다투느라 시기와 적대감으로 가득해질 여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일세. 오히려 그는 규칙적이고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있는 것들을 보며 관상하면서, 서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행하거나 당하는 일도 없이 모두가 질서 있고 이성에 따르는 그런 것들을 본받으며 최대한으로 닮느라 여념이 없을 걸세. (419)
*통치자들은, 즐거운 일들이나 괴로운 일들을 통한 시련을 겪고서도, 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판명되어야만 하며, 이 신념을 힘든 일들이나 두려운 일들 또는 다른 어떤 변화에 처해서도 내던지지 않는 사람들로 또한 판명되어야 한다고 했었네. 그럴 수 없는 사람은 배제되어야 하지만, 마치 불 속에서 시험을 거친 금처럼, 어떤 경우에도 더렵혀지지 않고 빠져나오는 이를 통치자로 옹립해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예와 상을 주어야만 된다고 했었네. (424)
*인식되는 것들의 ‘인식됨’이 가능하게 되는 것도 ‘좋음’[善]으로 인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을 갖게 되는 것도 그것에 의해서요, ‘좋음’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지위와 힘에 있어서 ‘존재’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나. (438-9)
<Book VI>
*For he, Adeimantus, whose mind is fixed upon true being, has surely no time to look down upon the affairs of earth, or to be filled with malice and envy, contending against men; his eye is ever directed towards things fixed and immutable, which he sees neither injuring nor injured by one another, but all in order moving according to reason; these he imitates, and to these he will, as far as he can, conform himself. Can a man help imitating that with which he holds reverential converse? (237)
*has the ear or voice need of any third or additional nature in order that the one may be able to hear and the other to be heard?
Nothing of the sort. (247, 소리가 전달되기 위해서도 공기나 기타 중개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른 데에서 나온 오류. 매질?)
*What a wonder of beauty that must be, he said which is the author of science and truth, and yet surpass them in beauty; for you surely cannot mean to say that pleasure is the good? (249)
*reason answering to the highest, understanding to the second, faith (or conviction) to the third, and perception of shadows to the last.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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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갈등은 현실과 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전 사이의 괴리감, 또 더 나은 세상을 실현시킬 실제적인 능력의 부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비전을 개진함으로써, 이후의 세대에게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 셈이다. 플라톤의 오류는 시대의 한계이지만, 어떤 부분은 자신의 의견을 인식이라고 생각한, 스스로의 논리에 비출 때에, 자기 스스로 속박되고 마는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이데아론’ 혹은 ‘형상 이론’은 러셀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인류를 잘못된 방향을 이끈 잘못된 이론이다.
인식되는 것들의 ‘인식됨’이 가능하게 되는 것도 ‘좋음’[善]으로 인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을 갖게 되는 것도 그것에 의해서요, ‘좋음’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지위와 힘에 있어서 ‘존재’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나.
아직은 이해가 부족해서 뭐라고 쉽사리 말할 수 없으나, ‘좋음’(선)에 대한 위와 같은 글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현실의 문제들과 싸워 나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많은 문제들 혹은 의문점들에 대한 해답을, 혹은 해답에 가까운 것을 얻었고, 또 그 해답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그 해결 과정들을 알아보는 것, 그러한 몸짓 가운데, 삶은 풍성해 진다.
<제7권>
*자유인은 어떤 교과도 굴종에 의하여 배워서는 아니 되기 때문일세. 신체적인 노고는 강제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 신체를 조금도 더 나쁘게 만들지 않지만, 그 어떤 강제적인 배움도 혼(마음)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테니까. (494)
[Book VII]
*But, whether true or false, my opinion is that in the world of knowledge the idea of good appears last of all, and is seen only with an effort; and, when seen, is also inferred to be the universal author of all things beautiful and right, parent of light and of the lord of light in this visible world, and the immediate source of reason and truth in the intellectual; and that this is the power upon which he who would act rationally either in public or private must have his eye fixed. (257)
*in my opinion, that knowledge only which is of being and of the unseen can make the soul look upwards, and whether a man gapes at the heavens or blinks on the ground, seeking to learn some particular of sense, I would deny that he can learn, for nothing of that sort is matter of science.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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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는 ‘가게스의 반지’와 함께 흥미로운 것이긴 하지만, 플라톤이 간과한 것 중 하나는, 동굴의 거주인 혹은 죄수 자신들이다. 그 자신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제인 것이다. 그들이 보는 대상은 그림자이지만, 그들 자신은 실제라는 사실이 갖는 중요성이 간과되어 있다. 플라톤 철학의 이해는 그의 ‘이데아론(형상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함께, 출발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일단은 부정하고 싶은 부분이 많다. 그의 견해는, 관찰이나 경험 따위의 현실 세계에 대한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관념론자로 비판당하고 있을 것이다.
철인 통치자가 배워야할 학문의 순서는 요약하면, 대수, 기하, 입체 기하, 천문학(motion에 관한 것), 화성학, 변론학의 순서이다.
<제8권>
[Book 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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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최선자 정치(혹은 왕도 정치)가 잘못될 경우 나타나게 되는 나쁜 정체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명예지상 정체, 과두 정체, 민주 정체, 참주 정체의 순이다.
