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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독서일기01-05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01년]

by 길철현 2016. 12. 6.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송병선 옮김, 민음사


<참조:아르헨티나><Britannica>

면적: 2,780,092 제곱KM
인구: 35,409,000  명 (90년대?)
 
<Geographic Regions>
*In the humid pampas, and especially in the "Great City" of Buenos Aires, is concentrated most of the productive capacity of the nation. (360)

<People>
*The racial stock of Argentina is overwhelmingly white European. (362)

<History>

식민지 시대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남부 지방의 토착원주민들은 대부분 유목생활을 하는 사냥꾼과 어부였다. 반면 일찍이 잉카 제국의 세력이 미쳤던 북부 지방에 사는 원주민들은 농경생활을 했다. 잉카인들은 남쪽으로 지금의 멘도사 시까지 도로를 건설했다.

처음으로 도착한 유럽인은 스페인인이었지만 이들의 정착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1536년 세워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인디언들의 습격이 잦고 담수가 부족하여 1년 후에 버려졌다. 뒤이어 칠레․페루․파라과이(아순시온) 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로부터 온 스페인인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원주민과의 결혼도 널리 이루어졌다. 이러한 공동체는 인디언 노동력과 스페인인들이 들여온 말․소․양과 옥수수․감자 같은 토산품을 기반으로 해서 단순하지만 활기찬 사회로 발전했다.

177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한 신생(新生)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수도로 승격되고 유럽의 지식과 사상이 유입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1816년 투쿠만에서 열린 의회는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고 선언했다.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기반을 확실히 다졌고, 이어서 1835년에는 나머지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의 독재는 1852년에 끝났다. 1853년 제헌회의가 산타페에서 열렸고,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처음에는 다른 주와의 통합을 거부했으나, 1860년 다른 주들의 무력사용에 패하여 통합을 받아들였다. 외국 자본과 기술의 원조로 철도가 잇달아 건설되었다. 철조망, 개량종인 소와 양, 냉동기술 등도 도입되었고, 유럽에 낙농제품을 대규모로 수출하게 되었다. 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늘어난 정부수입은 이주민의 유입을 육성하고 공교육제도를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80년에 들어와서 에스탄시에로로 불리는 대농장주들이 핵심을 이룬 보수적인 과두정치시대가 열렸다. 이 체제는 1916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온건 정부로 계승되었으나 1930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한동안 유지되던 민정은 사실상 끝이 났다. 불안한 정국은 10년간 계속되다 1940년대 초 후안 페론이 카리스마적인 민중지도자로 떠오르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1946년 대통령이 된 페론은 급속한 산업 확대 및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개입 정책을 펴고 노동자의 사회적 이익증진에 목표를 둔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책은 경제적․사회적 문제들을 남기고 실패로 끝났으며, 1955년 그는 군부에 의해 축출되어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에도 악성 인플레이션, 파업, 높은 실업률, 잦은 정권교체 등이 계속되었다.

1973년 페론은 망명지에서 돌아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74년 그가 죽자 3번째 부인이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계승했으나, 1976년 군장교들에 의해 실각했다. 계속되는 경제침체와 정치불안정, 극단주의적 정치파벌에 의한 테러의 증가 속에 1983년까지 군부 통치가 계속됐다. 아르헨티나를 장악한 군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군정전복혐의로 최소한 1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했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군은 100년 이상 소유권을 주장해왔던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같은 해 6월 영국군이 제도를 탈환함에 따라 군부는 치욕 속에 영유권을 포기했다. 1983년 총선이 실시되었다.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은 군정이 저질러온 악습을 퇴치하려는 정책을 단행했다. 또한 높은 연평균 물가인상률과 막대한 외채를 줄이고자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로 인해 1989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당의 카를로스 사울 메넴에게 패했다. 페론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페론주의 지지층인 빈민과 노동계급에 호소함으로써 선거에 승리할 수 있었던 메넴은 노동자․기업․정부 사이의 임금-가격 협정에 기초하여 낮은 관세와 비효율적인 공기업의 민영화 등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계획했다. 메넴은 경제위기를 맞자 군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인권침해로 기소된 자들을 사면하여 후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에서 비롯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영국과의 외교관계를 재정립했다. 메넴이 성공적으로 인플레이션율을 낮출 수 있었던 데는 도밍고 카바요 경제장관의 도움이 컸다. 1994년 알폰신 전대통령과의 합의를 통해 대통령 연임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이루어 낸 메넴은 1995년 재선에 성공했다.
1. Prehistory
2. Discovery and Settlement
3. Colonial Development
*Buenos Aires, which rose to leadership in the late 18th century, symbolized three important reorientation of Argentine life from west to east. (364)
4. Independence
*When Ferdinand<Spain King-quotor> was restored in 1814 he promptly proved himself one of the worst kings Spain had ever had. Thereupon an assembly representing most of the country met at Tucuman and on July 9, 1816, declared the country independent under the name of the United Provences of the Rio de la Plata. (364)
5. Rosas Regime
*At first his power was confined to the province of Buenos Aires, of which he was elected govenor in 1829, and other provinces had their own caudillos. by 1835, however, he had subordinated or eliminated his rivals, and from that time until his overthrow in 1852 he was master of Argentina. (365)
*What overthrow Rosas was the combination of a revolt in his own army with intervention from Brazil and Uruguay, and in both cases Rosas himself was largely to blame. (365)
*On May 1, 1851, Urquiza proclaimed his revolt agains a "despot" who had violated a long-standing promise to establish constitutional government in Argentina. (365)
6. National Consolidation
* The province of Buenos Aires refused to join the new union, whose first elected president was Urquiza and whose first capital was Parana.
7. The Oligarchy, 1880--1916
8. Radical Regime, 1916--30
*This increase of antidemocratic sentiment was one of the major features of Argentine history in the 1920s. It was due partly to contagion from abroad--mainly the Italy of Mussolini and the Spain of Primo de Rivera, and to a less extent from the Catholic right in France and Communist headquaters in Moscow. (367)
9. Consevative Restoration
10. Peron Regime


