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빌의 「대서인 바틀비」와 인간의 소외
[덧붙이는 말: 논란의 초점에 서 있는 멜빌의 문제적 단편 [필경사 바틀비]를 마르크시즘과 탈구조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해 본 두 편의 짧은 글.]
1853년에 발표된 멜빌(Herman Melville)의 단편 소설 「대서인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는 사실적인 배경 속에서 전개되지만, 바틀비가 자신의 일을 거부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는 과정의 기이함이나, 그와 작품의 화자인 변호사와의 관계 등이 이 작품을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품의 부제에서도 잘 드러나듯, 자본주의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세기 중반의 뉴욕의 “월 스트리트”를 배경으로, 자본주의 내의 고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라는 문제가 작품의 한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글턴(Terry Eagleton)은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역사를 간략하게 조망한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비평?(Marxism and Literary Criticism)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문학을 그것이 생산된 역사적 상황과 관련시켜 분석한다”(xi)라고 못 박고, 이어 “그것의 목적은 문학작품을 좀 더 완전히 설명하는 것”(3)이라고 부언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작품에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접근 방식을 취했을 때 작품이 더 잘 해명이 되는지, 또 마르크스 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좋은 문학 작품인지를 상호연관성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짓는다”(14 재인용)는 상당히 독창적인 생각을 했는데, 이 말은 이 작품의 화자인 변호사와 바틀비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좀 더 풀어보자면 고용주인 변호사와 피고용자로 필경(筆耕) 일을 맡고 있는 바틀비의 의식은 두 사람의 사회적인 위치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당시의 지가(地價)의 상승을 반영하는 듯한 고층건물들이나, 그 고층건물들이 둘러싼 감옥처럼 답답한 환경 속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처지는 당시 사회의 변화가 작품 속에 잘 반영된 예이자, 등장인물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바틀비는 표면적으로 볼 때, 마르크스주의 비평에서 강조하고 있는 “전형적”인 대서인 계급의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노년이 다 된 상태에서도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 계속 일을 해야만 하는 “터키”(Turkey)나, 야심에 불타고 있지만 소화불량으로 고생하고 있는 “니퍼스”(Nippers)가 더 전형적인 인물로 비친다. 과거도 알 수 없고, 생강 비스킷으로 끼니를 때우고, 사무실에서 기거를 하며, 사무실 밖으로는 전혀 나가지 않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 동떨어진 인물로 묘사되는 바틀비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이다. 온순하면서도 현실과 전혀 타협을 하지 않는, 그래서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르고 마는 인물이다. 그러나, 바틀비를 온정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화자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없어 비타협으로 일관하는 바틀비 사이의 긴장은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알력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비록 계약 관계이기는 하지만,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기계처럼 장시간의 노동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 또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단절되고 수직적인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구조 내에서 인간이 정당한 인간으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것 등을 화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바틀비로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글턴은 스코트(Walter Scott)와 발자크(Balzac)의 경우 “작가의 의식적인 정치적 신조가 무엇이든 간에 [. . .] 사회적 삶의 부수적인 현상들을 꿰뚫고 그 상황의 본질들 혹은 본질적 요소들을 들추어”(27)낸다는 루카치의 말을 옮기고 있다. 이 말은 바꿔 보자면 작품의 시각이 작가 개인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작가를 규정짓고 있는 구조 혹은 틀이 드러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마셔레이(Pierre Macherey)도 “작가가 그의 텍스트를 생산한다기보다는 텍스트가 작가를 통하여 ‘스스로를 생산한다.’”(77)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멜빌의 개인적인 시각이 무엇이었든 간에 당대의 자본주의의 발달과 그에 따른 인간, 특히 노동자의 소외라는 본질적인 문제가 작품의 한 중심축으로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마르크스주의 비평 방식으로 접근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바틀비의 필경의 중단, 긍정적 전복
필경을 거부하고 결국에는 죽음에까지 이르고 마는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필경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흥미로우면서도 일반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다수의 문학 비평가는 물론 철학자들도 이 작품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 중 가타리와 공저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생산하는 욕망’을 강조한 들뢰즈는 자신의 사유 체계의 연장선상에서, 또 아감벤은 ‘잠재성’이라는 개념에 빗대어 각각 이 작품을 해명하려 시도하고 있다.
