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저만치 서있다. 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어여쁜, 내 생명보다 소중한 아내. 아, 그런데 그녀가 이 거대한 댐의 수문을 열어젖히려 한다. 도무지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은전처럼 맑던 그녀의 정신에 갑자기 이끼라도 낀 것일까? 들어올려진 아내의 손이 버튼에 닿는 순간 수백 수천 수만 사람이 졸지에 물귀신이 되리라. 시간이 없다. 아내의 손가락은 깃털보다 가볍고 내 몸은 너무도 멀다.
사랑하는 아내여, 그대를 위해, 아니 나 자신을 위해, 나 이 총을 버려야만 하는가? 내 이웃 또 모르는 많은 사람을 위해 그대의 심장을 겨누어야만 하는가?
(87년 6월, 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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