11. Radical Restoration

*Of the 11 presidents of the country between 1930 and 1960, 8 were army officers. (370B)

[참고 자료]
1. 후안 페론, 브리태니커

페론
Juan (Domingo) Perón

1895. 10. 8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1974. 7. 1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의 군인·정치가.


페론(1954)1946~55, 1973~74년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페론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며 지도자였다.

초기생애
189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팜파스에 있는 작은 마을의 전형적인 아르헨티나 가정에서 태어났다. 페론의 가문은 수세대 동안 아르헨티나에 정착하여 산 크리올이었으나 조상은 비(非)스페인계 유럽인, 즉 이탈리아와 프랑스계였다. 당시 유럽계 이주민들은 유럽 이주민이나 그들의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 밀집하여 살았다. 그의 소년시절은 신분상승을 꿈꾸는 중하류층 소년들의 생활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16세에 군사학교에 들어가 남들보다 빨리 승진했다. 그에게는 남보다 특출한 자질이 있었다. 183㎝의 키에 신체 건장한 페론은 군대내에서 제일 가는 펜싱 선수였고, 게다가 스키를 잘 타고 권투도 잘 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무관을 지내면서 파시스트와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역사학과 정치철학에도 흥미를 가져 이 분야의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1943년 장교음모단에 가담하여 취약했던 문민정부를 전복시켰다. 당시의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진행으로 야기된 각종 이념적·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1943년 이후의 3년 동안 군사정부는 점점 더 페론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페론은 노동·사회복지 장관이라는 한직을 맡으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1945년에는 부통령 겸 육군장관을 겸임했다. 그당시 그는 이미 소외된 노동자 계급인 데스카미사도스(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들)의 지지와 군부 내의 신망과 인기를 바탕으로 최고권력을 잡기 직전의 상태였다.


COPYRIGHT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에바 두아르테와의 결혼
1945년 10월초 페론은 호헌을 지지하는 민간인과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모든 직위에서 축출되면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미인이며 활동파인 그의 정부 에바 두아르테와 노동조합의 간부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의 노동자들을 궐기시켜 1945년 10월 17일 페론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석방되던 날 밤 대통령궁의 발코니에서 페론은 30만 명의 청중을 상대로 연설을 했고 그 연설은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되었다. 그 연설에서 그는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국민을 이끌 것을 약속했다. 그 며칠 뒤 에바(또는 에비타)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후 몇 년 동안 페론의 통치에 더할 수 없는 조언자가 되었다. 페론은 연방경찰과 중무장한 단체의 탄압을 받아가며 유세를 벌인 끝에 1946년 2월 56%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은 아르헨티나에 산업화 정책을 시행했으며, 국가경제에 정부가 더욱 간섭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경제적·사회적 혜택을 주려는 의도였다. 그는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중도노선을 강조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반미·반영 정책을 채택했다. 또한 중남미 전역에서 아르헨티나의 영향력을 넓히려고 애썼고, 특히 남아메리카에서의 정치적·이념적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페론은 아르헨티나에 혁명적인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국가를 재건하는 업적을 달성했다. 후스티시알리스모(Justicialismo)라는 불분명한 정치철학을 내세우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하고 각종 혜택을 크게 늘렸다. 철도 및 다른 공익사업을 국유화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이같은 사업을 일으키기 위한 자금과 그의 정부를 부패시킨 공사비 착복 자금은 국고에서 지원되었다. 아르헨티나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보유외화와 농산물 가격을 결정하는 국영업체의 이익금이 그 자금이 조성되는 원천이었다. 페론은 군부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아르헨티나의 정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국민의 헌법상 권한을 크게 제한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철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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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망명
1951년의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이며 재선된 페론은 몇 가지 정책을 수정했다. 그러나 그는 곧 육군과 해군의 장교들이 합동으로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어 1955년 9월 19일 파라과이로 망명했다. 이 쿠데타는 인플레이션, 페론 정부의 부패, 민중선동, 탄압 등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페론은 마침내 마드리드로 가 그곳에 안착한 뒤 3번째 결혼을 했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암으로 죽었고 에바도 1952년에 죽었다. 그의 새 아내는 그가 1956년에 만난 마리아 에스텔라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의 아르헨티나 출신 무용수였다. 마드리드 교외의 호화로운 빌라에 살면서 그는 장미를 가꾸고 책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회의를 개최하는 등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아르헨티나로 귀국하기를 희망했으며 그런 희망이 실현되지는 못하더라도 수백만 명에 달하는 페론주의 세력이 재집권하기를 갈망했다. 스페인 국민들은 시간이 가면서 페론에 대한 인식을 좋게 가지기 시작했고, 페론의 10년 집권에 뒤이은 새 행정부의 무능력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페론주의 세력은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새롭고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했다. 1955년 이래 아르헨티나를 통치해온 문민정부나 군사정부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국가의 고질적인 정치적 정체 상황을 해결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은 페론주의자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으려는 태도에도 부분적인 이유가 있었다. 1971년 3월 집권한 알레한드로 라누세 장군의 군사정부는 1973년말까지 입헌민주정부의 수립을 약속하고 페론당을 포함한 여러 정당의 결성을 허용했다.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에바 페론(그녀는 그 카리스마적 매력 때문에 사후에도 아르헨티나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의 유해는 정부의 명령에 의해 파내어져 페론에게 보내졌다. 군사정부의 초청을 받은 페론은 1972년 11월 잠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1973년 3월의 선거에서 페론당 후보들은 대통령직을 확보했고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그해 6월 페론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10월에 열린 특별선거에서 그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의 요구에 따라 그의 아내가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페론의 3번째 아내가 죽은 에바와 지나치게 경쟁하려는 태도를 보여 그녀를 싫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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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유산
망명시절 페론은 좌익 성향의 페론주의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가장 호전적인 노동조합 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일단 집권하자 군부뿐만 아니라 전에는 적대적이었던 우익세력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74년 그가 죽자 뒤이어 대통령이 된 그의 아내는 아주 불안정한 정국을 물려받았다. 페론의 생존시부터 조짐이 있었던 페론주의 운동 내부의 분열과 정부의 분열은 마침내 노골화되었다. 페론 부인은 그 어떤 정치집단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충실한 지지세력이었던 노동조합도 등을 돌리고 말았다. 테러 행위와 정치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이 연간 600%에 달했다. 1976년 3월 24일 군부가 집권하여 페론 부인을 대통령직에서 축출하고 혁명군사평의회를 세웠다.
T. F. McGann 글

