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존 밀턴을 배울 때, 그 중에서도 [실낙원]을 읽을 때 무엇보다도 영어가 어려워서 고생을 많이 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 밖에 두어 가지 사실도 함께 따라온다. 우선 다른 가능성, 그러니까 기독교 밖에서 답을 찾을 가능성을 배제한 채 기독교 내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데에서 오는 답답함 - 그것은 존 밀턴과 나의 시대적 * 환경적 차이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혹은 하느님)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탄에 대한 연민이다. 밀턴은 사탄을 평면적인 악한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흡사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내면을 지닌 존재로, 바꿔 말해 '비극의 주인공'으로 조명하는 면도 있기 때문에, 블레이크를 필두로 한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들은 [실낙원]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반란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적자라는 것,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권력 서열에서 자신이 밀렸다는 질투심에서 촉발된 것인데 - 밀턴의 기독교관은 삼위일체설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최고의 위치에 놓는 [유니테리어니즘]과 비슷한 면이 있어서 정통 기독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단적이다 - 우리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 존재로서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인간과 달리 '구원의 가능성'으로부터 배제된 존재라는 점에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곁가지적으로 흥미로웠던 사실 중 하나는 사탄이 하나님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에 동조한 천사의 무리가 삼분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선한 존재로 알려져 있는 천사들 중에도 '불만 세력'은 우리 인간 세계와 마찬가지로 많이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 밀턴의 서사시에는 연극의 독백처럼 사탄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장면도 있는데, 그 때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쪽으로 날아가든 그곳이 지옥이지. 내 자신이 지옥이니."(Which way I flie is Hell; my self am Hell) 사탄은 인간이 아니기에 곧바로 인간의 마음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자신의 마음이 지옥인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얼마나 저주스러울까? 지옥을 없애는 것은 자신을 없애는 것이기에 지옥을 안고 살자니 그 뜨거움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그래도 자신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지옥이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자기 인식'은 확보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몇 년전에 나는 이 구절을 로버트 로월이라는 미국 시인의 [스컹크 시간]이라는 시에서 다시 한 번 접하게 되었다. 인간의 깊은 내면의 병적이고 아픈 부분을 토로했던 "고백파 시인"의 선두 주자였던 그는 자신의 아픈 마음을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적실하게 표현을 했다.
나는 듣는다,
핏방울 하나하나 마다 내 병든 영혼이 흐느끼는 소리를
내 손이 그것의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한 듯. . . .
내 자신이 지옥이다,
여기엔 아무도 없다--
I hear
my ill-spirit sob in each blood cell,
as if my hands were at its throat. . . .
I myself am hell,
nobody's here--
고백파의 몇몇 시인들은 자신의 지옥을 견디지 못하고 시간보다 앞서 자신의 그 뜨거운 불꽃을 꺼트리고 말았는데, 로버트 로월은 그래도 60대까지 살았다.
어제는 내 마음도 속절없이 아파 집앞에서 공항 버스를 타고 영종도 앞에 있는 신도라는 섬으로 갔다. 겨울답지 않게 날씨는 포근하고 또 우라지게 맑았다. 그리고 바다 위에서 아낌없이 빛나던 그 찬연한 햇살, 어쩌면 그 햇살의 눈부심이 나에겐 이 삶을 견디는 힘이 되었던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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