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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Frantz Fanon) -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by 길철현 2018.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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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이라는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들었지만, 이제서야 그의 첫 번째 책인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일독했다. (몇 달 전에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지만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가, 다시 대출을 해서 읽다가 책을 직접 구입했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학위 논문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인데,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프란츠 파농은 중심적인 인물이다. 바꿔 말하자면 두 사람은 모두 탈식민주의의 중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사이드가 서구 중심적인 태도로 오리엔트 - 그 중에서도 특히 중동 지역 -를 잘못 재현하고 투사했는가를 광범위한 사료와 사례들을 들어 예증하였다면,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인 앙티유(앤틸리스)의 마르티니크 섬 출신의 흑인 정신과 의사인 프란츠 파농은 그러한 오랜 식민 지배가 흑인은 물론 백인의 정신에도 어떠한 악영향을 끼쳤는가를 시적이면서도 진솔한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파농의 간단한 전기와 이 책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은 [문학 동네]에서 나온 이 책의 번역자인 노서경의 글 "전투적 인본주의 위에 세운 반식민주의 이론의 초석"을 참조하면 될 듯하다. 하지만 파농과 같은 식민지 지식인이 처한 입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백인성을 지향하지만 엄연한 인종차별 앞에서 흑인성을 자각하게 되는 분열성"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흑백의 문제라는 것, 흑인의 문제라는 것은 백인들, 서구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유발된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백인들이 발달된 과학 기술 문명 - 거기에는 총과 대포라는 대량 살상 무기가 앞장을 선다 - 을 앞세워 흑인들을 인종적으로, 지적으로 열등한 "야만인"이라고 규정짓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억압하고 착취한 결과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상황에 대한 면밀한 이해와 분석이 따라야 하겠지만 현재 나의 전체적인 인상은 이런 정도이다.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의 문제가 워낙 광범위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서 요약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당사자인 파농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는 2차 대전 중의 반유태주의가 가져온 엄청난 비극이 흑인들에 대한 식민주의에도 마찬가지였음을 알게 한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흑인들에 대해 서구의 (특히 미국의) 대중매체 - 과거에 나온 - 들이 제시한 편견들의 세례를 나 역시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껏 들어왔던 일방적인 목소리의 반대편 목소리들을 많이 접하는 것은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다. 일례로 아체베의 소설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다]은 흑인들의 삶과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침탈하는 과정을 흑인들의 시각에서 잘 보여준다.


 



[인용]


- 서론

- 1장 흑인과 언어

(19) 흑인은 이차원적인 존재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종족이라는 차원과 백인과 관련된 차원이 있다. 흑인은 백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자신과 다른 종족 흑인에 대해서도 매우 차별화된 행동을 보인다. 흑인의 이러한 자기 분열이 식민주의적 굴종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식민주의의 교묘한 지배 기술이 다양한 이론의 중심에서 도출되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흑인을 원숭이가 인간으로 서서히 진화되어 가는 단계에서 나타난 중간자적 존재로 증명하려 했던 다양한 이론의 중심에서 시작되었다고. [진화론과 사회 진화론, 이런 것을 식민주의가 이용. 혹은 영향.

(20) 언어를 소유한 인간은 그 언어가 현상하고 내포하는 세계를 궁극적으로 소유한다.

(21) 폴 발레리 - 언어는 "몸속에서 길을 잃은 신"

- 식민지인은 자신의 흑인성이나 원시성의 폐기를 통해 백인화되는 존재인 것.

(24) 불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젊은이는 대단한 경외의 대상

(32) 다호메이와 콩고에서 태어났으면서 앤틸리스(앙티유) 출신인 척 행세하는 흑인들. 자신이 세네갈 출신의 흑인으로 오해받을 때 매우 황당해 하는 앤틸리스 흑인들.

앤틸리스 흑인이 아프리카 흑인보다 더욱 문명화되어 있다는 인식. 앤틸리스 출신 흑인이 더 백인에 가깝다는 뜻.

(38) 흑인의 문제는 어둠의 심연 속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이다.


2장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54) 인간은 세계와 그의 동종을 향한 운동이다. 바로 노예화 아니면 정복을 향해 가는 공격적 운동이다. 그리고 누구나 동의하듯 소위 윤리적 지향의 정점이라고 부르는 자아의 특권인 사랑이라는 운동이다.

(55) [나는 마르티니크 여자] - 백인하고만 결혼하고 싶은 유색인 여성

(56) 열등감 - 역사적으로 볼 때 경제적인 느낌.