참고문헌


페론

후안 페론 : 존 드상시, 박순황 역, 대현출판사, 1993
◦ 에바페론, 에비타 - 에비타, 그 삶과 죽음 : 폴 L. 몽고메리, 장세석 역, 책과 선택, 1990
◦ Peron : Joseph A. Page, 1983
◦ Argentina Under Peron, 1973-6:The Nations's Experience with a Labour-based Government : Guido Di Tella, 1983
◦ Juan Peron and the Reshaping of Argentina : Frederick C. Turner·Jose Enrique Miguens (eds.), 1983
◦ Juan Domingo Peron : Robert J. Alexander,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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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사벨 페론, 브리태니커

페론
Isabel (Martínez de) Perón
결혼 전 성은 María Estrela Martínez Cartas.
1931. 2. 4 아르헨티나 라리오하~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1974~76).
후안 페론 대통령의 3번째 부인이다.
이사벨 페론은 중하류층 출신으로서 이사벨이라는 이름은 로마 가톨릭 견진례 때 세례명으로 얻은 것이며, 무희가 되었을 때 그 이름을 채택했다. 이사벨은 1955(또는 1956)년에 페론을 만난 뒤 연예계 생활을 포기하고 페론의 개인비서가 되어 망명을 떠나는 그를 따라 마드리드로 가서 1961년 결혼했다. 이사벨 페론은 1960년대와 1970년대초 여러 차례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페론을 위해 지지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맡았다. 페론은 1973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측근이던 호세 로페스 레가의 제안에 따라 그녀를 자신의 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페론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병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사벨 페론은 남편을 대신해 대통령직을 몸소 대행해야 했다. 1974년 7월 1일 페론이 죽자 이사벨 페론은 남편을 승계하여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이사벨 페론 정부는 물가앙등과 노동계의 불안, 정치폭력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채 출범했다. 그녀는 내각 각료들을 새로 임명하고 화폐를 발행해 외채를 상환하고자 했으며, 국가가 무정부상태 직전까지 이르게 된 1974년 11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직과 테러 활동으로 인해 강제로 추방당한 이사벨 페론 정권의 사회복지장관 로페스 레가를 둘러싼 논쟁이 그녀가 처한 상황을 불리하게 했다. 온건파 군장교들은 그녀의 사임을 촉구했으나 페론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동안 정치적·경제적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결국 1976년 3월 24일 공군장교들에 의해 이사벨 페론은 체포되었고, 5년간의 가택연금을 당하게 되었다. 1981년 이사벨 페론은 부패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그해 여름 가석방되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다. 1983년말 이사벨 페론은 사면되었으나 1985년 마드리드의 자택에서 이사벨 페론 당의 당수직을 포기한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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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바 페론, 브리태니커

