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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 조지프/콘래드아프리카제국

루츠 판 다이크(Lutz van Dijk).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안인희. 웅진

by 길철현 2018. 9. 23.

[ 단상 ]


그 면적이나 인구수에 있어서 아시아 다음으로 큰 대륙인 아프리카는 54개의 국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대부분이 정치적인 불안과 빈곤, 질병 등으로 시달리고 있다. 현재의 아프리카가 이러한 상태에 놓이게 된 까닭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으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에 맹렬한 기세로 행해졌던 유럽의 식민주의적 침탈(20세기 초에는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전 아프리카가 유럽 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이 그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아프리카의 고유한 종족적 특성이나 관습 등은 완전히 무시된 채, 유럽 각국들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 쟁탈을 위한 이전투구 속에서(유럽의 아프리카 침탈은 그 이전에는 노예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국경선이 임의적으로 정해져서 1960년대 아프리카 각국들이 독립한 이후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유럽 각국들은 언제나 문명화의 사명을 전면에 내세웠다. 야만의 상태에 놓여 있는 흑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고 문명의 세례를 통해 보다 계몽된 세계 시민의 일원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유럽인들이 이러한 문명화의 사명을 지지하였는데, 여기에 반대한 사람들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흑인들이 너무나 열등한 인종이어서 문명화될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말하지만, 지나고 보면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향해 돌진하는 탐욕스러운 존재에 더 가까운 듯하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기술 문명의 발달을 바탕으로 유럽은 전세계로 팽창하였고, 그 와중에 아프리카 인들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 함께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그러면서 유럽은 자신들의 침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으로 아프리카의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규정했다. 생물의 변이를 설명하는 진화론이 이 와중에 우월한 인종인 백인이 열등한 인종인 흑인을 지배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이론적 도구로 이용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도 세상은 유럽 내지는 백인 중심주의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유럽의 연장선상이면서 현재 최강국인 미국으로 그 중심축이 옮겨갔다고 해야 하나?). 어릴 적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흥미롭게 보았던 [타잔]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의식*무의식적으로 백인과 동일시하고, 흑인들을 악으로 타자화 시키기도 했다.

 

엄청나게 큰 문제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유럽이나 백인을 비판하는 조악한 글을 쓴 느낌이 없진 않지만, 결과론적이긴 해도 근대 유럽이 전세계에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명백하다. 유럽은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아프리카를 비롯 식민지인들에게 투사한 부분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바로 잡는 것이 급선무 중의 하나이리라.




[인용]

- 여러 색깔을 가진 대륙 아프리카

(8) 아프리카와 그곳의 역사는 아주 다채롭고도 다양하고, 아주 오래되었으면서도 현대적이며, 또 많은 영광과 고난을 지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부분 없어져버렸거나, 아니면 오늘날의 지배적인 세계관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무시되었다.


- '아프리카'란 무엇인가?

(18) 카푸신스키 - 이 대륙은 너무나 커서 뭐라고 묘사할 수가 없다. 이것은 진짜 대양이고, 독자적인 행성이며, 아주 다양하고 풍성한 우주이다. 우리는 단순하고 편한 게 좋아서 그냥 아프리카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실제로는 지리적 개념 말고는 아프리카라는 것은 없다. 아프리카, 그것은 수없이 많은 상황들이다. 극히 다양하고, 완전히 모순된 상황들이다.

(20) 존 리더 - 외부 세력의 영향이 시작되기 이전 아프리카에 분명히 존재했던 방식, 곧 국가를 이루지 않고 작은 사회로 나뉘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생활방식이야 말로 아프리카가 인류 역사에 공헌한 부분이다.

(21) 르완다 대사 : 아프리카 전 지역에서 사람의 식량으로 쓰이는 양보다 더 많은 곡식을 유럽의 가축이 먹는다.

- 뉴욕 시는 전체 아프리카 대륙의 소비량을 합친 것만큼이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 1. 아프리카의 여러 시대

(24)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는 약 99퍼센트까지가 같다. 다만 인간의 두뇌가 더 커졌다는 점이 작지만 결정적인 차이다.