(59) "나는 백인이다." 이 말은 내가 흑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와 덕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나는 찬란한 한낮의 빛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66) 흑인 여학생 - 피부는 검지만 실제로는 내가 백인에 가깝다는 걸 당신은 모르세요? 나는 흑인들을 경멸해요. 진절머리 나는 흑인들을요. 더럽고 게으른 흑인들! 이제 제 앞에선 두 번 다시 흑인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67) 흑인은 자신의 존재의미에 대한 불신을 극복할 수 있고, 그리하여 뭔가 공포에 질린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예의 그 부자연스런 행동의 특성들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공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흑인들의 정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그들은 익명의 분노 속에 갇혀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왜소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인간적 의사소통의 왜곡으로 인한 피해를 직접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흑인들을 감당하기 힘든 고립감 속에 빠져들게 한다.

(안나 프로이트 - 자아퇴행 현상 / 빈약한 성취)

(68) 흑인이 자신만의 고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이다. 흑인에게는 탈출구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이 백인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0) 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이나 모두 신경증의 증후를 드러내고 있음.  


3장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

(84) 나를 사랑해 주는 백인 여성을 통해서만 나는 백인이 될 수 있다. 백인 남성처럼 사랑받을 수 있다.

나는 백인이다.

(86) 르네 마랑 소설 - 장 브뇌즈가 흑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앙틸레스(앤틸리스. 앙티유)에서 태어났지만 보르도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유럽인이다. 그러나 그는 까만 피부로 태어났다. 따라서 그는 흑인이다. 바로 여기 갈등이 있다. 그는 자기 종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백인 역시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식민지의 국민으로 자라면서 백인의 정체성을 자신의 그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흑인들이 당면한 문제. 피부는 흑인이지만 의식은 백인 지향적인 이중성.]

(89) 흑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무식쟁이들은 그걸 단순하다고 말할는지는 모르겠지만. 흑인의 마음속에도 여느 유럽인들과 같이 복잡한 상념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96) 루이-티 아실: 어떤 유색인종 중에는 백인과의 결혼이라는 사실 자체를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겨서 그것이 그들에게 이처럼 성실한 인종, 즉 모든 유색인의 제왕이자 세계의 주인인 백인과 동등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103) 자신의 자아를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중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 결과는 위험천만하다. 그런 행위는 한 개인을 심각한 내적 불안의 상태로 이끌어 그 결과 모든 대인관계를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개인을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감정적 차원의 자기 인정의 부재는 유아기에 사랑과 이해를 받고 자라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유기-포기 신경증)


- 4장 식민지 민중의 의존 콤플렉스

(119) 만약 흑인을 싫어하는 백인 프롤레타리아가 있다면 마노니의 생각과 달리 "하급관리들이나 구멍가게 주인들, 또는 식민지에서 한 건 크게 올리지 못하고 고생만 한 식민주의자들이 지닌 인종주의" 때문이 아니라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주의 사회구조 때문

(121) 반유대주의 -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123) 세제르 - 결국 나치는 서구 기독교 문명의 모든 틈으로 흡수되고 젖어들어 하나의 샘물로 고이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자신을 키워준 그 문명을 피바다로 삼켜 버리는 것이다.

- 프랑시스 장송 - 한 국가의 모든 국민은 그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행위에 책임이 있다.

(125) 마노니 - 식민지 백인은 결코 열등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 "백인은 신격화가 없으면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126) 흑인의 경우 소수민족인 백인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예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 열등한 대상을 조작한 장본인은 바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131) 누구나 지적하듯이 흑인의 타자성은 흑인이 아닌 백인이다. "문명 개척자들"에게 밤사이 정복당한 마다가스카르 같은 고도는 아무리 그 개척자들이 신중하게 처신했다 해도 뿌리를 상실하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마노니는 거듭 말한다. "이 섬의 소심한 왕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백인 수중에 들기를 학수고대했다"고.

(134) 의존 콤플렉스- 권위(지배자) 콤플렉스

(142)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날 때 작전명령 수행을 노상 흑인들이게만 맡김 - 유색인들을 동원해 다른 "유색인들"의 해방 의지를 무마시키려는 의도.

(146) 마다가스카르인들의 "의존 콤플렉스"는 그 섬에 출현한 백인 식민주의자들로부터 시작

 


- 5장 흑인이라는 사실

(148) 흑인은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흑인이기 때문

(160) Allan Burns - 인종차별이란 한 인종이 다른 인종에 대해 갖는 근거 없는 증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61) 정신분석 - 어린아이에게 합리적인 것과의 조우보다 더 큰 상처는 없다. 합리성이 유일한 무기인 사람에겐 비합리성과의 조우보다 더 큰 신경증적 증후는 없을 거라고.

