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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대만(타이완) 여행(191223-31) - 대만 인구의 절반은 한국인이다 -8박 9일의 자유 여행(1)

by 길철현 2020. 1. 6.


1. 들어가기 전에


일상의 삶에서도 뭔가 뜻밖의 일들이 일어나고, 과분할 정도의 즐거움이나 기쁨을 맛보거나, 삶보다도 죽음이 더 가까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지만 대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오십 중반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거의 혼자 사는 생활을 해 온 나에게 있어서 글로 써서 남기고 싶은 일들은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났을 때인 경우가 많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그 여행기를 제대로 못 적고 있어서 안타까운데, 쉰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혼자 했던 외국 여행인 2016년 초의 2주 간의 영국 여행은 내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이었고, 그 황홀한 고독의 기억은 여행작가로 살 수 있다면, 이루지 못한 작가의 꿈과 내 안의 방랑벽을 동시에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요즈음은 너도 나도, 한 친구의 말을 빌자면 코딱지만한 한국 땅을 벗어나(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코딱지보다는 좀 크지. 적어도 콧구멍 정도는 된다, 고 했다) 외국 여행을 즐기고 있다. 가깝게는 국내 여행보다 가격이 오히려 저렴한 동남아나 중국 등 아시아 각국, 또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는 물론 우리와 대척점에 있는 남미의 여러 나라들까지 지구상 어디든지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20대 초반  안소니 퀸이 주연을 맡았던 페데리고 펠리니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길](La Strada)에 반하고, 이 영화의 원작이 아닐까 하는 오인으로 인해 접하게 된 마르틴손의 [길](Vägen till Klockrike)을 읽고서는 가족이고 대학이고 모두 뒤로 하고  무작정 떠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오랜 세월이 지나서 정신분석을 좀 공부하고 나서 이 두 작품의 '길'이라는 기표가 그 기의는 다르지만 내 성과 동일하여 나를 매혹시킨 부분, 그러니까 나르시시즘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하긴 존 스타인벡이 '한 번 떠돌이는 영원한 떠돌이'라고 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러한 '미지에의 동경'은 유별나게 나만의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나의 이러한 방랑벽을 "집시의 자손"이라는 시로 적기도 했다. 여행의 즐거움과 필요성은 제도권에서도 인정하여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앞에 '수학'이라는 두 글자로 분식을 하여 경주로, 부산으로, 속리산,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요즈음은 외국으로까지 수학 여행을 가는 모양이다.


나의 경우 이 '미지에의 동경'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서 초등 학교 시절부터 집 주변에서 시작하여 점차 그 범위를 넓혀 나갔다. 5학년 때인가 설날 세뱃 돈으로 받은 외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천 원 짜리 지폐을 깨기가 싫어서 외가인 대구의 신암동 새마을에서 당시 집이 있던 대명 3동까지 아마도 10킬로는 넘을 거리를 걸어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 산으로 들어섰다가 시외로 빠져나갈 뻔한 일, 그리고 6학년 땐 전교 1등을 한 상으로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사주었는데, 일요일 새벽에 일어나 그걸 타고 성서로 갔다가 역시 길을 잃어 엄청나게 헤매었던 일 등이 특히 기억이 난다. 이 두 가지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 여행은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일종의 모험을 의미한다(모험에는 당연히 고난도 따른다). 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여행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은 그 '여행'의 길 위에서 우리는 새롭고 신기한 모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본격적인 나의 여행은 대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고, 1995년에 내 차가 생긴 다음부터는 비록 코딱지만한 땅이지만 미지의 장소들을 속속들이 누비고 다녔다. 당시에는 내비게이션이 없었기 때문에 커다란 지도책을 하나 차에 싣고 도로 안내판을 지침삼아 목적지로 향하는 일은 약간의 긴장과 탐색의 즐거움을 동반한 것이었다(이 때 알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도로 체계이다. 도로는 크게 국도와 지방도로 나눌 수 있으며, 이 국도와 지방도는 특정 체계에 따라 번호를 매긴다). 이 국내 여행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1년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 여섯에 있었던 전국 일주이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침울한 가운데 나는 나의 애마를 몰고 서울을 출발하여 서해안과, 남해안, 동해안과, 북쪽의 민통선 부근, 그러니까 우리나라를 한 바퀴 뺑 돈 적이 있다. 6박 8일 동안의 이 여행의 백미는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것이었다. 원래 계획은 의신에서 출발해서 벽소령의 산장에서 자고 천왕봉으로 향하는 것이었는데, 입산 금지 기간이어서 자칫 벌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라, 나는 밤을 새워 지리산 능선을 따라 걸었다. 4월 말이라 추워봐야 얼마나 추울까, 하는 나의 안일한 예상과는 달리 눈도 녹지 않고 칼바람이 불어서 파카를 입긴 했어도 비박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중도에 플래시마저 나가서 눈빛에 의존하며 걸어야 했던 그 고독한 길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사고가 나지 않도록 긴장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자신과 많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경우에도 외국 여행은 큰 장벽이었다. 사실 요즈음 젊은 세대에 있어서 방학 중 외국 배낭 여행은 필수가 되다시피 했고, 아니 대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에도 부모님을 따라 외국 여행 한두 번 안 가 본 것이 오히려 이상한 그런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권을 발급받는다는 것, 비행기를 탄다는 것 등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나는 나의 이러한 성향을 내 모험심의 한계 내지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내 안의 폐쇄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나의 생각이 제도적인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해외 여행이 전면 자유화된 것이 1989년이었으니,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85년만 해도 '순수 관광 목적의 해외 여행'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그런 것이었던 듯하다. 주변에 해외 여행을 가는 사람도 없고, 해외 여행을 가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시대를 살다보니 해외 여행이란 불가능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내 머리에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해외 여행이 자유화되고 나서도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나는 그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첫 해외 여행은 2006년이 되어서야 상하이에서 근무하던 막내 제부의 초청으로 가족들과 함께 떠나면서 겨우 첫 걸음을 떼었다. 이른 아침 막내 여동생 가족이 거주하던 아파트 단지 둘레를 혼자 한 바퀴 돌다가 편의점에 들러 껌인가를 한 통 샀던 기억, 직원이 뭔가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추측에 내가 큰 돈을 내어 잔돈은 없냐는 말이었던 듯한데--어쨌거나 그 순간 외국의 낯선 거리를 혼자 거닐고 있다는 그 느낌은 새로움과 호기심과 두려움 등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계속)




[대만에 가게 된 것]    


여행의 이유. Travels with Charley. 길 영화 마르틴손. 방랑 헤세. 역마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