페론
Eva (Duarte de) Perón
결혼 전 성은 María Eva Duarte. 별칭은 Evita.
1919. 5. 7 아르헨티나 로스톨도스~1952. 7. 26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2번째 부인.
그녀의 남편인 후안 페론이 처음 대통령으로 재임한 1946~52년 하층민들의 존경을 받는 비공식적이나 강력한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후안 두아르테와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사생아 중 1명이었던 에바(또는 에비타)는 연극 배우와 라디오 성우로서 평범한 연기생활을 한 뒤 1945년 상처하고 독신으로 있던 후안 페론 대령과 결혼했다. 그녀는 1945~46년에 걸친 남편의 대통령 선거유세에 가담하여 대중의 추종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대중을 '데스카미사도스'(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들)라고 불렀다. 에바는 정부 내에서 어떠한 공직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노동조합에 대해 후한 임금인상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노동조합측은 그 대가로 페론 대통령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냄으로써 사실상의 보건장관 및 노동장관으로 행동했다. 에바는 자선협회에 대한 전통적인 정부보조금을 폐지함으로써 전통적인 상류층 인사들 사이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 단체 대신 국민복권과 그밖의 기금에 대한 실질적인 세금 삭감과 자발적인 노동조합 및 기업 헌금에 의해 후원을 받는 자신 소유의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했다. 에바 페론 재단기금은 수천 개의 병원·학교·고아원·양로원, 기타 자선단체를 세우는 데 쓰여졌다. 에바는 여성의 참정권법 통과에 큰 기여를 했고, 1949년에는 여성 페론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전 학교에 의무적인 종교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1951년 에바는 자신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부통령지명을 얻어냈다. 그러나 군부는 그녀로 하여금 출마를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에바는 여전히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외경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녀를 추종하는 노동자계급에서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성녀로 추대하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에바의 정적들은 페론주의의 국민적 상징인 그녀를 아르헨티나 정치에서 몰아내기 위해 페론 정권이 전복된 뒤 1955년에 에바의 시체를 훔쳐내어 16년간이나 이탈리아에 은닉하기도 했다. 1971년 군사정부는 페론주의자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에바의 유해를 마드리드에서 망명생활중이던 남편에게 인도했다. 후안 페론 대통령이 1974년 재임중 죽자, 페론 대통령의 뒤를 이은 이사벨 페론은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을 목적으로 에바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여 대통령궁 납골당에 안치된 페론 전 대통령 옆에 안치시켰다. 그러나 2년 후 페론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신(新)군사혁명위원회가 유해들을 대통령궁 납골당에서 제거해버렸다. 결국 그녀의 유해는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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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페론주의자


페론주의자
── 主義者
Peronist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지지자 또는 페론이 신봉한 인민민족주의 정치노선의 추종자로서 민족정의운동(Movimiento Nacionalista Justicialista)의 당원.
페론주의는 1940년대 중반부터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이 운동은 1943년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후 아르헨티나 노동장관이 된 후안 페론 대령을 개인적으로 추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노동장관직을 수행하면서 페론은 그 당시 성장하고 있던 도시산업노동자계급에게 도움이 될 만한 각종 사회정책을 입법화했다. 페론은 1946년 이들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강력한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또한 페론은 수많은 중하류층 시민과 전국의 실업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1955년 군부가 페론 정부를 전복하고 페론을 추방하자 지도자가 없어진 페론주의 운동은 분파간의 알력으로 약화되었는데, 이는 페론주의자들의 구성 자체가 좌익의 노동조합운동가로부터 우익의 권위주의적인 민족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질적인 세력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아르헨티나에서 정권획득을 위해 경쟁하는 주요 민간인 정치가들을 낳는 산실이 되었다.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1973년 총선을 실시하자 페론주의자들은 민족정의운동이라는 새로운 이름하에 정권을 다시 장악했다. 페론은 망명지에서 돌아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974년 페론이 죽은 후 우익 페론주의자들과 좌익 페론주의자들 간의 골 깊은 반목은 테러와 폭력으로 분출되었으며, 페론 대통령의 승계인이자 미망인이었던 이사벨 페론의 정부는 1976년 군부에 의해 전복되었다. 페론주의자들은 1983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으나 1989년 선거에서는 자신들이 후보로 내세운 카를로스 사울 메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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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아르헨티나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식민지로 출발해서 독립을 이루었다. 비옥한 토지로 비약적인 낙농업 발전을 이룩했으나, 경제 구조상 외국의 의존도가 심해서, 세계 경제의 부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군부의 쿠데타와 군부 통치가 여러 차례 지속되었다.

