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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예전것)

잉글리쉬 페이션트 - 안소니 밍겔라(English Patient - Anthony Minghella). 1996

by 길철현 2024. 9. 10.

(19980120 공책에 적은 것을 옮김)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 대해서는 감독도, 주연 남녀배우도, 이 영화가 소설에 바탕을 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별다른 사전 지식 없이 이 영화를 접하게 된 셈이다. 물론 이 영화를 먼저 본 상화 형이 극찬에 가까운 찬사를 보내는 걸 들었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러 부문에 걸쳐 수상했다는 점, 또 줄리에트 비노쉬와 윌리엄 데포 등의 조연은 낯에 익은 사람이었다는 점 등은 이 영화에 대해 사전 지식이 전무하지는 않다는 걸 말해 준다. 

 

(전체적 느낌)

전체적 느낌은 우선 상화 형이 이야기한 것만큼 훌륭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영화에는 아름다운 장면이 많이 있다. 특히 한나의 애인 킵이 그녀를 성당으로 데리고 가, 높다란 곳에 그려져 있는 벽화를, 도르레 비슷한 기구를 이용해 보여주는 장면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대사나 스토리 전개가 (때때로) 멜로드라마틱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사실 알마쉬의 개서린에 대한 사랑에 비해, 캐서린이 알마쉬로 향하는 사랑은 제대로 작품 상에 드러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유한 계층으로 탐사에 관여하고 있던 알마쉬 백작이 친구의 아내인 캐서린과 불륜의 관계에 빠진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회적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캐서린은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런데, 이들에게 전쟁의 그늘이 드리우고. 알마쉬 백작을 태우러 왔던 프레드의 비행기가 추락하여 프레드는 즉사하고 캐서린은 심한 부상을 입는다. 알마쉬는 그녀를 동굴에 뉘여 두고, 사막을 걸어 건너가 차를 몰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그는 영국군에서 독일 스파이로 오인을 받게 되어 체포되는 신세에 놓인다. 이송 중 탈출에 성공한 그는, 이번에는 독일군에게 가서 사막의 지도를 건네 주고 그 댓가로 비행기를 얻어 캐서린이 있는 동굴로 돌아온다. 이미 그녀는 죽어 있었고 그녀를 비행기에 태우고 가는 길이 독일군의 사격을 받아 추락한다.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그가 간호사 한나의 치료를 받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 영화는 전개된다. 그러니까 위에 적은 내용은 알마쉬가 한나의 치료를 받는 와중에 하는 회상이다. 한나의 경우에도 전쟁 때문에 애인을 잃고, 친구마저 잃은 슬픈 사연이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인도 군인 킵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폭탄, 지뢰 제거 담당 장교이다. 

 

이 영화는 대단히 낭만적이다. 그리고, 알마쉬와 캐서린의 사랑 이야기 외에도 다른 많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우리 삶과 많이 닮아 있기도 하다. 주목할 부분은 알마쉬가 독일군에게 지도를 넘겨주는 것인데,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많을 듯하다. 굳이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자면 그가 먼저 영군군으로부터 독일 스파이로 오인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행동 때문에 독일군은 손쉽게 사막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고, 또 그의 친구 매독스는 자살에 이르게 된다. 개인의 삶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우리는 그 두 가지가 상치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이 생길 경우에는 언제나 비극이 발생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을 선택했다. 전쟁이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이와 비슷한 상황을 우리는 [광장]에서도 만나게 딘다. 전달이 늦어지면 수천 명의 아군을 위태롭게 할 지도 모를 문서를 들고 자신의 애인이 기다리는 동굴로 향하는 명누과,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내팽개치고 동굴로 명준을 만나러 가는 은혜.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입장에 놓였다고 생각해 볼 때 대답은 지난하다. 

 

알마쉬의 선택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했다. 아니 독일군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은 자유롭지 못한 동시에 자유롭다. 그리고 삶은 선택을 강요하고, 선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알마쉬의 선택은 비록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지라도, 그의 마음, 그 타는 마음, 캐서린으로 향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 영화가 아쉽다고 느껴지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 그토록 강렬한 것이었다는 것에 대한 전반부의 암시 내지는 전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자칫  잘못하면 캐서린의 한 때의 불장난으로 비칠 위험도 있다. 두 사람의 강렬한 사랑이 좀더 부각되었더라면 하는 것이 나의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