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후회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후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기 짝이 없다. 돌이켜보면 내 삶 또한 후회투성이이다. 좀 더 바람직한 삶이란 과거의 잘못이나, 실패나, 좌절이 과오를 줄이는 밑거름이 되는 것일 텐데, 현실은 과거 한 순간의 잘못이 우리의 두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쇳덩어리로, 혹은 우리의 발걸음을 힘들게 만드는 모래주머니처럼 작용한다.
요즈음 읽고 있는 [도덕경]에서는 '도'를 따를 것을 강조하고, 그 해설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것을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하다. 물론 그 책에서도 '도'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 언어의 차원에서 쉽사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본다는 것이 지난한 일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긴 하지만 나에게는 이 순간 차라리 카프카의 [법 앞에서]라는 짧은 글이 더욱 와닿는다. 그 글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던, 혹은 별 의미가 없던 간에, '법 앞에 서려 하지만 결국 서지 못하고 만 한 인간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뭔가 시사하는 크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 짧은 글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고, 궁극적으로 무얼 말하려 하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한 번 도전해 볼만한 과제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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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인간은 상징계의 보편적 질서와 개인으로서의 고유한 독자성, 이 둘 사이의 간극으로 인한 갈등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허덕이느라 그러한 갈등 자체를 외면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늘 생활에 쫓기면서 허급지급 살다가도 문득 문득 찾아오는 의문,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는 거지? 하는 그 의문의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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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의 내 삶은 사회적인 척도에서 보자면 많이 양보를 하더라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능력의 부족이라는 면이 두드러진다(더 큰 문제는 수입에 지출을 맞추어야 하는데 내 과도한 욕망은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거기다 결혼도 하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후손을 낳아 내 생명의 연속성을 이어나간다는 유전자의 엄명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안 그래도 심각한 우리나라의 인구절벽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거기다 작가로서의 꿈의 좌절. 하지만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는 꾸준히 시도해 나간다는 말로서 대신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이 삶에 대해 하고 싶은 말, 그리고 그 동안 보고 느끼고, 배운 것. 내 글이 사회적으로 가치를 지니는 것은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겠지만, 내 사적 경험의 고유성--물론 이 고유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그 개별성과 일회성, 이를 테면 어제 수락산에 갔을 때의 느낌들 같은 것을 적어나가는 것이 적어도 개인적으로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컴퓨터와 인공 지능이 들어온 세상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복잡해졌다. 컴퓨터가 대중화 되기 이전에 고교 교육까지 마친 우리 세대, 현재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의 세대는 끼인 세대라 이 변화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제만 해도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하는데 3시간이 넘는 시간이 들었고, 방안의 PC에서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 둔 차까지 세 번이나 왔다갔다 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컴퓨터는 늘 쓰고 있으면서도 원래 내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이질적인 어떤 요소라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한다(하지만 이것은 컴퓨터가 가져다 준 편리함은 도외시한 체 그 복잡함이나 어려움이 주는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킨 듯하다).
지난 시절 나를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어 거기에 많은 에너지를 들였다면 늦었지만 이제는 세상을 좀 더 이해해야 할 시점인가? 정말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