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쓰는 말 중에 '심금을 울린다'라는 말이 있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경험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예술이 갖는 기능 중의 하나는 우리 마음의 거문고를 울리는 것이리라. 어떤 음악의 한 소절, 풍경이나 인물을 담은 미술 작품, 시나 소설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감동은 인간이 예술 없이는 또 살기힘들다는 것을 방증한다.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영화는 아직도 오락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그 안에 음악과, 미술과, 문학 등이 총망라된 종합 예술이고, 현재 가장 대중적인 예술 장르이므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체험을 가장 빈번하게 하게 되는 것은 영화에서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오래된 이탈리아 영화인 이 [길] 또한 언제나 나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영화이다. 처음엔 잘 의식을 하지 못했지만 영화의 제목 자체가 나의 성과 동일한 음가와 표기를 갖고 있어서 영화가 온통 나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나르시즘적인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정확하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길'이라는 말이 나에게 지니는 유혹은 그냥 나를 집어 삼킬 정도이다--물론 내 성의 길은 '좋다'는 의미이지만, '길'이라는 단어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나다니는 길'을 떠올리게 한다. 내 친구 중의 한 명은 대학 시절 나에게 보낸 엽서에다, 'To Mr. Road'라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길을 걷는다는 것, 그것도 낯선 도시, 더 나아가 외국의 낯선 도시의 낯선 길을 무작정 걷는다는 것은 나에겐 죽는 그 날까지 헤어날 수 없는 유혹일 듯하다. 그저께 저녁에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란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파리의 모습, 그 중에서도 그 거리의 모습에 흠뻑 취해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었다. 거기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길'(Gill)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잠파노(안소니 퀸)의 직업이 떠돌이 차력사인 탓에 여자 주인공과 함께 두 사람은 이탈리아 전역을 여기저기 떠돌고, 그래서 제목인 '길'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이 영화가 나를 사로잡는 부분은 그 주제가이다(이 영화를 다시 보고 쓰는 글이 아니므로 약간의 착오가 있을 수 있다. 이해해 주시기를). 니노 로타가 작곡한 이 연주곡은 '얼간이'의 바이올린 연주에서, 그리고 여주인공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의 트럼펫으로, 그 다음 젤소미나가 죽고 난 다음에는 낯선 여인의 노래에서,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남자주인공인 잠파노(안소니 퀸)가 바닷가에서 흐느끼는 장면에서 조금씩 변주되어 되풀이된다. 이 주제가는 단순히 영화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내용의 일부라는 점이 특이하다. 라라, 라라라로 시작하는 이 단순하고 애잔한 선율이 내 심금을 막무가내로 울리는 이유를 나는 잘 설명을 할 수는 없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주제곡을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다.
https://youtu.be/04rChQY2p0U (유투브에 올라온 주제가)
대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그러니까 1986년 초에 하숙집에서 학교로 가기 위해 골목기를 내려가다가 어느 집의 라디오에선가 흘러나오는 이 연주를 듣고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어떤 감정에 휩싸인 기억이 난다. 그 당시의 흥분을 글로 적어 둔 것이 있어 옮겨본다. (현재의 내 기억과는 달리 여주인공 젤소미나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했던가? 그게 아니라면 이 당시 내가 짝사랑했던 브룩 쉴즈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적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어쨌던 그 순간 그 음악은 나에게 엄청난 울림으로 다가왔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인지 글에 조리가 없다.)
젤소미나
글을 적을 필요조차 없다. 이 미친 놈아.
내 사랑하던 여인이 나타났으니.
행복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도대체 나는 글을 적으면서 기분을 죽이는 것이나 아닐까?
글이 뭐길래. 나의 이 감정을 전해주지도 못할 걸.
안소니 퀸. 그 여자.
스쳐가는 음악아. 나의 가슴은 터질 것 같다.
사랑했던 사람아.
노래야, 끝나지 마라.
그러나, 언젠간 너는 또 싫증이 나겠지.
꿈이 꿈인 채로 묻어지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리.
죽음을 앞둔 사람은
항상 행동을 조심한다.
하나 하나의 행동에 의미를 찾으려 한다.
떠나갈 세상에 하나,
듣지 말았으면 좋을까?
주제가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영화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를 처음으로 접한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영화에 감동을 느낄 정도였다면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교 1학년 정도 텔레비전 외화 방영 시간에 - 그 당시엔 비디오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 더빙으로 보았을 것이다(중후한 음색의 이치우 씨가 안소니 퀸이 나오는 영화의 더빙을 많이 맡았다. 갑자기 젤소미나 역을 맡은 여자 성우의 음성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얼핏얼핏 의식으로 산발적으로 올라온다. 어린 아이 같은, 뭔가 망설이는 듯하면서 내뱉는 말들). 그 당시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86년의 그 체험 이후로 이 영화는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영화 중의 한 편이 된 것은 틀림이 없다. 이후로 지금까지 이 영화를 서너 번은 더 본 듯하다. 우연한 기회에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전후세계문학전집]에 이 영화의 대본이 실려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읽기도 했다. 2단인데다가 글자가 깨알처럼 작은 것이긴 하지만 대본이 2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1997년도엔 대학원의 후배에게 어줍잖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자를 맡고 심한 좌절감을 느꼈을 때, 다시 '젤소미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편 썼다.
