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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밖의영상들

춘몽 - 장률 (170202 VOD)

by 길철현 2017. 2. 3.


어제는 갑자기 만사가 귀찮아지고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력증이 다시 찾아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급습하는 가운데, 영화나 한 편 보자고 VOD 목록을 살피다가, 장률 감독이 또 영화를 한 편 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상당히 큰 내홍이 있었던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이 되었다는군요).


장률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그 보다는 그의 영화 [경주]에 매료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우울한 심사(?)를 달래려 춘천까지 갔다가 개봉일에 보게 된 그 영화 - 개봉일인데도 관객은 저를 제외하고 두 명뿐이었습니다 -에 반해 저는 그 영화를 이곳저곳 상영관을 옮겨가며 - 관객은 언제나 네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고, 가장 많았던 곳은 [상봉 메가박스]였는데 그 때도 열 명을 넘지는 않았지요 - 나중에는 다운까지 받아서 열 번도 넘게 보았습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서 '경주'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답니다.


그 영화엔 뭔가 나에게 울림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글로 옮기는 작업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좀 시각을 바꿔 말하자면 글로 옮기는 순간 그 '뭔가'가 날아가버리고 말 것같아 계속 지연책을 쓴 것인지도, 그러면서 즐긴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흥미로웠던 것은 직접 경주에 가서 경주를 몇 바퀴 돌자, 영화 속에 나왔던 곳들을 대부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신라의 수도로 유서 깊은 곳이지만 정작 '경주' 시내는 그렇게 크거나 분주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나면 한 번 이 영화에 대해 써보고 싶습니다.


그 뒤로 그의 영화들을 몇 편 더 찾아보았는데, 두만강 인근에 사는 조선족과 탈북민을 다룬 [두만강]은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다룬 영화로 마지막 장면이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이었고, 소설의 소재로 될만큼 우리 현대사의 큰 사고 중의 하나였던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건의 현장인 이리(현재의 익산)를 영화 제목으로 쓴 작품도 다소 지루하면서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또 외국인 노동자들의 꿈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인 [풍경]도 지루한 대로 흥미로운 부분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2015년에 나온 [필름 시대 사랑]은 '영화의 본질은 이미지'라는 본인의 말에 충실하려는 듯, 앞부분을 제외하고는 온통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어서 영화 상영 시간이 짧았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이번에 나온 이 작품 [춘몽]은 전작이 너무 많이 나가버린 것에 대한 반대급부인 듯 상당히 친절하고 코믹하고 그래서 큰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감독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인 상암 DMC(디지털미디어시티)의 반대편(그러니까 수색역 건너편)의 주택가를 주 무대로 하여 중국에서 온 한 젊은 여인과, 이 여인을 좋아하는 세 명의 남자(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 이 남자들도 약간씩은 결함이 있는 그런 사람들인데요. 이 세 배우는 실제로는 영화감독들이라고 하는군요. [똥파리]에서 주연과 감독을 맡은 양익준은 낯이 익더군요)와 좀 더 나이가 어린 여자아이, 그리고 뇌졸중인지로 거의 식물인간 상태인 젊은 여인의 아버지 이렇게 여섯 명이 엮어가는 일상을 다소 캐리커쳐 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든 아버지를 수발하며 [고향] 주막이라는 허름한 주점을 운영하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또 안수길의 [북간도]를 읽을 정도로 나름 교양을 지닌 여인인 예리를 중심으로 이들이 엮어나가는 일상은 보잘 것 없고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봄바람 속에 피어나는 이름모를 꽃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입니다. 예리가 점을 보는 장면이나, 밀린 월급을 받아낸 탈북자 정범이 한턱을 낸 끝에 찾게 되는 노래방, 출입이 금지된 변전소(아마도)에 들어가는 장면들은 영화 [경주]에서의 장면들과 오버랩되면서, 장률 감독의 현실 경험이나 상상력의 폭 좁음 그게 아니라면 그가 애착을 갖는 부분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리의 죽음까지 흑백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그 단조로운 색상이 오히려 작품 속의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생각도 들고, 전체적으로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것, 혹은 지나가 버린 어떤 것에 대한 상실감 내지는 향수 등의 정조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삶을 살아가는 윤리 의식 같은 것도 동시에 짚어보고 있었습니다(아버지를 버리거나 죽이고 싶은 예리의 마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범죄를 꿈꾸고 있는 익준에게 '나쁜 짓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장면 등).


이와 연관해서 예리라는 여인은 - 좀 비약이긴 하지만 -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물'(Thing)의 위치에 있는 인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중세 유럽의 로맨스에 나오는 '궁정식 사랑'의 '이상화된 여성상'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이 세 남자와 나이 어린 여자 모두의 성적 대상이긴 하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는 없는 여자'(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으로 대변되는)라는 측면에서.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