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동. 학원사.
- 1940년에 나온 리처드 라이트의 [토박이](혹은 [미국의 아들] Native Son)이 흑인에 대한 인종적인 차별이 어떻게 주인공 비거 토머스가 살인자가 되고 마는가를 리얼리즘적인 측면에서 적나라하게 제시했다면(이 작품은 백인이지만 신분 상승을 꿈꾸는 가난한 주인공 클라이드 크리피스가 살인자로 전락하고 마는 과정을 그린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과 일맥 상통하는 면도 있다), 1952년에 나온 랠프 엘리슨의 이 작품은 주인공의 이름을 지워버릴 정도로 인종 차별로 인해 정체성이 상실된 한 인물을 더욱 심도 있게 그리고 있다. 그래서 단순히 리얼리즘적인 전개 대신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차용하고 있다.
남부에서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차별, 그리고 북부에 올라와서도 처음에는 자신의 연설 능력 때문에 민중들을 이끄는 리더의 위치를 차지하는 듯하지만 이내 혼란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모습을 작가는 끈질기게 천착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이 각성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려면 작품을 좀더 존존하게 읽어나갔어야 할 테지만, 부족한 대로 대략적인 맥락은 추적해 볼 수 있다.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말들은 흑인들뿐만 아니라 현대인들 전반이 겪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을 잘 보여준다.
2권 172) 나는 기차가 푸른 불꽃을 일으키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그곳에 서 있었다. 역사가들은 덧없이 지나쳐 가는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나 있을까? (동지회를 알기 전의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말이다.) 말하자면 학문적으로 분류하기에는 너무나 애매하고 소리에 가장 민감한 전문가조차도 듣지 못할 만큼 조용한 철새 같은 존재 그리고 너무나도 모호해서 가장 모호한 말로도 묘사할 수 없을 정도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중심부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인은커녕 역사적인 서류에 사인을 한 사람에게 박수조차 보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존재들 말이다. 소설도, 역사도, 그리고 그 어떤 저술도 남기지 못하는 우리들. 우리는 어떻게 생각될까?
2권 370) 나는 단죄하는 동시에 긍정한다. '아니요'라고 했다가 '네'라고 하고, '네'라고 했다가 '아니요'라고 한다. 나는 비난한다. 왜냐하면 비록 복잡한 문제이고 내게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지만, 나는 끝이 없는 고통을,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될 지경에 이를 정도의 시함 고통을 당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나는 변호한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의 일부라도 쓰려면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독학사에서 수업을 할 때 리처드 라이트의 작품도 또 이 작품도 읽지 않고 설명을 하려니 항상 마음의 부담이 되었는데, 번역본으로 나마 이번 기회에 읽을 수 있어서 짐을 좀 던 느낌이다.
[1권]
프롤로그
11) 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52) 흑인들을 위한 주립대학의 장학증서
79) 짐 트루블러드 - 근친상간
225) 우리 흑인들에게서는 모두 더러운 냄새가 난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갖게 해서는 안 된다.
280) "오케이." 그가 마침내 승낙했다. "이 친구를 쓰겠어. 써야만 하지. 이 친구 이름이 뭐야?"
사환은 카드에서 내 이름을 읽어 주었다. (이름과 관련된 언급)
294) "자네 이름은 뭔가?" 그가 물었다.
나는 용광로의 요란한 소리 속에서 이름을 크게 외쳤다.
337) 어쩌면 나는 바로 암흑이고 혼란이며 고통일지도 모른다.
371) 나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남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만 하려고 하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 왔던가?
440) 그들은 대개 자신들의 삶이 어디까지이고 상대방의 삶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른다. 내가 항상 '나'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그들은 보통 '우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2권]
23) 당신같이 뉴욕에 사는 흑인 젊은이들, 모두 범죄자들이야!
29) 그 순간 터널 양 끝에 동시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1) 나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54) 그리고 이제부터 내 삶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다른 모습이다. 내가 청중에게 말한 내용이 모두 진정이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그런 말을 하게 될지는 나 자신도 몰랐었지만 말이다.
82) 라스 - 그들은 쓰레기들을 이용해서 너희 젊은 흑인들에게 더러운 일을 시키는 거야. 그놈들은 너흴 배신하고 너희는 흑인들을 배신하는 거야.
