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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대만(타이완) 여행(191223-31) - 대만 인구의 절반은 한국인이다 -8박 9일의 자유 여행(3)

by 길철현 2020. 2. 1.

 

3. digression 

 

여행이 하나의 체험이면서, 그 체험의 해석이라면, 여행기는 후일담이자 재해석이며 재구성이다. 거기다 나의 이 여행기는 데드 라인을 받아놓은 것도 아니고,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순전히 자기만족이요, 내 안의 표현욕을 발산하는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도 글을 쓰는 행위는 마냥 즐거운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많기 때문에 쓰다가 지치면 중단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아직 한국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중단을 염려하고 있다니. 벌써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지나서 인상들이 자꾸 흐려지고 있다. 망각으로 떨어지려는 인상들을 여러 가지 자료를 취합하고 생각을 모아 써나가야 한다.

 

이 시점에서 여담이 하나 떠오른다. 우리가 흔히 "소설"로 알고 있는 "novel"이라는 장르는 엄격하게 따지자면 일단 소설 중에서도 장편소설만을 지칭하고, 또 시기적으로 보아서도 17세기 말 혹은 18세기 초 정도에 영국에서 시작된, 그러니까 이전의 "산문 이야기"와는 차별성을 보인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novel"이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근대 장편소설"이라고 알려 주고, 시험에도 낸다. 1719년에 [로빈슨 크루소]를 발표한 디포, 그리고 그보다 20년 정도 뒤에 [파멜라]를 발표한 리처드슨, 리처드슨의 [파멜라]가 보여주는 기만성을 비판하기 위해 극작가에서 소설가로 전향한 필딩(이 당시에는 novel이라는 용어가 정착이 되지 않아서 필딩은 자신의 작품을 "산문으로 쓴 희극적 서사시"(comic epic in prose)라는 모순적 용어로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비평가 이언 와트는 [소설의 발생]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이 세 사람을 novel의 선구자라고 칭하면서 새로운 장르인 novel의 특징을 "형식적 사실주의"(formal realism)라고 규정했다. 그러니까 novel은 그 발생 단계에서부터 이후 사실주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형식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인데, 사실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개연성"이다.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장풍을 쏘아대는 무협 소설은 novel이라는 장르에 맞지 않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가 흔히 판타지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러므로 이 장르의 출발 당시에는 허용될 수 없는, 이전 시기의 산문 이야기, 통칭 "로맨스"(이 때의 로맨스라는 용어는 사랑이 아니라 초현실성이 핵심이다)라고 부르는 것과 더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그런데,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렇게 사실주의적 요소, 혹은 개연성을 그 핵심으로 출발한 novel이라는 장르는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귀신들로 가득 찬 일종의 공포 소설인 "고딕 소설"이 등장하게 됨에 따라 그 근본 정의를 새롭게 내려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고딕 소설 이전에도 스턴(Laurence Sterne)이라는 괴짜 목사가 [신사, 트리스트람 섄디의 삶과 견해](The Life and Opinions of Tristram Shandy)(보통 줄여서 [트리스트람 섄디]라고 부름)라는 반-소설을 발표하여 novel이라는 장르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했다. 스턴은 '리얼리티'라는 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려는 듯, 독자를 끌고 다니며 온갖 장난을 친다. 대리석 무늬를 책 속에 삽입하는가 하면, 빈 페이지를 주고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하기도 한다. 장(chapter)의 순서를 바꾸고, 심지어는 페이지까지 바꿨던 듯하다(이 부분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는 novel이라는 장르에서 말하고 있는 '리얼리티'라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듯하다. 제목이 작품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트리스트람 섄디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다. 전 9권으로 된 이 작품에서 트리스트람 섄디가 출생하게 되는 것은 3권이 되어서이다. 초기의 novel들이 개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로빈슨 크루소]에서 잘 드러나듯 "자서전"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삶"보다도 "견해"가 월등하게 중요성을 띠고, 흡사 자유연상을 보고 있는 듯, 온갖 잡다한 여담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도 주로 성적인 이야기들로. 성적인 이야기들은 금기의 부분이 많아 또 많은 부분이 자체 검열을 거쳐 ****표시가 되어 있다. 트리스트람 섄디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6권이나 7권이 되어서 인데, 작중 화자인 섄디는 자신이 작품을 써나가는 데 드는 시간이 작품 속의 섄디가 나이가 드는 것보다 훨씬 더 걸리기 때문에(하루의 일을 제대로 써내려면 일 년이 걸린다, 이런 말을 화자가 했던가?*) 결코 자신의 일생을 적어나갈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스턴의 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기괴함으로 일단 주목을 받았고, 또 그의 글쓰기 방식의 독창성으로 많은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스턴의 이 책은 사실 그 전 세기에 발간된 로버트 버튼의 [멜랑콜리의 해부]라는 책(표면적으로는 의학 서적이지만 일종의 백과 사전이자 문학 작품)과 존 로크의 주저인 [인간 지성론],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관념 연합"이라는 개념 등의 영향이 컸다. 당대의 대표적인 비평가였던 새뮤얼 존슨은 이 작품의 인기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작품을 가장 위대한 소설 중의 한 편으로 꼽기도 했다.  

