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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 조지프/콘래드아프리카제국

안 위공(Anne Hugon). 아프리카 탐험 -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시공사

by 길철현 2018. 10. 4.

[정리]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내륙 지방과 나일 강의 수원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많은 탐험가들을 아프리카로 이끌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도 루츠 판 디이크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와 유사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제목에서 시사하고 있듯이 특히 "나일 강의 수원"을 찾는 것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낭만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가 지닌 이국정취나 신선함에 매료되어 아프리카를 서구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로 파악했다. 인간적인 한계를 초월하고자 했던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 탐험을 통해 영적인 구원을 얻고자 했다. 탐험가들의 아프리카를 향한 막연한 동경은 미지의 땅이 간직한 신비로움에 기인한다. 유럽인의 상상 속에 아프리카는,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찬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대륙으로, 괴상한 인종이 사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탐험가들은 '검은 대륙'이나 '신비의 대륙'이라는 표현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에 공포를 가미함으로써 자신들의 업적을 한층 더 빛낼 수 있었다. 결국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탐험가들도 현실적이기보다는 환상적인 시각에 치우쳐 아프리카를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34)


그리고, 위의 인용된 부분에서 드러나듯, 탐험가들은 아프리카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환상적인 시각에 치우쳐 아프리카를 바라보았"고, 그들의 탐험은 이후 서구 열강들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해나가는데 발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탠리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듯 그러한 제국주의적 팽창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책에는 에티오피아인의 생활과 풍습을 자세히 묘사하며, '인간의 본질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46)는 결론을 내린 브루스([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같은 탐험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탐험가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인용]

제1장 검은 대륙의 발견

(15) 19세기 초엽까지도 아프리카 내륙지역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그후 탐험가들은 각 지역을 답사하여 하천과 산세를 확인했고 다양한 동식물군에 대한 연구목록을 작성했으며 아프리카인과도 유대를 다져 왔다. 그러나 불과 1세기 후에 이 땅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탐험가들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16) 탐험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요인 - 적도지방의 열대우림.

- 대륙 동부 : 중앙집권적 왕국

다른 지역 - 언어와 민족이 상이한 여러 정치세력으로 분할.

(17) 대부분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의 '미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보편적인 양 과장했던 이러한 분열이 탐험가들의 진로를 방해.

(18) 계몽주의 사상이 막 쇠퇴하기 시작할 무렵에 유럽에서는 탐험가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까지도 아프리카 지도상의 큰 공백지대에 대한 궁금증을 품기 시작했다.

(19) 1788년 런던 - 아프리카 내륙 탐험협회

- 인류가 살고 있는 땅의 1/3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그중에서도 특히 아프리카는 그 대부분 지역이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다.

(20) 산업자본가들 - 노예제도가 노동의 자유에 기반한 근대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노예제도를 반대

- 이면: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룩한 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함으로써 경쟁국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자 하는 속셈.

(30) 아프리카 내륙지방의 개척은 겉으로 표방된 관대한 인도주의 정신보다는 이에 밀착된 상업적 실용주의에 의해 추진되었던 것.

-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 진출했을 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눈뜨기 시작했다. 즉, 아프리카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그들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여 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득과 함께 미래의 번영까지도 보장하리라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제 활발한 식민쟁탈전이 시작되었고 그동안 민간단체들이 조달하던 탐험비용은 1880년부터는 각국 정부에 의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충당되었다.

(31) 군인 탐험가들은 타국과의 경쟁에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국권을 수호하는 외교사절의 역할을 겸했는데, 미지의 땅을 개척하겠다는 지리적 호기심보다는 현지 부족대표들과 조약을 체결하는 데 더욱 치중했다. 프랑스의 경우 - 부족국가의 왕과 친분을 돈독히 하여 그 지역을 보호령으로 만들라는 임무를 부여.

(33) 유럽인이든 북아메리카인이든 거의 모든 탐험가들은 결과적으로 백인종이 타인종에 비해 우월하다는 그릇된 의식을 전파.