들뢰즈는 우선 바틀비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그래서 하나의 정식(formula) 같은 인상을 주는 “하지 않는 게 나을 듯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에 주목을 하면서 그러한 표현이 딱히 비문법적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별로 사용하지 않는 무문법적(agrammatical)인 표현임을 지적한다. 바틀비의 이러한 표현 방식은 “언어 내에 일종의 외국어를 새겨나가는 것이자, 전체가 침묵을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고, 전체가 침묵으로 와해되게 하는 것”(72)으로, 지배적인 언어 담론에 대한 저항이자, 거기에 균열을 가져오려는 시도로 들뢰즈는 보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기존의 ‘전제의 논리’(a logic of suppositions)에 대해 ‘선호의 논리’(a logic of preference)라는 새로운 논리이자 그것은 “우리를 다시 이성으로 이끌지 않고 삶과 죽음의 가장 내부적인 깊이를 파악하는 논리”(82)를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적인 ‘힘’의 추구와 인간 삶의 ‘분열적’인 면을 강조하는 들뢰즈에게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지배적인 척도를 따르는 안정적이고 손쉬운 길--화자인 변호사가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그 길을 넘어서서 탈주하고 또 탈영토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작품에서의 바틀비의 행보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구현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바틀비를 “환자가 아니라 병든 미국을 치유하는 의사”(90)이자 “새로운 그리스도”(90)라고 결론짓고 있다.
아감벤의 경우에는 서양 철학의 중요한 개념의 하나인 “잠재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인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의 접근 방식, 즉 “어떤 것이거나 어떤 것을 할 모든 잠재성은 항상 어떤 것이 아니고 또 하지 않을 잠재성이기도 하다”(245)에서 이 “아닐”이라는 부분에 특히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바꿔 말해 “힘과 무능력(impotence) 둘 다가 가능한 힘이 최고의 힘”(아감벤 “Bartleby”에서 인용)이듯이 잠재성이 잠재성으로서의 진면목은 “아닐”(not-be)을 포함할 때라고 보고 있다. 또, 그의 논문 제목인 우연성(Contingency)라는 말이 시사하듯,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기보다는 존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257)는 라이프니츠의 “충족 이유율”에 반대를 하면서, 우리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주목을 하면서 존재의 우연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잠재성이나 우연성에 대한 그의 이러한 생각에서 볼 때 필경을 하는 것을 거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태도는 잠재성이 하나의 능력이자, 실현됨으로써 사라져 버리는 따라서 하지 않는 가운데 지속되는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바틀비의 필경 행위--그것을 하나의 실현 행위라고 볼 때--가 그 무한한 반복을 통해 잠재성을 소진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잠재성을 잠재성으로 두기 위해서 바틀비는 필경 행위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268). 더 나아가 그가 법을 베끼는 것을 중단하는 것은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이는 “현실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권리로 이어질 수 있음”(271)을 보여주는 탈창조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들뢰즈나 아감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사유 체계를 통해 이 작품을 풀어내고 있는데, 두 사람 다 기존의 삶의 방식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과 보다 바람직한 삶을 추구하기 위한 다소 전복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점에서 유사하다(그래서 더 이상 바틀비는 산업 도시의 물질문명에 적응하지 못한 실패자가 아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바틀비로 대변되는 탈주하는 소수자의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아감벤은 우리의 삶에서 잠재성이 가지는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이 바틀비를 그러한 잠재성의 담지자로 파악하고 있다. (2011년)
'독학사15학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요 등장인물들의 갈등 양상 - 호손의 주홍 글자 [Hawthorne's Scarlet Letter] (0) | 2016.04.08 |
---|---|
Henry Wadsworth Longfellow - A Psalm of Life (롱펠로우 - 삶의 찬가) (0) | 2016.04.05 |
Anne Bradstreet - The Author to Her Book 번역 (0) | 2016.03.30 |
3장 국민 문학의 대두 보충 (0) | 2016.03.23 |
7장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시대 (0) | 2016.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