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호, 사람됨의 뜻, 제일출판사(100129-30)
[단상]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가에 대한 철학적인 답변서라고 할 수 있는 이규호의 이 책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출발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이 고대 그리스 이래로 ‘이성적인 존재’를 지향해 왔지만 --그 극점은 데카르트에서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라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쇼펜하우어의 등장 이후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심하게 타격을 받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쇼펜하우어, 니체로 이어지는 철학의 흐름에서는 ‘이성보다 인간의 근본의지’가 강조되고 있다. 마르크스 같은 경우에는 ‘한 개인의 계급적 위치가 그의 의식 혹은 이성을 규정짓는다’고 못 박고 있다(다른 한편으로 야스퍼스는 이성이 무엇인지 정확히 규명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의 흐름은 급기야 프로이트에 이르러서는 ‘리비도’라는 욕동에 중점을 두는 이론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결단을 강조하지만, 이규호가 지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잘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결단을 내릴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인간이 생각만큼 그렇게 자유롭지 않은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단적인 예로 내가 지금 한국어로 이 글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어의 틀에 따라 내가 사고를 한다는 것이고, 그 틀은 내가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크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명백하다.
현대에 와서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어떤 확실한 근거, 이성이나 의지, 이런 것의 토대 위에서 파악하려 하기보다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불확실한 대로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취사선택하면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규호의 인용에 따르면 ‘우리의 앎 곧 인식 작용에 있어서 이성과 정서가 서로 협동한다는 것은 막쓰 셸라 Max Scheler의 연구에 의해서 이제는 공인된 주장이다(63).’
이 글은 60년대에 쓴 것이지만, 이규호가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장하는 바는 지금 현재에도 대단한 중요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는 인간은 거의 완전하게 조종당하고 있고 철두철미 수단으로 이용당하고 있다(172)’는 이 말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 와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인간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물질주의’에 경도된 우리의 삶의 불균형을 우리 모두가 해소하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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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차원에서 관찰하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삶의 존재이다. (14)
-쇼펜하우어 이후 많은 현대철학자들이 사람의 의지를 이성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31)
-희랍사람들에 의하면 사람의 이성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형이상학적인 기관이었는데, 이미 중세 철학자들은 사람의 이성을 완전한 형이상학적 기관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의 비밀은 이성만으로는 알 수 없고 믿음에 의해서 완전히 밝혀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몽주의에 의하면 사람의 이성은 전연 형이상학적 기관이 아니고 우리의 감각과 불가분으로 협동해서 이 현실의 세계를 알려 주는 기관이다. (33)
-그[헤겔[에 이하면 사람의 본질뿐만 아니라 우주의 본질이 이성이다. (36)
-니이체에 의하면 사람은 인식을 위한 이성적 존재가 아니고 삶을 위한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이다. 삶은 어떤 초월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삶 자신의 목적이다. (46)
-야스퍼스: 이성은 어떤 고정적인 존재가 아니고 늘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언제나 이미 이룩한 위치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고정적인 사상의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생각을 앞으로 이끌고 간다. 그러면서도 이성은 또한 스스로를 비판하기 때문에 앎의 한계선을 깨닫는다. (61)
-우리의 앎 곧 인식 작용에 있어서 이성과 정서가 서로 협동한다는 것은 막쓰 셸라 Max Scheler의 연구에 의해서 이제는 공인된 주장이다. (63)
-사람에게 있어서는 실존에 앞서는 불변의 본질은 없다고 싸르뜨르는 주장한다. 사람은 먼저 존재하고 있고, 그 다음에 그가 무엇으로 자기 자신을 이룩하느냐는 문제가 따른다. (94)
-사람들은 그들이 그 속에 살고 있는 이 삶의 지평을 의식하지 못하며 그것을 앎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못한다. 그것은 마치 우물 속에 사는 고기가 우물을 의식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로는 말한다. (115)
-사람도 삶도 역사도 사실에 있어서 하나의 밑받침 없는 무의 표현들이며, 거기에서 하나의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과제로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의미가 없는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뜻이다. (119)
-렛싱 Theodor Lessing ; 의미 없는 것의 의미 창조로의 역사 (119)
-마르셀: 하나님은 보편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존재는 아니다. 하나님은 믿음성 있는 삶, 곧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현실이며, 따라서 믿음성 있는 삶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129)
-교육: 만들다-기르다-만나다 (143)
-포이엘밧하 ; 인간의 본질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다. (149)
-칼 야스파스에 의하면 기원전 5세기가 인류역사를 위한 주축시대라고 한다. 소크라테스와 공자와 석가가 출생한 세기이다. 그들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원리가 문화적인 전승 속에 주어진 것 같다. (164)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는 인간은 거의 완전하게 조종당하고 있고 철두철미 수단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172)
-아도루노는 경제적인 생산력의 향상이 일면에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해 주지만, 다른 면에서는 기술적인 체제와 이를 장악한 집단에게 우월한 능력을 부여해서 대중을 지배하게 만든다고 했다.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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