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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무제

by 길철현 2017. 3. 12.

'삶의 기술은 춤을 추는 것이라기보다 씨름을 하는 것에 더 가깝다'라고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이 말을 빌어 또 생각을 이어보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듯이 보이기에 앞에서 말한 춤에 비유할 수 있다면, 베토벤의 음악은 씨름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천재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인 반면에, 베토벤의 음악은 마지막으로 완성된 부분을 초고와 비교해 보면, 초고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경우가 많다, 라고 말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의 근거는 미약할 수 있으나, 나로서는 삶의 그런 면, 숱한 난관과 장애를 딛고 이룬 업적들에 더더욱 이끌린다.


하긴 위대한 인물들의 순위나 경중을 한가하게 따지는 것이 하루하루의 앞가림이 시급한 상황에서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만, 그럼에도 인간의 생각은 천상으로 해저로, 또는 저 우주 먼 곳까지, 또 시간적으로는 시간의 시작부터 아득히 먼 미래까지 경계를 모르고 상상의 날개를 편다. 아니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꿈은 온갖 모순투성이로 비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그 또한 우리 의식의 그물망에 포착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영원할 것만 같은 20세기도 끝이 나고 21세기로 들어선지도 한참이 지났다. 21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 곧 성인이 되는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내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온 지도 벌써 오십 년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분단이라는 우리의 상황은 변화가 없고, 남북간의 이질감은 더욱 커져가는 가운데,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어 왔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낙후된 국가에서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특히 우리 사회가 일정 정도의 민주화를 성취하고부터는 어린시절부터, 특히 대학 시절에 절감해야 했던 우리를 억누르고 있던 답답한 공기가 걷힌 그런 느낌이었다. 오래 되어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1988년인가 군대에서 외박을 나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지용 시인 해금 기념 행사에 참가했을 때의 감격,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그 사회의 민주화의 기본 척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 등이 떠오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녀의 정책이나 행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을 때에도 나는 정책에 유연성이 없고 고집불통으로 보여도 다수가 선출한 대통령이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인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작년 9월 최순실이라는 인물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드러난 청와대 내부는 정말이지 시궁창보다도 더 악취를 풍겼고, 우리의 헌법과 법률을 수호하고 그 본보기가 되어야 할 인물인 대통령은 솔선수범해서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 국민 대다수의 뜻은 단호했고, 이번 심판의 결과는 헌재의 재판관들 역시 국민들의 생각과 일치했음을 보여주었다.


개인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 또 국가가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것 모두 순풍에 돛단 듯이 춤을 추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숱한 난제와 어려운 상황과 맞씨름하며 힘겹게 나아가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분단이라는 현실과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다는 국제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국내의 혼란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번 결정으로 큰 고비는 넘긴 셈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이끌어갈 인물은 누구일까?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저지른 과오는 개인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대통령에게 너무 큰 권한을 부여하는 현재의 시스템의 문제라는 측면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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