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글을 쓸 때의 나의 주된 버릇은 좋아하는 음악을 유튜브에서 찾아 연속재생을 해놓고 글을 써나가는 것이다. 오늘은 갑자기 내 마음이 애잔하던 한 때 즐겨 듣던 [저니]의 "그녀 아직 운다네"(Still She Cries)를 듣다가 - 왜 갑자기 이 노래가 떠올랐을까? 내가 좋아하는 저니의 노래 중에 한 곡이 듣고 싶었는데 (왜 하필 오늘 저니일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가? 내일 어머니와 큰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오면 근교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는데, [재인폭포]의 빙벽은 이제 다 해체되었을까?) 왜 이 노래일까? 애잔한 느낌을 주는 이 노래.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은 애잔한가? 그 달콤한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 이 노래의 가사에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에, [다음]에서 노래 제목을 검색해서 들어가보았더니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블로그다. 나는 이 노래를 번역까지 해서 올려 놓았는데,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그런데 왜 내가 우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직 울고 있다고 했을까?
서설이 좀 길었다. 이 정도면 양호한 것인가? 어쨌거나 그냥 경험 삼아서 한 번 해본 탁구 코치 생활이 현재는 아이러니컬 하게도 내 주된 수입원이 되고 있다.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는 대학을 박사과정까지 수료했음에도, 이 사회는 변변한 일자리 하나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쩌면 현재 인문학의 현주소일 수도 있고, 눈을 나에게로 돌리면, 내 내면의 갈등들 때문에 이 사회의 변화나 흐름에 제대로 발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학 졸업도 중간의 한 학기 휴학과 대학원 시험 준비 관계로 마지막에 한 과목이 펑크가 나서(아이러니컬 한 것은 그것이 대학 생활 내내 유일하게 받은 F학점이었다는 것. 교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였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의 자폐적인 성향 탓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을 떠나 사회로 나간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리라) 남들보다 일 년이나 졸업이 늦어졌고(공부를 제대로 안 하던 친구들도 계절학기까지 들으며 무사히 졸업했는데), 대학원 석사과정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입학하자 말자 글을 쓴다고 휴학을 해놓고는 탁구만 죽자고 쳤고, 다시 복학하고 한 학기도 채 마치지 못하고 무단 자퇴(집에는 알리지도 않았고, 주변 사람들 중에 적극적으로 만류하거나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 당시 나는 그만큼 폐쇄적이었던가?). 다시 복학을 해서 열심히 학교를 다녔지만, 논문까지의 시간이 촉박해서 결국 논문을 포기(논문을 써야 할 시점에 나는 이번에는 열심히 시를 쓰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내 자신이 나를 얼마나 학대를 해왔는지, 또 세상에 대해 얼마나 큰 적개심을 지녀 왔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정말 내 안의 정체를 잘 알기 힘든 갈등에 대한 답은 죽음뿐인 듯했다.) 대학 측의 특별 구제 제도와 지도 교수님의 배려로 다시 한 번 논문을 쓸 기회가 주어져서 가까스로 석사 논문을 마치고 보니 대학원에 입학하고 14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박사과정은 순조롭게 마쳤으나 논문이라는 산을 힘겹게라도 무사히 넘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논문을 쓴다고 해도 오십을 넘긴 이 나이에 - 그렇지 않더라도 - 국내 영문학 박사에게, 그것도 공부에 정진하지도 않는 나에게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석사 입학하고 25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지냈는가? 남들은 물론 내 자신도 잘 모르는 내 안의 문제와 맞서 씨름해 왔던가? 어머니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모든 시간을 헛되이 보낸 것은 분명 아니다. 글을 쓰려 애를 썼고, 책도 읽었고, 또 학기 중에는 공부도 나름 열심히 했다. (글은 절대로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쓰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글은 이렇게 자탄으로 흘러가고 있다.)
나의 문제와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방책이었던가? 대학 생활을 마칠 무렵부터 탁구를 열심히 쳤다. 탁구에 미쳤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탁구에 올인해볼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하지만 서른이 넘은 나이에 아마추어로서도 탁구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명백했다. 그럼에도 탁구는 내 삶의 힘겨움을 잠시나마 잊고 순수하게 몰두할 수 있게 해주는 커다란 위안자이고 안식처였다. 그 열정이 지나쳐 몸에 무리가 가 병이 나거나, 논문 준비 등으로 부득이하게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탁구를 빼놓고 내 삶을 이야기하기도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수입보다 항상 지출이 많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지인의 소개로 탁구장 코치를 시작했을 때에는 새로운 일이 주는 흥미와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정작 소득은 별로 안 되었지만 많은 열정을 쏟았다. 그로부터 3개월 가량이 지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 와중에 탁구 동아리의 후배 소개로 고등학교 CA 수업의 강사도 맡게 되었고, 또 오늘부터는 일 주일에 한 번 구청에서 레슨도 시작한다.
레슨이 많아져서, 정작 내 탁구치는 시간은 줄었고, 논문 준비는 거의 제대로 못하고 있다(나에게 남은 시간은 3년인데, 이러다가). 레슨은 육체적으로는 서서히 사람의 진을 빼는 식으로 지치게 하지만 대신에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일의 반복-배우는 사람들이 대체로 초보자이거나 초급자여서-이라 머리는 맑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징들을 빨리 파악하고, 그 사람들의 동작들을 그대로 흉내내어 보여줄 줄 알아야 하는데, 음치에다 약간 몸치이기도 해서 그 부분이 쉽지 않다. 학생들의 경우는 50분 수업에 30명 내외의 학생들(일 주일에 네 반이나 해야 한다)을 상대해야 해서 개별적으로 많이 가르쳐 주기가 어려운데 그래도 최소한 탁구의 가장 기본인 포핸드는 익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취미 생활인 탁구가 50이 넘은 나이에 주수입원이 될 줄이야! 전에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정규 직장 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나에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일정이 모두 차 있다는 것은 낯설면서도 생각을 좀 단순하게 해준다. 이 생활이 얼마나 지속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침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또 중간중간에 남는 시간들을 잘 활용하면 논문 준비도 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 물론 일 주일에 30시간 정도는 최소한 탁구 레슨과 강의에 부여해야 한다. 직장 생활과 비교할 때 그렇게 많은 시간은 아니지만 근무 강도는 꽤 높은 편이다 -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