<본문>
*여자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니까...... 난 여자가 되고 싶어. (31)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혁명이고, 감각적인 기쁨 같은 것은 부차적인 것이야. 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아니 아마도 내 일생 동안 계속될 투쟁을 하면서 감각적인 기쁨을 느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야. (43)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사람이 정을 붙이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은 참 이상한 현상이야...... 그건...... 마치 우리의 정신이 쉴새없이 그런 감정을 분비해 내는 것 같아. (62)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넌 믿지 않겠지만...... 내가 이렇게 화낸 것은 나치 선전물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하지만 난 이 영화가 잘 만들어졌기에 좋아하는 거야. 그런 것과는 별개로 이건 하나의 예술 작품이야. (82)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나치 선전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미치지 않으려면, 이것처럼 멋진 일을 생각하는 것 빼놓고는 할 일이 없잖아, 그렇지 않아?...... (109)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무신론자들이 항상 하느님은 더 들먹거린단 말이야. (110)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저놈<발렌틴-인용자>이 한마디라도 허튼 소리를 하면, 난 저 개새끼를 죽여버리고 말 거야. 저놈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까? 마음이 괴로워서 죽는다는 뜻을 알까? 저놈은 엄마가 갈수록 더 심하게 아픈 데 대해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144) [몰리나의 상념]
*가끔식 말 한마디로 영원히 다른 사람을 정복하는데, 그런 말들이 뭘까? . . . . 때로는 한 마디의 말이 기적을 낳곤 한다. (145) [몰리나의 상념]
*내가 정말로 편지를 받고 싶은 사람은...... 그리고 이 순간에 내 곁에 있다면 내가 꼭 안아주고 싶은 사람은...... 내 여자 동료가 아니라 전에 네게 말했던...... 바로 그 여자야. (194)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발렌틴은 지금 서로 사랑하는 동지가 아니라 마르타라는 옛애인을 더욱 그리워하고 있다.]
*억압의 변형으로 프로이트는 <승화>라는 용어를 도입하는데, 이 개념은 불필요한 리비도적 충동을 다른 쪽으로 전환하는 정신 작용으로 이해될 수 있다. 승화로 이르는 길은 우리 사회의 규범 속에서 과다한 성적 에너지를 예술, 스포츠, 노동과 같은 행위에 사용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억압과 승화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승화는 문명화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건전한 요소라고 보고 있다. (219) [주7]
*마르타, 난 아직 조금은 더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 상처에...... 꿀을 조금이라도 발라달라고 할 수 있는 권리도...... (236) [발렌틴이 몰리나에게 마르타에게 보낼 편지를 구술하고 있음]
*난 아프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거야. 내가 죽을 지도 모르고......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날지 모르며, 내 인생이 이 조그만 감방 안에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 너무 겁나. 이런 것은 너무 불공평해. 난 항상 관대했고, 그 누구도 착취한 적도 없으며...... 세상을 이해하게 된 후부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착취에 대항해 투쟁해 왔어...... (237) [계속]
*“발렌틴...... 넌 항상 모든 것에 이유를 달려고 해...... 너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될 대로 되라는 식은 싫어서 그럴 거야...... 난 항상 만사가 어째서 그런지 알고 싶거든. (287) [몰리나와 발렌틴의 대화]
*“내가 혼자 침대에 있더라도, 네가 되는 것도 아니야. 난 여자도 남자도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거야. 하지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느낌......” (310) [몰리나/발렌틴]
*정말 내 유일한 소원은 죽는 거야. (311)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발렌틴, 너와 우리 엄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야. (344)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피고가 사전에 은행구좌에서 예금을 인출한 것은 자신에게 어떤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보여짐. 또한 자신이 감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감시 요원들이 극좌파들과의 접촉 도중에 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획을 수행한 것은 1) 극좌파들과 함께 도망을 가거나 2) 극좌파들이 자신을 제거할 것을 각오했다는 두 가지 이유 중 한 쪽이라고 생각됨. (360) [몰리나의 죽음에 대한 당국의 보고서]
*<내가 당신 마음 속에 살아 있고, 그래서 당신과 항상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당신은 절대로 홀로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죠> (360) [발렌틴의 꿈 속에서 마르타가 하는 말]


#송병선,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간극은 존재하는가?
*현재의 지식인은 진지함과 정치성의 개념을 탈피하여, 대중문화를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 (371) [수잔 손탁의 말]
*몰리나는 기존 영화의 편집자 혹은 변형자, 또는 재창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자기가 보았던 영화임을 내새워 이런 변형을 숨기면서 발렌틴을 유혹하기 위한 매개물로 사용한다. (379)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몰리나는 마치 레니가 나치의 대의명분을 위해 희생된 것처럼 죽게 된다. 발렌틴은 가사(假死) 상태에서 이런 몰리나를 <영화의 여주인공이 죽은 것처럼 그도 그렇게 죽었어>라고 평을 한다. (381)
*몰리나는 사랑에는 성이 없다는 이상주의자인데, 그는 영화 속의 노인처럼 육체적 사랑이 아닌 영혼의 사랑만이 참다운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몰리나는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라는 영화의 한 대목처럼, 발렌틴과의 사랑의 나눈 후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383)
*이 각주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독자들에게 성의 역할은 역사적, 사회적 규범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동성애에 관한 전망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각주들은 과학적 담론도 매우 상이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것들은 허구적 텍스트에 통합되면서 과학적 담론 역시 허구적 담론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391)