(164) Mjoen - 서로 완전히 다른 인종간의 교류는 신체적*정신적 측면에서 질적 타락을 가져온다. . . . 따라서 인종간 교류의 효과가 구체적으로 밝혀질 때까지는 그것을 삼가는 것이 좋다.

- 학자들은 식인행위에 대한 성적 관련성 외에 인종적 관련성도 발견했다고 야단법석이다.

(172) 드 페드랄 De Pedrals - 아프리카에는 모든 영역에서 항상 특정한 마술적 사회구조가 존재.

(174) 흑인의 마술, 원시적 정서, 애니미즘, 수간! 이것들이 나에게 흘러넘친다. 그래,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라는 종자와 진화의 보조를 맞추지 못한 낮은 단계의 인종들에겐 공통적인 것들이다. 가장 낮은 단계의 인종들이 펼치는 인간성의 표현이다.

(178) 파농의 친구 - 백인과 함께 있는 흑인은 그 자체로도 인간성을 보증하는 보험증권 같다. 백인들은 그들의 정서가 지나치게 메말랐다고 느낄 때 유색 인종에게 다가가 인간적인 자양분을 얻기 때문이다.

(181) 1498년 포르투갈인들이 콩고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곳에도 풍요롭고 번창하던 국가는 있었으며 앙바스 왕국[암바스의 궁전]의 조신들도 비단옷에 화려한 무늬의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그는 최소한 아프리카도 국가라는 법률적 개념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191) 내 어깨는 세계라는 구조에서 탈골되었으며, 두 발은 더 이상 땅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고. 흑인의 과거가 없이는, 흑인의 미래가 없이는 나 자신의 흑인성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완전한 백인도 아닌, 그렇다고 철저한 흑인도 아닌 나는 저주받은 인간이다.

(193) 백인이 선이라면 흑인은 악이다. 손에 총을 쥐고 있는 백인들. 그들은 항상 옳다. 죄인은 항상 나라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는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 뿐이다.

(195) 하나의 영혼이란 세계만큼 무한하며, 흐르는 강물처럼 깊은 것이므로. 그러므로 나의 가슴은 무한정 팽창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주인이다.


-6장 흑인과 정신병리

(199) 정상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정상적인 흑인 아이는 백인 세계와의 피상적인 접촉에도 비정상적인 아이로 변한다.

(202) 레그먼 - 보어인들을 제외하면 미국인들만이 자신들이 정복한 땅에서 원주민들을 완벽하게 축출한 생생한 기억을 가진 민족, 유일한 근대민족이 된 셈이다.

(204) 학교에서 "우리의 위대한 조상, 갈리아 족을 공부하는 앤틸리스 흑인 학생들은 개척자이자 문명의 전달자이며 야만인에게 진리(백인의 진리)를 전달한 백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어린 흑인 학생이 백인의 태도를 굴욕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동일화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204) 앤틸리스인들은 자신을 결코 흑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그저 앤틸리스인이라고 생각한다. 흑인은 아프리카에나 사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주체적으로도, 지적으로도 그들은 백인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앤틸리스인은 흑인이다. 그것은 유럽에 가보면 안다. 유럽에서는 흑인이라는 개념의 범주에 세네갈인 뿐만 아니라 앤틸리스 흑인도 포함시킨다.

(209) 인간적 실제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반드시 신경증과 관련을 맺고 있지는 않다. 어쨌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흑인들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적 상황의 산물)

(211) 흑인은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흑인의 목적은 (백인으로 가장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타자만이 그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윤리적인 층위, 즉 자존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214) 흑인 공포증에 걸린 백인 여자들 대부분도 현실 속에서는 흑인의 성적인 파트너와 다름없다. 마치 흑인 공포증에 걸린 백인 남성들이 억압된 동성연애자들이듯이.

(217) 흑인의 성적 우월성은 진실일까? 누구나 알겠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221) 성적 관용의 시대에 대한 향수 - 한바탕 질퍽한 행위 장면과 처벌되지 않는 강간, 억압되지 않은 근친상간을 자연스레 분출해낼 수 있는 시대에 대한 향수

(237) 절대다수의 백인들에게 흑인은 원시적인 형태의 성본능을 대변한다.

- 만화에서처럼 흑인들의 지적 수준을 여덟 살 정도 아이의 정신연령에 맞추는 백인들도 있다.

(245) "최소한의 인간적인 가치"가 없는 곳에는 문화도 없다.