<제9권>
*잠들었을 때 깨어나는 욕구들일세. 혼의 다른 부분이, 즉 이성적이고 유순하며 지배하는 모든 부분이 잠들 때면, 짐승 같고 사나운 부분은 잔뜩 먹고 마시고서는 발딱 일어나 잠을 물리치고 나가서는 제 기질을 충족시키려 꾀하지. 그런 때에 그것은 일체의 부끄러움과 분별에서 풀려나고 해방된 터라, 무슨 짓이든 감행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네. 그것은 상상하게 되는 데 따라 어머니와도, 그 밖의 인간들이나 신들 중의 누구와도, 또는 짐승들 중의 어떤 것과도 교접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누구든 살해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거니와, 어떤 음식이든 삼가는 일도 없다네. 한마디로 말해서, 어리석거나 파렴치한 짓을 빼놓지 않고 저지른다네. (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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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정신 활동이 의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플라톤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플라톤이 무의식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을 리는 없겠지만, 인간이 욕망 충족을--의식적, 이성적 잣대에서 보았을 때에는 용납되지 않는 것까지도--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은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의식적인 욕망에는 윤리의 척도로 평가하기 힘든 부분이 있으며, 그 무의식적인 욕망이 어떤 면에서는 삶을 이끌어가는 힘일 수도 있는데, 플라톤은 그 점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하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육체와 정신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가 하는 점도 등한시 하고 있다.
[Book ix]
*Has not the body itself less of truth and essence than the soul?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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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철학의 주요 문제를 제기하고, 또 거기에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해답은 유신론적, 관념론적이다. 그가 확실한 인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지금에 와서 보면, 그 자신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제10권]
*신은 자신이 원했건 또는 자신으로서도 본질적 침상을 하나 이상은 만들 수 없는 어떤 필연성 때문이었건 간에, 저 ‘침상인 것 자체’를 하나만 만들었다네. 신에 의해서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그런 것이 만들어진 적도 없고 또한 없을 것이네. (616)
--철학의 일차적 과제가 인식의 확실성의 추구라면, 우리의 인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태도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러한 태도를 데카르트에게서 발견하는 듯 하다. 플라톤은 자승자박격으로 자신이 주장한 부분에서 스스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회화와 일체 모방술은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며, 또한 우리 안에서 분별(지혜)과는 멀리 떨어진 상태로 있는 부분과 사귀면서, 건전하지도 진실되지도 못한 것과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된다고 내가 말했었지. (630)
*만약에 자네가 서정시에서든 서사시에서든 즐겁게 하는 시가를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법과 모두가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이성 대신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왕 노릇을 하게 될 걸세. (637)
*자네는 우리의 혼이 죽지 않으며 결코 파멸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는가? (640)
*올바른 사람의 경우에는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네. 그가 가난한 처지가 되거나 또는 질병이나 그 밖에 나쁜 걸로 여겨지는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더라도, 이런 일들이, 그가 살아 생전에건 또는 죽어서건, 결국에는 좋은 일로 끝을 맺게 된다고 말일세. 그야 물론 올바르게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그리고 [사람의] 훌륭함(덕)을 수행하여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 신을 닮으려 하는 사람이 적어도 신들한테서 홀대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네. (649)
*사람들이 언젠가 누구한테건 일단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한 그만큼, 그리고 각자가 해친 사람들의 그 수만큼, 이번에는 그 벌을 죄다 받게 되는데, 그 각각에 대해 열 배로 받는다는군. 이는 곧 백 년을 단위로 한 것이니, 그건 인간의 수명이 그만큼이기 때문인데, 이렇게 해서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값을 치르도록 하기 위해서라네. (654)
[Book X]
*Then must we not infer that all these poetical individuals, beginning with Homer, are only imitators; they copy images of virtue and the like, but the truth they never reach? The poet is like a painter who, as we have already observed, will make a likeness of a cobbler though he understands nothing of cobbling; and his picture is good enough for those who know no more than he does, and judge only by colours and figures. (368-9)
*whenever you meet with any of the eulogists of Homer declaring that he has been the educator of Hellas, and that he is profitable for education and for the ordering of human things, and that you should take him up again and again and get to know him and regulate your whole life according to him, we may love and honour those who say these things--they are excellent people, as far as their lights extend; and we are ready to acknowledge that Homer is the greatest of poets and first of tragedy writers; but we must remain firm in our conviction that hymns to the gods and praises of famous men are the only poetry which ought to be admitted into our State. (378)
*unless some bodily evil can produce an evil of the soul, we must not suppose that the soul, which is one thing, can be dissolved by any merely external evil which belongs to another?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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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에서는 예술의 해악성과, 영혼의 불멸 및 인과응보론이 주장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비판의 소지가 가장 많다. 예술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는 걸 플라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술의 호용성과, 인간 활동에 있어서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 이런 것을 편협한 시각에서 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술과 시가 폄하의 대상인 반면, 음악은 예술의 일부로 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의 역기능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에도 다소 귀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이성의 잣대에 놓고 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함이 이 부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영혼의 불멸 부분에 가서는,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호머가 한 이야기와 똑같은 황당한 이야기(오디세우스가 저승을 방문한 것처럼, ‘에르’라는 인물이 저승을 방문하여 보고 들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철학의 일차적 과제가 인식의 확실성의 추구라면, 우리의 인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태도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러한 태도를 데카르트에게서 발견하는 듯 하다. 플라톤은 자승자박격으로 자신이 주장한 부분에서 스스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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