#김현창, 마누엘 뿌익, 중남미 문학사, 민음사
*중남미의 붐소설이 1920-30년대의 리얼리즘 소설이 갖는 단선적인 소설구조를 깨뜨렸다면, 60년대 말부터 주로 글을 쓰기 시작한 붐 후세대 boom junior의 소설은 형식에 대한 앞세대의 혁신을 심화함으로써, 소설 장르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뿌익은 붐 후세대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 주는 대표적 작가로서 작품의 두드러진 대중문화성으로 인해 특히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그가 대중문화를 선호했던 것은 작가적 실험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생애와 더 연관되어 있다. (547)
*뿌익에게서 이러한 대중문화의 문학화는 형식적 실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뿌익 자신이 현대를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심으로 삼은 성의 억압이라는 주제에 결부되어 있다. 즉 중남미 남성우월주의와 나아가 남성성/여성성이라는 이분법적 성 이데올로기에 억눌린 인물들을 통해, 성을 둘러싼 인류의 관습과 유형, 무형의 제도들을 문제화하는데, 작가는 이러한 성적 억압현상이 헐리우드식 영화나 멜로드라마가 최상의 가치인 양 제공하는 <사랑>이라는 것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548)
*뿌익의 소설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거미여인의 입맞춤]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계속적으로 연극 및 뮤지컬로 무대로 올려지고 있다. 이 작품은 몰리나라는 동성애자와 좌익 게릴라인 발렌띤이 대립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거의 전적으로 이들 사이의 대화에 의해 소설이 전개된다. 이들은 같은 감방에 수감되어 있고, 감옥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몰리나가 자신이 관람했던 영화들을 발렌띤에게 들려주는 동안에 두 죄수 사이에 관계가 진전되어 간다. 처음에, 몰리나는 영화는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발렌띤에게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하찮은 대중문화의 일종이고 동시에 인간을 비정치적이게 하는 세뇌와 마비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진보적인 남성임을 자만하면서, 몰리나를 싸구려 감정에 매달리는 여자 같다고 경멸하던 발렌띤은 몰리나에게서 인간의 진정한 애정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의 진전은 소설의 역동성을 마련해 주는데, 그 관계의 절정은 소설 후반에 이루어지는 두 인물간의 성애에서 완성된다.
작가는 이런 구도를 통해 동성애를 하나의 성도착증으로 터부시해 온 기존관념과, 여성과 남성을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비로 가둬두는 성 이데올로기를 문제삼고 있다. 소설 처음에는 몰리나와 발렌띤이 각각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표하는 듯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이해와 애정이 싹트고 결국 성적인 합일에까지 이르게 되면서는 작가의 의도는 오히려 그러한 관념들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데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뿌익은 이러한 의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들의 성에 대한 이론과 반론들을 각주의 형태로 제시하는데, 독자는 각주로 나타난 학문적 텍스트와 인물 사이의 대화로 나타난 허구 텍스트를 계속적으로 대비하고 비교함으로써 능동적 역할을 증대시키게 된다. (551-2)

<감상> [초고]
미국과 유럽 중심의 문화 편중으로, 현대 남미 문학이 마르케스, 보르헤스, 네루다, 빠스 같은 걸출한 작가들을 배출해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밖의 작가들은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찾아 읽으려는 노력의 부족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 읽은, 보르헤스와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마누엘 푸익도 처음 접하는 작가일 뿐 아니라, 이 작품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문학 작품의 이해를 위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그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는 문화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과 동성애자, 이 두 주인공의 대화로 거의 이루어져 있는데, 동성연애자에 대한 일반의 편견이나, 또 그가 당해야 하는 고통은 보편적인 것으로 문화적인 이해 없이도 쉽사리 수용이 되지만, 정치범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은 이 당시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제3세계 국가들이 흔히 그렇듯, 독재 권력이 국민을 억압하고 있는 상황이었는가? 우리 나라의 70년대처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도 게릴라 활동으로 체포된 정치범 발렌틴을,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우리 나라의 민주 투사들로 쉽사리 치환되지는 않는다. 이 부분의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는데, 쉽게 말해서, 그것은 정치에 있어서의 억압과 투쟁이, 동성애자의 억압과 투쟁처럼, 보편적 정황은 아니기 때문이리라. 대체로 억압하는 쪽에 문제가 있으리라고 짐작은 가지만, 그것이 실감 있는 무게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이해와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내가 대충 파악한 바로는 국내 경제 및 정치 상황의 불안으로 군부 구데타가 여러 번 있었다. 몰리나와 발렌틴이 수감되어 있는 1975년은 페론이 재집권했다가 죽고,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감상> (0823)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은 아직도 글쓰기가 나의 혈관 깊은 곳에 인이 박히지 않았고, 내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글은 그 특성상 고쳐쓸 수 있기 때문에, 단번에 완성하려고 하지 말고, 개고나 삼고를 통해 초고에서 제대로 살리지 못한 부분을 새롭게 펼쳐보일 수가 있다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번 글은 재독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생각을 문장과 문체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펼쳐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마누엘 푸익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역시 미국과 유럽 문화에 대한 편중으로, 여타 제3세계의 문화나 작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사실이었다. 남미의 문학은 마르케스, 보르헤스, 네루다, 빠스 등의 걸출한 문학가들을 배출해 내었지만, 나의 남미 문학에 대한 이해는 그 정도에서 그친다. 이것은 내 자신의 노력의 부족이면서 동시에, 우리 문화가 모든 면에서 미국과 유럽에 편중되어 있는 탓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아르헨티나의 정치나 역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축구의 강국이라는 이미지 외에 아르헨티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전무한 셈이었다.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또 독후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아르헨티나에 관해 읽은 것이, 수박 겉핥기도 그런 겉핥기는 없을 것이나, 아르헨티나를 이해하는 첫 발걸음은 된 셈이다. 한 나라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그것이 소설이든, 영화든, 다큐멘터리든--그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증가된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보면서, 이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또 그 영화를 통해서 이란이라는 나라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 좋은 예이리라.
내가 겉핥기로 가지고 있는 지식 속의 아르헨티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미 여러 나라들이 그렇듯이, 정치 및 경제적인 불안이 심했으며, 특히 군부의 구데타가 빈발했던 그런 나라이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70년대 초반은 [페론주의]를 주창한 페론이 재집권하였다가 죽고, 그의 아내가 대통령을 승계한 그런 상황이다. (이번에 아르헨티나에 대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나마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아르헨티나에 있어서의 페론과 페론주의의 엄청난 영향력이다. 페론은 구데타를 통해 집권을 하고, 또 구데타에 의해 정권에서 물러나기도 했지만, 그가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에 미친 영향은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과 비교해 볼 만할 것이다. 페론주의는 좌익과 우익 성향의 인물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며, 기본적으로는 노동자들의 당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의 이야기는 대충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푸익의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최대의 매력은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 이 소설은 과연 그간의 주목에 갚할 만큼 훌륭한 작품인가?
우선 이 소설의 특징들을 몇 가지 짚어보자. 첫째, 이 소설은 거의 전체가 두 사람의 주인공, 즉 발렌틴과 몰리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두 사람의 대화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몰리나가 자신이 본 영화를 발렌틴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작품의 중요 부분이다. 번역자인 송병선은 이것을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셋째, 이 작품이 논문이기라도 한 양 각주가 달려있다. 총 9개의 이 각주 중 ‘영화를 보충하고 있는 둘째 각주를 제외하고, 나머지 8개의 각주는 심리학과 사회학적 관점에서 살펴본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담론이다.’(송병선, 작품 해설, 390)
아직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느낀 것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들이, 의식*무의식적으로 몰리나가 발렌틴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몰리나와 발렌틴의 심리 상태는 영화의 내용과 맞물리는 그런 구조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의 구조는 정의를 추구하는 좌익 게릴라인 발렌틴이 미성년자와 관계를 가진 혐의로 구속된 동성애자 몰리나--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을 추구하는 삼십 대 후반--이 두 사람이 감옥에서 같이 수감 생활을 해나가면서 서로 가까워 지고, 서로 이해하게 되며,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더 큰 변화를 겪는 것은 발렌틴으로 보인다. 그리고, 몰리나는 자신이 추구하던 진정한 사랑을 성취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 (영화의 내용이나, 이 두 사람의 관계의 변화 등을 재독에서는 좀더 꼼꼼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의 이해를 위해서는 역시 그 배경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사실로 보여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영화나, 대중 가요 등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상태에서의 작품에 대한 감동이나 이해는, 그러한 이해를 가지고 볼 때의 감동이나 이해와는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우리가 우리 세대의 문학을 읽을 때의 교감을 이 작품에서 기대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그 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것이, 문화 전반에 대한 보편적 지식과 상상력이리라. 그럼
에도. . . .