(31) Alfred Wegener - 대륙 이동성(판게아)

(37) Desmond Morris - [털 없는 원숭이] (1967)

(42) 대단히 발달된 언어 및 사유 능력을 가진 현재의 인류는 유전적으로만 보면 아프리카 인류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의 유전적 뿌리는 중요한 유전 정보를 계속 후세에 전달한 여성 조상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 아니고 이브, 정확하게 말하면 아프리카의 이브가 최초의 인간이다.

(43) 약 2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초기 인류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호모 하빌리스, 또는 호모 에렉투스이다. 이런 발전의 끝에 지금으로부터 약 20만 년 전에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약 10만 년 전에 몇백 명에서 많게는 2,000명 정도로 이루어진 상당히 작은 그룹의 호모 사피엔스 인간들이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 아시아 쪽으로 향했다.

(46) 유럽에서도 대략 12만 년 전에 초기 인류에서 현생 인류로의 독자적인 진화 단계가 나타났다. 이른바 네안데르탈인이 그들이다.

- 네안데르칼인과 호모 사피엔스는 적어도 1만 년 이상 나란히 존재했지만 이 두 그룹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남아 있지 않다. 네안데르탈인은 자기들끼리 모여 살다가 약 2만 년 전에 멸종하기 시작하였다.

(51) 언어학자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수천 개의 언어들을 어휘*문법*소리 등을 근거로 약 20개의 언어 가족으로 분류하였다. 이 20개의 언어 가족 중 네 개만이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모든 언어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들 네 가지는 모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것.

(54) 현생 인류 최초의 위대한 문명 - 약 7000년 전에 북부 아프리카.


- 2. 아프리카의 문명

(57) 아프리카의 다양한 초기 문명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르는 영향.

(59) 기원전 3000년 - 서기 400년 ; 이집트의 상형문자. (인류 최초의 문자)

(60) 이 지역[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대개 단순한 농부였는데, 처음부터 이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을 목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붙잡아온 사람들, 즉 노예에 대한 최초의 보고도 나타난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지적인 인식과 함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체계적인 착취가 도덕적인 정당화와 함께 등장한다.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가치가 있고, 따라서 가치가 낮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인류 불평등 기원론 볼 것) 

(62) 기원전 1000년 무렵에 누비아 사람들이 최초의 중앙 집권 국가를 세우기에 을렀다. 그들은 이 나라에 '쿠시'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전에 자신들을 통치한 이집트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다.

(67) 피그미족 - 그들의 언어에는 전쟁이나 투쟁 등의 단어가 아예 없다. 그 대신 거의 모든 삶의 상황을 위해 특정한 음악과 노래와 제의적인 츰을 갖고 있다. 또한 재산을 전혀 축적하지 않고 가족 비슷한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사는 생활방식을 고집한다. 그들의 아이들은 모두에 의해 공동으로 양육된다. 아기는 여러 여성의 젖을 먹는다.

- 아프리카의 피그미 사람들은 다른 아프리카 종족들이 정착하기 훨씬 전에 거대한 콩고 분지에서 살았던 최초의 주민이었음이 입증.

(69) 원시림에서 남자들이 사냥을 할 때면 개가 짖는 것과 비슷한 낮은 음을 내어 의사 소통을 한다. 열매를 따 모으는 여자들은 높고 떨리는 외침을 지른다. 이 두 가지 외침은 숲의 음향에 특히 잘 어울리는 것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잘 들린다. 피그미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타악기와 단순한 현악기 반주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를 한다. 전문가들은 그들 음악의 선율이 대단히 풍부하고 다채롭다고 한다. (말로가 원주민들이 내는 소리를 내며 그들의 인간성을 의심하는 부분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듯.)

(72) 아프리카로 신앙을 전파하러 온 이슬람교와 기독교 성직자들은 자기들이 만난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주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교도'라 부르고 '원시적'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아주 다양한 아프리카의 영성과 종교성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그들 자신의 무지가 얼마나 심했던가를 보여줄 뿐이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신앙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의미를 보지 못한다. 적지 않은 아프리카 사람들도 자기들의 삶의 한 부분인 신앙에 대해 서양의 방문객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에 익숙해 있다.

(73) 아프리카 신앙 전통

- 이 존재[신*창조자]는 인간과 특별히 가까운 관계를 갖지 않는다. 유익하거나 아니면 파괴적인 자연의 힘들은 이 창조자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남아프리카 Ubuntu 이념 : 확실하지 않을 경우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소망을 공동체의 안녕보다 아래쪽에 두어야 한다.