 

* 그러고 보니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인 [율리시즈]는 더블린에 사는 스티븐 디덜러스, 리오폴드 블룸 두 사람의 18시간 동안(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14년 6월 16일 아침에서 17일 새벽까지이고, 이 날은 조이스가 후에 자신의 아내가 된 노라 바나클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날이다)의 행적과 의식의 흐름을 다루고 있다(마지막 60페이지 정도는 블룸의 아내 몰리의 의식의 흐름이다). 그런데, 이 책의 초판은 730페이지에 달하고, 조이스는 이 하루를 그려내는데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을 몰두했다(사실 정확히 몇 년 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구상부터 치자면 더욱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섄디가 말한 것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조이스가 제시하는 블룸과 디덜러스의 하루를 좇아가다 보면 두 사람의 그 날의 체험과 그들의 과거를 그 때까지 혹은 그 이후에 나온 어떤 소설보다도 자세하게 알게 된다. 하지만 [트리스트람 섄디]를 읽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조이스가 이 두 사람의 내면 세계를 그려내기 위해 사용한 "의식의 흐름" 기법은 웬만한 철학책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저자로부터의 아무런 설명도 없이 우리는 등장인물과 대면하게 되고, 이 등장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퍼즐처럼 좇아가면서 하나하나 상황을 재구성해야 한다. 비유를 들자면 이전의 작가들이 독자에게 밥과 반찬을 다 차려놓고 "먹으세요"라고 했다면, 조이스는 쌀과 물, 각종 반찬의 재료들을 제공할 뿐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다 조이스는 가히 "언어의 천재"라 셰익스피어가 전 생애에 걸쳐 쓴 38편의 희곡에서의 어휘 수가 2만 8천 단어 정도인 데 반해, 그가 이 작품에서 쓴 어휘 수만 해도 3만 단어를 넘어간다고 한다. 대학원에 석사 과정 때 한 학기 동안 이 작품을 배웠다. 한 학기에 한 작품만 읽으면 된다는 것은 숫자만 놓고 볼 때에는 쉬운 작업 같지만, 나는 이 작품을 다 읽지 못했다(이 작품으로 박사 논문을 쓴 분 조차도 이 작품을 다 읽지는 못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품이 난해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는 작품인 것은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한창 때라고 할--그래도 다른 석사 학생들보단 나이가 좀 들었지만--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던 그 때, 도서관에 앉아서 하루 종일 이 작품을 읽어 나가던 시간은 정말로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요구하는 그런 작업이었고, 정말로 머리가 텅 비는 듯한 그런 느낌까지 안겨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읽으면 열 페이지 정도 읽을 수 있었던가? 조이스 이 나쁜 놈, 욕이 튀었던가? 언어의 마법사이자, 천재 앞에서 한 없는 경배감을 느꼈던가?

 

그렇다, 나는 아직도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여기 이 순간"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 연상을 쫓아가는 작업이 나에겐 흥미롭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몇 줄 읽다가 나가고 말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