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1976년 9월 30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85만 2400m2이고, 1987년 9월에 복원, 준공되었다. 왕인묘(사당) ·내삼문(內三門) ·외삼문 ·문산재(文山齋) ·양사재(養士齋) ·전시관 ·왕인상 ·책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왕인묘(약 82.5㎡)에는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문산재와 양사재는 왕인이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는 곳으로, 월출산(月出山) 서쪽 산 중턱에 터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책굴은 왕인이 학문을 수련할 때 쓰던 석굴이다. 전시관에는 탄생도 ·수학도(修學圖) ·도일도(渡日圖) ·학문전수도 등이 걸려 있다.
이 밖에 일찍이 외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전수하는 대외무역항구로서 선사시대부터 문화가 발달되고, 왕인이 일본으로 떠날 때 배를 탔던 상대포(上臺浦)도 복원되었다. 또, 왕인이 고향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도 남아 있는데, 이곳은 백제 때의 토기제조촌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 지방에서 벌어지는 산유놀이 때, 왕인이 마셨다는 성천(聖泉)의 물을 마시면 왕인과 같은 훌륭한 사람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인 박사 유적 [王仁 博士 遺蹟]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탐방기] 2021년 9월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코로라로 인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입장료가 1000원, 주차료가 1500원인데 바로 길 건너편에 넓은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어 거기에다 차를 대고 들어갔다. 입장료는 키오스크에서 따로 구입해야 했는데, 그걸 모르고 주차하는 곳에서 티켓을 끊으려 하자 관리원이 옆에서 하라고 말해주었다.
왕인 박사가 405년 일본으로 건너갈 때 천자문을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주흥사가 천자문을 지은 시기보다 앞선다는 것에 대해 이설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영월관에서는 문화해설사 분이 설명을 하고 있어서 나도 몇 마디 들었다. 일본의 고대 문화 성립에 백제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 주된 요지였다.
영월관을 나와 넓은 경내를 돌아다니며 하나씩 관람했다.
날이 잔뜩 찌푸린 상태이더니 급기야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다. 나는 배낭에서 우산을 꺼냈다.
다소 뜬금이 없지만 수석관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기기묘묘한 수석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이한 것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이 지역 출신의 수석가들이 기증한 것이었다.
탄생지를 벗어나 산으로 들어갔다.
내친김에 왕인석상과 책굴 등도 보기 위해 산길을 걸어나갔다. 이때쯤엔 비도 그쳤다.
길을 따라 내려오니 죽정마을이었다. 양사재와 문산재가 생각과는 달리 경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곳을 돌아보기 전에는 왕인 박사의 이야기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와 인터넷으로 좀 검색을 해 보니 몇 가지 의심이 들었다.
현재 나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왕인 박사는 국내 사료에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일본에서만 언급되고 있어서 그 진위가 의심을 받고 있다. 백제가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기여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왕인이 영암의 성기동 출신이라는 것의 근거는 희박하지 않은가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내선일체'를 주장할 때, 이 왕인을 활용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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