- 영혼 :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과 많은 물체들도 영혼을 갖는다. 세계가 영혼을 가진다는 이런 믿음은 자주 깎아내리는 뜻으로 '애니미즘'이라 불리곤 한다. 이런 신앙은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갖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원한에서 복수나 형벌을 행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힘을 일깨우게도 만든다.

(75) 아프리카 전통 종교에 대해서는 그동안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초기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신앙의 투사'들은 그것을 엄격하게 거부하였던 반면에,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강한 연결성을 지닌 전체주의적인 아프리카의 세계관을 건강한 것이라고 여긴다.  

(79) 반투 - 인간.

(82) 철을 가공하고 반투어를 쓰는 공동체들은 탄자니아 북동쪽에 있는 거대한 호수들 주변과 르완다에 기원전 800년 무렵에 이미 존재.

- 이슬람교의 전파 ; 실패

(83) 장-클로드 쿠바;  그[레오폴드 2세]는 또 얼마나 무지했던가. 그는 옛날 쿠바 와욱에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왕국은 이 지역에서 반투어를 쓰는 사람들이 만든 정치 체제로 일찍이 그 어떤 나라도 경험한 적이 없는 문화적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폭력을 전혀 쓰지 않고도 결혼의 전통을 개혁하고 더 능률적인 농업 방식을 도입하였다. 원시림 속으로 강의 물줄기를 나뭇가지 모양으로 이리저리 끌어들여 마치 오늘날의 고속도로처럼 의사 소통을 하고, 물자*지식*예술을 교환하는데 이용하였다.

(92) 이슬람의 가르침은 북쪽으로 갈수록 더욱 순수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강하게 전통 아프리카 신앙과 혼합되었다. 사하라 지역을 지나는 무역로를 이용하는 상인들은 거의 모두가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이것은 철저히 실용적인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아랍 사람들은 상인으로 유명하고, 그들은 또한 안전과 능률적인 판결을 위해서 힘쓴다. 이슬람의 황금시대에는 학문과 예술도 꽃을 피웠다. 옛날에 그리스어가 그랬듯이, 이제는 아랍어가 북부와 북동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교양인들의 언어가 되었다.

(94) 가나 왕국 : 서기 600년 무렵

(97) 말리 왕국 - 1325년 경. 말리 사람들은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드물고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부당함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는다. 왕은 범법자에 대해 전혀 은총을 보이지 않는다. 이 나라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여기서는 여행자든 내국인이든 간에 강도나 폭행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작은 그룹을 이루어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 . . [아프리카에도 분명 문명 국가들이 있었고 강대한 제국들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럽은 제국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아프리카를 원시화시켰고, 콘래드 또한 그러한 '원시의 신화'에 동조하고 있다.]

(97) 아프리카 남부 : 짐바브웨 (왕의 궁정)

1100년 무렵에 쇼나족의 건축가들이 거대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궁성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에 견줄 만큼 대단히 발전된 건축술이 나타났다. 가장 큰 궁성은 - 큰 짐바브웨- 오랫동안 쇼나족의 예배 장소로 쓰였다. 근처의 산 위에는 이 아프리카 문화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돌로 만든 새들이 서 있었다. 이것들은 지도자들에게 신탁을 내리는 용도로 쓰였다.

--- 새 왕국은 모잠비크까지 그리고 동부 해안까지 뻗어 나갔다. 그곳에서 반투 민족들은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스와힐리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것은 처음에는 중앙 집권적인 왕국의 형태가 아니라 각자 독립적인 여러 개의 무역 도시의 형태를 띠었다. 탄자니아 해안에 자리 잡은 킬와나 현재의 케냐에 있는 몸바사 같은 도시들이다.

- 짐바브웨의 쇼나족은 황금과 구리 같은 지하자원을 수출하고 동부 아프리카의 항구 도시들을 통해 중국의 목화와 도자기도 수입하였다. 짐바브웨의 마지막 왕 마토페가 죽은 다음 1480년에 이 나라는 두 왕국으로 갈라졌다.

- 로디지아(Cecil Rhodes의 이름에서 온 것).

(100) 옛날의 다양한 아프리카 문명들은 독자적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다가 15세기에 이르러 결정적으로 유럽 사람들에 의해 중단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여기서 '역사가 없는 암흑의 땅을 발견한' 것으로 믿었다. 다음 몇백년 동안 계속된 그들의 착취는 그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온갖 압제와 박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정도로 잔혹한 것이었다.