86) 라스 - 이 백인들의 문명을 세우기 위해 300년간이나 흑인들이 피를 흘렸어.
92) 예전의 나는 밤에 몇 시간밖에 잠을 못 이루며 할아버지와, 블레드소, 브로크웨이 그리고 메리의 꿈을 꾼다. 그리고 날개도 없이 뛰어올라서 높은 절벽에서 추락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공인으로서의 나는 동지회를 대변하고 다른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이 되어서 마치 나 스스로를 상대로 경주를 하는 듯 보일 정도이다.
163) 클리프톤 - 춤추는 인형 판매
172) 나는 기차가 푸른 불꽃을 일으키면서 들어오고 나가는 그곳에 서 있었다. 역사가들은 덧없이 지나쳐 가는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나 있을까? (동지회를 알기 전의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말이다.) 말하자면 학문적으로 분류하기에는 너무나 애매하고 소리에 가장 민감한 전문가조차도 듣지 못할 만큼 조용한 철새 같은 존재 그리고 너무나도 모호해서 가장 모호한 말로도 묘사할 수 없을 정도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중심부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인은커녕 역사적인 서류에 사인을 한 사람에게 박수조차 보낼 수 없는 위치에 잇는 존재들 말이다. 소설도, 역사도, 그리고 그 어떤 저술도 남기지 못하는 우리들. 우리는 어떻게 생각될까?
179) 나는 조직의 운동에 너무나도 매료되었던 나머지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나는 잠이 든 채 꿈을 꾸었던 것이다.
255)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경계가 없다. 거대하고 뜨겁게 요동치는 유동성의 세계이다. 그리고 악당 라인이 활개를 치고 있다. 어쩌면 그곳에서 악당 라인만이 혼자서 활개를 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69) 그들[댁과 햄브로]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세상을 그려 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해 무얼 안단 말인가? 우리의 수가 많고, 특정한 일들을 수행하고, 많은 표를 제공하고, 그들의 저항 행진에 다수가 참여해 준다는 사실 외에 아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기대어 선 채 그들에게 굴욕을 주고 잘못을 밝히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 되었다.
269) 그들은 피부색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생각으로 나를 받아들였지만, 사실 그들은 색이고 사람이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차피 피부색에 관계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326) 이들[폭동을 일으킨 흑인들?]은 이 일을 조직화하고 자기들만의 힘으로 해냈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했다.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 . .
333) 그러나 나는 지금, 원래 사람과 사물 --상점, 편의점-- 사이의 충돌로 보였던 소동이 순식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것도 총을 가진 편과 숫자가 많은 다른 편 사이의 충돌로 변해 가는 과정을 인식하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340) 나는 영웅이 아니었다. 단지 약간의 말주변과, 자신을 남다른 바보로 만드는 데 무한한 능력을 가진, 키 작고 새까만 흑인일 뿐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들이 바로 내가 이끌려다가 실패했던 사람들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바로 지금, 나는 그들의 지도자임을 깨달았다. 비록 내 자신의 환상을 벗겨 내기 위해 그들을 이끌고, 그들 앞에 나섰지만 말이다.
360) 그들을 정당화시켜 주려다 보니 너무나 자주 나 자신의 멱살을 잡고 숨 막히게 조여서, 두 눈이 튀어나오고 혀가 늘어져 세찬 바람에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빈 집 문짝 꼴이 돼 버렸다. 그래 맞다. 그건 그들을 행복하게 했고 나 자신은 병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긍정의 병을 앓았으며, 머릿속은 말할 것도 없고 뱃속에서 싫다고 하는 걸 무시하고 "네."라고 말하는 병을 앓았던 것이다.
365) 이제는 사람들이 제각기 다르다는 걸 알게 됐으며, 모든 삶은 서로 갈라져 있고 그렇게 갈라진 곳에 진정한 건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366) 삶이란 살기 위한 것이지 통제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다움이란 패배에 직면해서도 계속해서 투쟁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370) 나는 단죄하는 동시에 긍정한다. '아니요'라고 했다가 '네'라고 하고, '네'라고 했다가 '아니요'라고 한다. 나는 비난한다. 왜냐하면 비록 복잡한 문제이고 내게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지만, 나는 끝이 없는 고통을,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될 지경에 이를 정도의 시함 고통을 당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나는 변호한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의 일부라도 쓰려면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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