최재봉 -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고
2001.4.17

뉴스메일 익스프레스의 독자들 중에는 제가 읽은 책에 대해 글을 올려달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문학담당 기자로 있으면서 가장 자주 듣는 질문 중의 하나는 요즘 읽은 책 중에서 권할 만한 게 무어냐는 것이기도 하지요. 제가 맡고 있는 문학 쪽 책들 중 읽을 만한 신간에 대해서는 대체로 신문에 실린 제 기사를 참조하면 될 것이라고 대답하고는 하죠.
문학 책이지만 신간이 아닌 것, 그리고 문학과 직접 관련이 없는 책들 중에서 제가 흥미롭게 읽은 책들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글을 올려 보겠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마누엘 푸익의 장편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입니다. 제가 읽은 것은 송병선씨 번역으로 2000년 6월 민음사에서 나온 책입니다.
마누엘 푸익(1932~90)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작가입니다. 유럽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실제로 조감독 일도 하다가 뉴욕 등지를 거쳐 1974년 무렵부터 멕시코에 정착해 소설을 씁니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1976년작이죠.

이 소설은,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동성애와 혁명의 문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동성애자인 몰리나와 혁명가인 발렌틴이 감옥의 같은 감방에서 생활하게 되죠. 사실은 형무소 소장이 몰리나로 하여금 발렌틴에게 접근해 그의 조직원들에 관한 정보를 캐내도록 사주한 것입니다.

소설은 우선 형식적으로 아주 독특합니다. 아무런 배경 설명이나 지문이 없이 대사만으로 소설 전체가 진행됩니다. 독자 쪽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흐름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게다가 소설의 많은 부분이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들은 작가에 의해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에 직·간접적으로 대응하도록 주도면밀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몰리나와 발렌틴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인물들입니다. 몰리나가 여성적이라면(몰리나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자입니다;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할 때 '그'가 아니라 '그녀'라 부르는 데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발렌틴은 남성적입니다. 몰리나는 개인의 사랑과 자유와 행복을 중요시하는 데 반해, 발렌틴은 사회 혁명을 위해 개인적 행복을 희생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몰리나는 감성적이고 발렌틴은 이성적입니다.

몰리나는 처음부터 발렌틴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지니고 있지만, 발렌틴은 아마도 몰리나를 혐오하지 않으면 꺼림칙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소설은 발렌틴이 자신을 향한 몰리나의 사랑을 결국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이기도 한 사랑을 말이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과정을 시시콜콜히 말씀드리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구요. 다만, 저는 그 과정에서 표방되는 이타주의와 실천하는 이타주의, 혹은 추상적인 이타주의와 구체적인 이타주의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보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치하는 놈들은 모두 도둑놈들이야"라는 몰리나의 말에 대해 발렌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해.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왜곡된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야. 책임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굶주려 죽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야. 그래서 난 투쟁을 하는 거야."