이상야릇한 몰골에
대가리는 왜 그리도 나쁜지,
그래서 요리도 못하는데,
젤소미나! 왜 태어났니? 이 세상에.
모두가 먹을 것도 없어 허덕이는데,
그래도, 그래도, 짐승 같은 잠파노나마,
곁에서 함께 있어 주어,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라도 의미가 있다는
얼간이의 말을 믿었더냐, 믿었더냐?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이라도
하느님은 아무 의미없이 만들진 않았으리라는,
그래서 죄짓지 않고, 죄짓지 않고 살아,
그 아름다운 선율로 남아,
온갖 고통과 멸시와 괴로움을 견디고.
걷는 구나, 가는 구나, 정처도 없는 길을.
시라기 보다는 당시의 내 감정을 젤소미나에게 의탁하여 나오는 대로 토로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듯한데, 이 시를 보면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다 힘 없이 죽어간 젤소미나와 나를 동일시하는 면이 두드러진다.
이 오래된 흑백 영화가 나를 이토록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이탈리아.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머리마저 나쁜 젤소미나는 떠돌이 차력사인 잠파노에게 팔려가, 조수이자 욕정을 해소하는 대상이 된다. 잠파노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둑질도 마지 않고, 급기야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안 그래도 정신이 허약한 젤소미나는 이 사건으로 정신이 더욱 흐려지고. 거기다 육체의 병까지 얻는다. 젤소미나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잠파노는 그녀를 버리고 떠나간다. 몇 년이 지난 뒤 그녀가 즐겨 연주하던 멜로디를 들은 잠파노가 그 소리를 쫓아가자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것이 간략한 영화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울리고, 이 긴 글을 쓰게 하는가?
페데리고 펠리니가 포착해서 보여준 것은 무엇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젤소미나의 죽음 소식을 들은 잠파노(안소니 퀸)는 술에 취한 채 사람들과 싸우다가 한 마리 상처 입은 짐승처럼 파도가 몰려오는 바닷가에서 모래밭에 엎드린 채 흐느껴 운다. 그 울음은 이유도 정체도 잘 모르는 채 부유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아픔이고, 그러면서도 거기에 동반되는 필연적인 '상실'과 '그리움' 등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3년 전에 나는 이 영화를 두고 다시 시 한 편을 썼다.
영화에의 초대
-- 길(La Strada)
길이 길을 본다
육십 년 전의 이탈리아로 흑백의 세계로 들어간다
길의 시작인 바닷가에 살던
한 어린 여자가 한 남자에게 팔려간다
머리가 나빠 요리도 못하는 데다 얼굴도 이상하게 생겨 집을 떠나는 것이 남은 가족들을 위하는 것인 여자
떠돌이 차력사인 남자와 함께 낡은 오토바이에 매어단 짐칸에 몸을 의지한 채 방방곡곡을 정처 없이 유랑한다
한 입 가득 울음을 머금은 듯한
그래서 길을 인정사정없이 울리는 여자
혹은 콩 먹은 비둘기 같은 표정과 몸짓으로
찰리 채플린 뺨치는 이상야릇한 걸음걸이로
길을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여자
한 마리 거친 짐승 같은 남자
쇠사슬을 끊는 자신의 가슴을 팔아 살아가는 남자
살아남기 위해 불법으로라도 살아남는 남자에게
조수이자 욕정의 출구인 여자
머리가 나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왜 태어났는지도
왜 살아가야 하는지도 몰라
차라리 죽고만 싶다고 외치는 여자
그래도 비오는 어느 날 들은
애잔한 한 가닥 선율을 마음에 품고 사는 여자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라도
하느님이 그냥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분명 무슨 쓸모가 있을 거라는
애매모호한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가
죄짓지 않고 살아가려는 여자
대화하는 법을 몰라
짐승처럼 짖어대기만 하는 남자에게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마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생각 좀 하고 살라고 오히려 다그치는 여자
자신이 떠나면 아무도 남자 곁에 있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남자 곁을 떠나면 사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여자
삶의 무서움 앞에 그만 길을 잃고
안 그래도 약하던 정신마저 놓치고
한 가닥 애잔한 선율 속으로 들어가 버린 여자
살아남기 위해 홀로 살아남은 남자
선율 속으로 들어간 여자를 우연히 만나지만
자신의 쓰라린 가슴을
말로 풀어내는 법을 여전히 몰라
사람들과 치고 박고 싸우다가
길의 끝인 바다에 이르러
한 마리 짐승처럼 울부짖는 남자
젤소미나잠파노
길이 길을 벗어나 자신의 길로 돌아온다
길 속의 남자와 여자처럼
정처 없이 길 위를 떠도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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