- 짓밟힌 아프리카

(102) 1500년 아프리카 인구 - 5000만 명 이하(현재 8억 5천만 이상)

(103) 노예 무역의 폐해 ;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체계적인 인간 도둑질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가, 유럽의 식민 지배자들을 쫓아낸 다음 이루어진 현대 아프리카 국가들의 형식적인 독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끔찍한 일. 노예 생활의 정신적 상처는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104)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노예 매매가 아랍과 아프리카의 상인들 그리고 자국민을 팔아 부자가 된 정치 지도자들의 협조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쓰라린 진실을 바라봐야만 한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파국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아프리카의 권위적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도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과제.

-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약탈자와 압제자 노릇을 하고,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륙 전체를 제멋대로 나누어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곳 주민들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았다. 마치 범죄자들이 훔친 물건을 놓고 분배하는 것 같았다.

-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수많은 저항 행위

(106) 독립 이후의 문제

(108) 15세기 말 - 포르투갈의 침입

: 서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매우 발전된 형태의 열대 및 아열대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충분한 식량을 얻었고, 이따금 식량이 남아돌기도 했다. 생태계에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는 영리하게 고안된 관개 시설이 있었고, 약초에 대한 지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목재와 상아, 금속과 테라 코타 등으로 만든 예술품은 다양한 양식으로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109) 1483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콩고 강 유역에 살던 바콩고 민족과 처음으로 접촉. 그들은 원래 북쪽에서 이민 온 사람들로, 여러 마을 공동체가 느슨하게 연결된 형태로 살고 있던 이곳의 대표적인 그룹.

(110) 콩고의 귀족 젊은이들은 공부를 하러 리스본으로 보내졌다. 그들 중 한 사람은 1518년에 포르투갈의 우티가 주교 자리까지 올라갔다. [포르투갈과 콩고 사이의 교역]

(111) 포르투갈 왕이 콩고에 파견한 총독 페르난도 데 멜로는 권력을 남용. 왕을 멸시.

(113)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빼놓고는 식민주의를 논할 수 없다. 식민주의는 활짝 열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강도들이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안에서 문을 열어준 것과 같다.

(114) 포르투갈과 콩고의 초기 교류 - 젊은 콩고 사람들은 포르투갈에서 대학에 다닐 수도 있었고,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다. 1550년 무렵 포르투갈 인구의 10퍼센트 정도가 아프리카 사람.

(115) Joseph Ki-Zerbo - 서부 아프리카 역사가 : 전통적 노예 제도

일반적으로 노예는 재빨리 가족 안에 통합되었다. . . . 따라서 노예도 시민권을 가졌고 게다가 자신의 재산권을 가졌다. 해방이 되는 방식도 여럿 있었고, 이런 방식들 중 일부는 노예의 활동 덕분에 생겨난 것이었다. . . .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이미 존재하던 관행을 계속한 것뿐이라는 유럽 사람들의 주장은 웃기는 일이다.

(117) 수천 만 명이 노예를 끌려감.

(120) 아미스타드 : 생베 피(멘데어)

우리는 아프리카 출신 사람드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태어났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로 자유로웠고 또한 자유로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남아야 하고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프랑스 소설 :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 - 앙드레 슈발츠 바르트. 이 작품과 비교.]

(131) 줄루 왕 게츠와요 --  아프리카 땅에서 영국군이 겪은 최초의 패배

(135) 벨기에 왕 레오폴 2세는 '작은 옥좌에 앉은 큰손 투기꾼'으로서 헨리 모턴 스탠리를 후원한 일을 통해 콩고에 들어가서 벨기에령 '콩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레오폴이 콩고에 직접 들어간 적인 없고, 콩고는 국왕의 사유 식민지] 그가 1876년에 선언한 말처럼 '마침내 중앙 아프리카 땅더어리에 문명의 깃발을 꽂기 위해서'였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다른 어떤 식민지도 '벨기에령' 콩고처럼 무자비하게 유럽 군주의 개인적인 금고를 위해 약탈당한 곳은 없었다. 그냥 감독자 눈에 너무 일이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과 여자들과 남자들이 손이 잘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아서 죽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콩고에서 벨기에의 강압 통치가 이루어지는 동안 약 1,00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폭행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추정한다.