그에 대한 몰리나의 대꾸: "빌어먹을 놈. 무력투쟁의 희생자, 그게 바로 너란 말이야."

이처럼 두 사람의 견해는 팽팽하게 맞섭니다. 몰리나는 비(또는 반)정치적인 반면, 발렌틴은 매우 정치적입니다. 발렌틴이 굶주려 죽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타주의) 때문에 투쟁을 택한 반면, 몰리나는 그런 발렌틴을 한갓 (중립적인 또는 몰가치적인) 무력투쟁의 희생자로 간주하고 있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설 속에서, 아니 감방이라는 갇힌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행태는 그들이 표방하는 바와 사실상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몰리나가 발렌틴을 배려하고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면모가 두드러지는 반면, 발렌틴은 받기만 할 뿐 몰리나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몰리나가 발렌틴을 사랑하는 데 반해 발렌틴에게는 몰리나를 향한 애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또, 발렌틴이 형무소 쪽의 악랄한 음모 때문에 몰리나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심신이 피폐해진다는 사실 또한 고려해야 할 겝니다. 그러나 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발렌틴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몰리나의 모습은 그의 이타적 사랑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듭니다.

저는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논점을 읽었습니다. 발렌틴으로 대표되는 이타적 사회운동가에게 모종의 맹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 말이죠.
발렌틴의 공식적 애인은 그와 같은 취지의 활동을 하는 혁명가입니다. 발렌틴에 따르면 그들은 "서로 깊은 애정을 느끼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행동을 해야 할 순간에 서로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기 때문이죠. 그의 말을 더 들어볼까요?:
"누군가가 우릴 사랑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절대로 할 수가 없어. 그건 우리가 살기를 원하는 것인데, 그러면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돼"

그런데 발렌틴이 정말로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습니다. 한때 그와 같은 혁명운동에 가담했다가 결국은 이탈한 부르주아 계급의 여자입니다. 다시 발렌틴의 말:
"그녀는 삶에 너무 집착했어. 나와 함께 있으면 행복했고, 우리들의 관계로만 충분했어. 거기서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어. 내가 며칠 동안만 없어도 고통을 받았고, 내가 돌아올 때마다 울었어. 그런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내게 걸려온 동지들의 전화를 숨기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편지까지도 몰래 가로채게 되었어. 그래서 끝이 난 거야."

이 대목을 읽으면서 지나간 80년대를 떠올리는 독자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 시대는 사랑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때였죠. 아니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금기시할 정도로, '변혁'을 위해 '사랑'을 희생하도록 강요받았던 때입니다. 바깥이나 위의 누군가가 있어서 강요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내부에 그런 금욕적 정치성을 강요하는 요소가 들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발렌틴을 비겁한 위선자라고 질타해야 옳겠습니까. 오히려 그가 스스로를 옥죄고 있던 공동체적 당위의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개인적 사랑의 가치를 발견한 사실을 축하해야 하지 않을까요(이런 발언이 혹시라도 개인적 행복과,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바쳐 가며 민주와 자유를 위해 싸운 이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결국 제가 읽은 <거미여인의 키스>는 동성애에 관한 소설이라기보다는 개인과 사회, 사랑과 혁명의 함수관계를 다룬 작품입니다. 특히 정치적 당위가 놓치거나 억압하기 쉬운 개인적 자유와 사랑의 가치를 옹호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소설에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 중요한 논점들이 있습니다. 가령 (B급) 영화 이야기의 동원이라는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을 통해서는 소설에서의 대중문화의 활용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고, 몰리나가 나치 선전영화를 감동적으로 기술하는 데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이라는 기준과 예술적 완성도의 관계(가령 미당의 친일·친독재와 그의 문학적 성취 사이의 관계 같은 것 말이죠)에 대해 다시금 따져 볼 수 있겠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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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


<참고>


유하, 거미 여인의 키스



나방이 날아간다 불빛의 퇴폐를 향하여
날개의 상투성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거미 여인의 키스, 저 죽음과 바꾸고 싶은!
더 이상은 자기 육체가 아닌 곳으로
내려가고 싶다, 악수하라 몸의 빗장 밖에 서 있는
매혹의 악령이여, 나방이 날아오고
관능의 침묵 끝에 매달려 거미 여인이 웃는다
긴 독사 혀의 외줄을 타고 삶의 절정을 맛보듯
죽음을 위반하세요, 당신은 아주 즐겁게
파먹힐 거예요 은빛 그물은 광기의 그리움,
생이 엎질러진 곳에 생이 있어요, 그의 광기가
마침내 중독된 삶의 권태를 살해하리라
거미 여인의 날카로운 키스여, 나방이 날아간다
일상의 어둠 저편으로 날개의 족쇄를 내던지며,
식욕의 殺意가 빚어낸 저 황홀한 무늬의 퇴폐,
끈끈한 덫의 은빛 유혹 속으로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


1. 대중문화와의 관계, 특히 영화
2. 성의 억압
3. 대화:<고도를 기다리며>
4. 아르헨티나의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