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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데카르트, [방법서설], 최명관, 서광사(0907280)

by 길철현 2016. 12. 16.

*데카르트, [방법서설], 최명관, 서광사(0907280


<단상>

몇 년 전이었는지, 아마도 십 년도 더 전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더 이전, 한 이십 년 전쯤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 때 나는 데카르트의 <정신지도를 위한 제규칙>(김형효, 삼성)을 몇 페이지 읽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역시 철학은 어려워, 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에 또 어디선가, 김우창이 고등학교 때 <방법서설>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뛰어난 인물은 역시 달라라는 찬탄 반 체념 반이 섞인 말을 뱉어내었다.

그러나, 우연찮은 기회에 접하게 된 이 50페이지가 약간 넘는 이 글은 보통 사람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쉬운 글이고, 또 그 다루고 있는 내용 자체도 지금은 대단히 상식적이며, 상당 부분 인간의 인지과학이 발달하면서, 오류라고 드러난 것이다. Cogito ergo sum, 이라고 외치는 데카르트의 목소리는 웨스트팔에 의해 보기 좋게 부인되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돌이켜보면 근대과학 기술이 막 발달하던 시대에 인간 이성에 대한 경배의 감정이 반영된 직관적인 토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내내 데카르트는 나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이성의 뛰어남을 찬양할 줄만 알았지, 그 이성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 근거는 확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성찰>에서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데에서는 그 비웃음이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은 다시 데카르트의 철저하고자 했던 마음, 초심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확실한 근거에서 출발하고자 하는 마음, 비록 그것이 결론적으로는 도로이고 착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자체는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데에서 그쳐지고, 그로 인해 철학으로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열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언어자체에 대한 이해가 들어 있다


[발췌]

(19) 첫째는 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안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게 또 아주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내 판단 속에 넣지 않을 것.

둘째는 내가 검토할 난제의 하나하나를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소부분으로 나눌 것.

세째는 내 생각들을 순서를 따라 이끌어 나아가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위로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들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자연대로는 피차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간에도 순서가 있는 듯이 단정하고 나아갈 것.

그리고 끝으로, 하나도 빠뜨리지 ㅇ낳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매거와 전체에 걸친 통관을 어디서나 행할 것.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오래 전부터 실생활에 있어서는, 매우 불확실한 것임을 알고 있는 의견들을 마치 그것들이 의심할 것이 아닌 양 따르는 것이 가끔 필요함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오로지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와 아주 반대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절대로 거짓된 것으로서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지 않을는지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우리의 감각이 때때로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감각이 우리의 마음 속에 그려 주는 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상정하려 하였다. 그리고 기하학의 가장 단순한 문제에 관해서도 추리를 잘못하여 여러 가지 오류 추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나도 다른 누구 못지않게 잘못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서, 내가 전에 논증으로 보았던 모든 추리를 잘못된 것으로서 버렸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 가지는 모든 생각과 똑같은 것이 우리가 잠들고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 나타나는데, 이때 참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생각하고서 나는 여태껏 정신 속에 들어온 모든 것이 내 꿈의 환상보다 더 참되지 못하다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금방 그 뒤에 그렇게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동안도,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하여, 회의론자들의 제아무리 터무니없는 상정들을 모두 합치더라도 이것을 흔들어 놓을 수 없음을 주목하고서, 나는 주저없이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30)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술의 진리를 의심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이 진술의 각 낱말들의 의미를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가정되어 있지 않을까? 기억이 과거에 그를 속인 적이 있다면, 그 기억이 여기서도 그를 잘못 이끌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점을 정곡으로 찌른 사람은 니체다.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를 볼 것]

*여기서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요, 그 본질 내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요, 또 존재하기 위하야 아무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이 <>, 즉 나를 나 되게 하는 정신은 신체와 전혀 다른 것이요, 또 신체보다 인식하기가 더 쉬우며, 설사 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온전히 스스로를 보전하는 것이다. (30)

*나는 내가 지금까지 배운 적은 것이 내가 모르는 것에 비하면 거의 아무것도 아니요, 또 배울 수 있다는 데 대해서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사람들이 알아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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