- 베를린 협약 문서(1885) : 원주민들의 관습적 * 물질적 안녕을 증진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하기.

(136) 수천 킬로미터 이상 직선으로 곧게 뻗은 국경선 - 지리적인 또는 종족적인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갈라놓은 선.

-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 2세는 1896년에 이탈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어 이탈리아 사람들은 변방 지역인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일부에만 머무르도록 함.

- 라이베리아 (미국의 해방 노예들이 정착한 곳)

(137) 1850년 의약품 키니네 - 말라리아 예방.

(143) 1904년 1월 12일에 헤레로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력적인 항거를 시작하였다. 겨우 며칠 만에 작은 헤레로 무리들이 아주 멀리 띄엄띄엄 떨어져 있던 독일 농장들을 습격하여 약 100명의 독일 거주민을 죽였다. 사망자 중에는 가장 많은 미움을 받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45) 사무엘 마하레로 - 헤레로의 대추장

차라리 우리 함께 모여 죽자. 압박과 감옥과 온갖 다른 방법을 통해 죽지는 말자. . . 그 밖에 나의 소원은, 우리 약한 민족이 독일 사람들에게 맞서 일어서는 것임을. . . . 여기서 알리는 바이다. . . . 다른 것은 그 무엇도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

(147) 독일 병사 - 아기를 장난감처럼 던지고 놀다가 총검으로 살해.

(150) 아프리카 사람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가난해지고 권리를 잃어버리면, 선교사가 와서 유럽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을 달래주고 동시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가난함 속에서도 평화를 지니고 살도록 도움을 주었다.

- 백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성서>를 갖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성서>를 갖고 그들이 땅을 가졌다.

(154) 기독교 선교사들의 무지와 아프리카를 이해하려는 노력.

(160) 유럽의 사회주의자들 - 우리 회의는 문명 국가의 주민들이 저급한 개발 단계에 있는 나라들에 정착할 권리를 인정한다. [사회주의에서도 아프리카의 착취에 대해서는 둔감.]

(164) 무솔리니 - 에티오피아 점령

(168) 5차 범아프리카 회의

우리 대표들은 평화를 믿는다. 아프리카 민족들이 수백 년 동안 폭력과 노예 제도에 희생된 이 마당에 어떻게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서방 세계가 아직도 인류를 폭력으로 통치하려고 결심하고 있다면, 아프리카 사람들도 자유를 쟁취할 마지막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폭력이 그들 자신과 세계를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4장. 아프리카의 해방

(175) 식민 지배라는 모험이 너무 값비싸고, 이미 오래전부터 비용이 많이 드는 식민 지배와 군사 기구를 동원한 것보다 더 쉽게 경제적인 의존(종속)을 통해 새로운 약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만은 가능한 한 피하였다.

(178) 라이베리아의 경우 - 아프리카게 아메리카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3퍼센트를 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모든 권리를 장악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흑인에 의한 흑인의 지배] (인간들 사이의 착취와 학대의 문제는 인종차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 여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라이베리아의 예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184) 1960년 콩고 독립 기념식에 참석한 벨기에 국왕 보두앵 - 그는 '레오폴 2세의 업적'을 찬양하는 말로 시작하여 "벨기에가 콩고를 위해 바친 모든 희생"이라는 말도 했다. 그리고 이제 벨기에가 콩고 사람들에게 준 신뢰가 정당했다는 것을 콩고 사람들이 보여줄 차례라는 말로 연설을 끝냈다. [이 부분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애시당초 보두앵을 초대한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206) 세네갈 - 평화적으로 독립을 이룸

(263) 치나 케이텟시 - 어린이 병사

내 젊은 친구들 중 한 명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나서 무기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을 때 나는 내가 아직도 느낄 수 있음을 알았다. . . . 우리의 어른 지휘자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이 마지막에는 분명해졌다.

(266) 릴라 - 간호사

나는 최근에, 오늘날 아프리카에는 옛날 식민 시대에 유럽 출신의 관리보다 더 많은 서방의 개발 원조자들이 있다는 글을 읽었다.

(276) 아프리카의 전체 경제력이 세계 시장에서 1.3퍼센트 이하 - 제너럴 일렉트릭이나 벨기에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