(34) 대부분의 탐험가들은 낭만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가 지닌 이국정취나 신선함에 매료되어 아프리카를 서구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로 파악했다. 인간적인 한계를 초월하고자 했던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 탐험을 통해 영적인 구원을 얻고자 했다. 탐험가들의 아프리카를 향한 막연한 동경은 미지의 땅이 간직한 신비로움에 기인한다. 유럽인의 상상 속에 아프리카는,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찬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대륙으로, 괴상한 인종이 사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탐험가들은 '검은 대륙'이나 '신비의 대륙'이라는 표현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에 공포를 가미함으로써 자신들의 업적을 한층 더 빛낼 수 있었다. 결국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탐험가들도 현실적이기보다는 환상적인 시각에 치우쳐 아프리카를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제2장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46) 브루스 -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1790)

에티오피아인의 생활과 풍습을 자세히 묘사. '인간의 본질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점은 주목할 만.

(54) 빅토리아호가 나일강의 모태.

(63) 베이커 - 앨버트 냔자(배 이름)

- 난폭하고 우둔한데다가 무자비한 아프리카인에게는 우리와 달리 숭고한 본능이 없다.

(65) 나일강은 청나일과 여러 개의 호수를 끼고 있는 백나일의 지류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3장 리빙스턴의 남아프리카 탐험

(78) 당시 일부 흑인 부족들과 아랍 상인들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노예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다. 백인이 한몫 거드는 경우도 있었는데, 특히 포르투갈인은 앙골라와 남동부 항구도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리빙스턴 - 걸음이 늦춰질 때마다 매를 맞고, 대열을 이탈하면 즉시 사살되는, 쇠사슬에 묶인 흑인 포로들의 죽음의 행렬은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나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장면.

(86) 리빙스턴

- 그는 다른 탐험가와 달리 흑인을 진심으로 존중했지만, 그의 시각 역시 백인 우월의식에 젖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선천적이기보다는 교육을 받았고 기독교를 믿는다는 면에 우월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점이 다르다 할 수 있다.


제4장 밀림 속으로

(93) 캐머런

- 1875년 11월 7일, 드디어 앙골라 해안 벵갈라에 도착해 대륙횡단에 성공한 그는 적도 아프리카를 가로지른 최초의 유럽인인 됨.

(106) 메어리 킹슬리

- 아마추어 인종학자로서 킹슬리는 가봉의 판족 마을에 머무르면서 토속문화에 대한 왜곡된 기존평가를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 그녀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아프리카의 여러 풍습을 연구했는데,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다 선교사들과 대립. 킹슬리는 모든 문화는 그 사회의 내적 응집력의 산물이라는 신념으로 유럽식의 윤리관에서 벗어나 아프리카 문화의 근본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 연구자세였다.

(107) 영국 지식인 계층에 반제국주의적인 경향이 확산되는 것을 콜레라의 전염에 비유할 정도로 철저한 제국주의자임을 자부했던 그녀는 좀더 능률적인 식민통치를 위해서는 아프리카 풍습에 걸맞는 현명한 식민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겸허하고 애정 어린 연구자세는 체계적이고 논리적 수탈을 위한 가식. 그녀도 유럽주의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함.

- 그녀는 인류다원론적 관점에서 흑인과 백인이 동등한 인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


제5장 탐험가의 세계

(126) 탐험기는 백인 우월사상으로 점철된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다. 아프리카인의 모습은 항상 이 프리즘을 통해 왜곡되었고, 탐험가들 대부분이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업적이 야만인을 상대로 한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음을 강조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아프리카 흑인들은 게으르고 겁이 많으며 거짓말을 잘하는 데다가 잔인하고 퇴페적인 악덕의 화신으로 인식되었고, 규범과 질서로 정돈된 유럽 사회와 무질서와 방종이 난문하는 암흑사회로서의 아프리카가 대비되었다.


- 탐험가는 식인종이 벌이는 축제장면을 읽고 전율을 느껴야만 만족하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광란에 가까운 흑인의 생활상을 묘사해서 독자들을 흥분시켜야만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자극적이고 허구적인 소재는 모든 탐험문학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등장했다.


-- 기록과 증언

(145)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백인은 식인귀나 악마로 통한다. 리빙스턴

(154) 캐머런 - 나는 아프리카인이 우리의 합리적인 통치방식을 거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통치권은 야만과 독단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159) 음보톨로 -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역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식민지 건설의 기나긴 역사의 한 단편에 불과하다. 그의 아프리카에 대한 관용과 통찰력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가 남긴 이데올로기적인 현실 왜곡에 따른 후유증은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