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4월 1일, 만우절) 고향인 대구에 들렀다가, 어머니, 큰 여동생, 조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겸, 어머니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두류 타워(지금은 83타워로 불리더군요. 83층 높이)로 향했지요. 어릴 적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나지막한 두류산 정상에 두류 타워가 들어선 지도 자료를 조사해 보니 벌써 20년도 더 지났네요. 정상으로 향하는 길 양 옆에는 A. E. 하우스만이 '가장 사랑스러운 나무'라고 예찬한 벚꽃들이 만발해 있었고, 움츠린 가슴을 열고 봄을 만끽하려는 상춘객들과 연인들이 그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전날(3월 31일)에는 친구와 함께 다시 경주를 찾았습니다. 박해일과 신민아가 주연을 맡은 장률 감독의 [경주]에 나왔던 곳들을 다시 찾고 또 생각을 가다듬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것이 지극히 어렵네요. 열 번 이상은 봤는데도 뭔가 실마리가 잡힐 듯, 잡힐 듯, 얼마 전에는 이 영화를 오이디푸스로 꿰어볼 수 있을 듯한 그런 번뜩하는 영감도 떠올랐는데. 좀 더 시간이 무르익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영화 [경주]의 주배경은 대릉원 옆에 있는 노서리 고분군 인근입니다. 이 쌍묘는 술에 취한 신민아(윤희)와 박해일(최현), 김태훈(영민)이 밤에 올라갔다가 경비원에게 혼줄이 나는 곳이지요. 이 거대한 능들은 정말 올라가보고 싶은 욕구를 충동질하는데 사람들 시선이 많은 곳에서 차마 위반을 못하네요.
그리고 영화의 발단이 되는 춘화가 있던 찻집 [아리솔] 또한 이 고분에서 2,3백여미터 밖에 안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영화를 보고 두 번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혼자라 뻘쭘해서 찻집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래서 이번에 친구를 대동했는데 무슨 일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더군요. 이 찻집의 내부는 내게는 자꾸 넘을 수 없을 금도로 여겨지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번 여행의 성과 중의 하나는 보문호의 [힐튼] 호텔 내에서 박해일이 태극권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이 장면은 장률이 홍상수의 영화 중 한편에서 따온 것인데, 그 영화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지난번에 왔을 때는 못 찾았고, 이번에도 힐튼 호텔 부근을 헤매다가 마지막에야 겨우 발견했답니다. 영화 속의 장면이 보문호를 바라보는 곳인 줄 알았는데 등진 곳이라, 다시 말해 내 생각과 실제 장소의 방향이 반대였기 때문에 그 옆을 지나면서도 몰랐던 것이지요.
그리고, 영화의 거의 끝부분, 최현의 또 다른 화두였던 장소, 그러니까 술이 취해 돌다리를 건너는데 물소리가 세차게 나는 곳(관광 안내소의 젊고 예쁜 아가씨에게 수작?을 부리면서 묻던 그곳),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그곳이 그가 7년 전에 찾았던 곳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곳 역시도 보문호의 힐튼 호텔 인근에 있는 장소입니다.
이 사진은 인터넷에 있는 것을 올린 것인데요. 친구와 나는 이곳을 걸어서 건넜는데도(겁이 많은 친구는 물에 빠질 것을 염려했지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영화 속에서는 이곳에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작비를 많이 투자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인지 장률 감독은 여러 곳을 다니지 않고 대체로 근처에 있는 장소에서 촬영을 했더군요.) 영화 속 이야기에 실제 장률 감독의 경험이 투영되고 있다고 한다면, 7년 전 그가 경주를 찾았을 때에는 사진에서처럼 물이 차 있었다가,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 뭐 이런 약간 자의적인 상상도 해봅니다. (이것은 좀 더 생각해 보니 정말 지나치게 자의적인 상상인데 왜냐하면 이 돌다리는 영화를 촬영할 즈음에 막 완성된 그런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경주]는 일상을 그려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만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장률은 능이 일상의 공간 속으로 들어와있는 경주를 배경으로 죽음과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미묘하게 접근하고 있는데, 일관성있게 영화를 파악하기는 힘들어도 잡힐 듯 말듯 한 영화의 내용이 나를 매혹시키네요. (만약 [경주]에 대해 다시 글을 써보려고 시도를 한다면 그 출발은 아마도 봉작의 그림에서 왜 그믐달에 가까운 달을 초승달이라고 하는지. -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 이 초승달은 실제로는 물에 비친 그런 것인지. 이 부분에 대한 나의 연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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