(251) 굳이 유전자를 언급하지 않아도 집단무의식이 편견과 신화, 기득권 집단의 집단적인 태도의 소산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 프랑스에 살면서 인종차별적인 유럽의 신화와 편견을 호흡하고 먹고 자라 유럽의 집단무의식에 동화된 르네 마랑과 같은 흑인은 자신과 동종인 흑인에 대해 염증만 드러낼 것이다. 그는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252) 음흉함*어둠*그림자*응달*밤*미로의 땅*깊은 심연*누군가의 명성에 먹칠하기, 이 모든 것이 블랙이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반면 밝고 순수한 표정, 하얀 평화의 비둘기, 신비한 하늘색은 화이트가 연상된다.

(253) 가장 낮고 열등한 속성을 대변하는 무의식을 흑인에게 부과하는 것

(253) 유럽인들의 무의식의 심연 속에는 난폭한 검은 동굴이 있다. 그곳에는 가장 비도덕적인 충동과 가장 부끄러운 욕망이 잠들어 있다. 백인성이란 빛을 찾아 동굴 절벽을 기어오른 유럽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방어하려는 야만적인 자아를 깨끗이 청산했다. 백인의 문명이 흑인의 세계와 그곳에 사는 야만인들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흑인들이 모든 악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에.

(254) 집단무의식은 대뇌 유전자와 무관하다. 내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반성의 빛이 전혀 없는 한 뻔뻔한 문화의 잔재일 뿐이다.

(256) 흑인들은 모든 면에서 백인 문명의 희생자이다.

(257) 앤틸리스인의 흑인 공포증의 기원이 바로 이것이다. 집단무의식 속에서 흑인은 추함, 죄, 어둠 그리고 비도덕과 동격이다.

(275) 흑인의 신화와 흑인이라는 개념은 결국 흑인이 겪고 있는 소외의 진정한 내용을 밝히는 데 결정적 요소로 작동할 것이라는 점.

(282) 인육을 먹는 흑인 야만인


-7장 흑인과 인정투쟁

(289) 앤틸리스인 모두 신경증 환자다. 앤틸리스 사회 전체가 신경증 사회, "비교" 대상을 필요로 하는 사회이다.

(299) 상태가 상당히 호전된 환자에게 며칠만 지나면 퇴원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을 때 그 환자의 병이 다시 재발하듯이 흑인 노예에게 해방될 가능성을 미리 통보해 준 것도 여러 형태의 정신병과 급사를 수반했다.


- 8장 결론을 대신해서

(308) 인도차이나인이 혁명에 앞장선 것은 그가 자신의 문화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고 "정말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이다.

(311) 흑인은 백인이 되고 싶어 한다. 흑인에겐 단 하나의 운명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인이 되어야 한다는 운명이. 오래 전에 흑인은 거부할 수 없는 백인의 우월성을 인정했다. 지금은 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백인의 존재 구현에 할애된다.

(313) 나는 항상 다짐한다. 진정한 도약이란 늘 새로운 것으로 진부한 존재를 채워야 한다.

[나는 언제나 상기해야 한다. 진정한 도약은 발명을 존재 안에 도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221]

(315) 유색인의 불행은 그가 한때 노예로 부려졌다는 데 있다.

백인의 불행과 백인의 비인간성은 그가 한때 어디선가 인간을 살육했다는 데 있다.

(316) 인간의 비극은 한때 그가 어린아이였다는 점이다.

(317) 육체여, 항상 자신에게 질문하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 노서경 - 전투적 인본주의 위에 세운 반식민주의 이론의 초석[문학동네, 파주. 2016]


(254) 사르트르 - 식민주의는 시스템이다. 식민통치의 폐단이 현지 관리나 식민경영자 개인의 과오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식민주의 체제 자체에 대재한다고 주장.

- 나치의 것인 줄만 알았던 고문 행위가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치즘에 대한 저항을 새 사회의 토대로 삼은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가톨릭과 노조원, 학생, 작가, 지식인, 로베르 바라 같은 신문기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알제리전쟁은 폭력의 사용을 필수적인 듯 요구한 식민지 지배와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이 불가피한 수단임을 깨달았던 해방전쟁의 숨막히는 대결이었다.

(260) "생살이 벗겨진 자"

- 검은 것은 추하고 나쁘고 더럽다는 이 신화가 아이(엄마, 저 검둥이 봐. 무서워)의 정신에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라고 파농은 판단.

- 흑인은 자신이 백인이라는 타자의 정신에 결박된 존재임을 깨닫는다. 자신은 보지 못하면서 자신 이외의 것을 보여주는 눈의 신비처럼, 흑인의 의식은 백인이라는 타자의 눈길을 거쳐서만 자신을 객관화(상대화)하게 된다.

(261) 나와 너,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 사이 어디쯤에서 서로 얽히고 엮이는 것으로 있음을 튼 이는, 나의 있음은 너의 생각을 거쳐 내게 돌아오고, 나는 그렇게 되돌아온 생각으로 다시 세상을 품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262) 파농은 흑인이 지닌 백인 선망을 병리적으로 진단하고 비판하면서 그 자신이 흑인과 동류임을 감추지 않는다. 흑인 스스로가 이 억압적이고 부조리한 세계에 살고자 하지는 않았다. 흑인은 다만 그 참혹한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며, 흑인의 존재는 이미 위에서 결정된 것이다.

(263) 검은 색이 상징하는 악과 야만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문명화된 백인의 세계를 습득하고 체화해야 한다. 백인 선망과 검둥이공포증은 하나의 몸에서 나온 두 개의 머리다. 이 둘의 싸움은 존재의 고통을 초래하니, 식민지 인종주의 사회에서 흑인은 이미 고통을 받게 구조화된 존재다. 그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하는 순간 그는 백인에 동화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설 수 없는 폭력적 상황에 처음부터 노출된 것이 흑인이라고 파농은 간파한다.

(264) 식민지인은 식민지배자가 심어준 형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따라서 정교한 자기해체 없이는 올바로 자신을 볼 수 없고 여기에 파농이 심리학과 정신분석을 전유하고자 했던 이유가 있다.

-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자기 속의 타자를 인정하게 된 순간 이 타자가 흑인이나 백인 또는 혼혈인으로 딱 꼬집어 부르기 어려운 것임을 깨닫는다. 타자를 호명하는 순간 지배의 형상은 고착되고 오랏줄이 걸려 자아는 응고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투쟁은 승패를 예단하지 않고 타자와 자아의 모순을 한꺼번에 끌어안는 것이어야 했다.

(265) 1940년까지 어떤 앙티유인도 자신을 검둥이로 생각하지 못했다.

(266) 반인종주의적 인종주의

(267) 세제르는 흑인의 아프리카 역사, 나름의 문화와 정치를 무시하고 흑인의 고유성을 짓밟아 흑인을 소외의 형극으로 내몰았다고 식민주의를 비판하면서 식민지 상황에서 네그리튀드가 집중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동화 정책에 저항하고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라고 주장.

(268) 파농에게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며 최상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다. 그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말하는 자에게 굴레를 뒤집어씌우는 경험을 치른 언어다. 그는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의사로서, 식민지 출신으로서 다른 식민지들을 대하면서 실감하고도 남았다.

(273) 파농은 정신분석가 중 선구적으로 식민주의 문제를 다루었던 옥타브 마노니에 주목한다. 마노니가 쓴 [식민화의 심리학]을 읽으면서 "식민주의의 문제는 물질적인 역사 조건의 상관관계뿐 아니라 그 조건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도 관련을 맺는다"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의를 표한다. 또한 백인 정착민이 본국에서 충족할 수 없던 사회경제적 욕구를 식민지에서 과잉보상하려 한다는 가설도 받아들인다. 마노니는 그 책에서 식민지 정착민은 유럽 사회에서 엘리트가 되지 못한 계급이나 자본주의 경쟁에서 도태된 인간으로, 문명의 변두리인 아프리카에 와서 왕 노릇을 하려 한다고 보았다. 마노니는 중심부에 합류하지 못한 유럽의 '권위 콤플렉스'에 함몰된 자들의 심리 성향을 '프로스페로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다. 셰익스피어 희곡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프로스페로와 칼리반을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원형으로 설정한 것이다. 마노니는 프로스페로가 '비천한 미개인' 칼리반을 보살피고 다스리는 온정주의자인 동시에 칼리반이 자신의 딸 미란다를 범하지 않을가 노심초사하는 인종주의자라고 보았으며, 파농은 이런 마노니의 식민화 성찰은 유의미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파농은 마노니가 식민지배자의 '권위 콤플렉스'와 짝패로 설정한 피지배자의 '의존 콤플렉스' 가설을 매섭게 비판했다. 마노니는 식민지 원주민의 무의식에 지배와 통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의존성이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자신이 살았던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인의 고유 정신에 대입해 일반화하는데 파농은 이 일반화가 오류이며, 지배와 피지배의 욕구가 합치된 것이 식민화라는 설명은 그럴듯해 보여도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한 결과라고 했다.

(278) 억압의 구조 아래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파농은 아직 오지 않은 삶을 미리 산 희망의 인간이었다. 그 희망은 다분히 낭만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변혁에는, 그러니까 논리의 전도에는 깊은 서정시가 요구된다는 것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