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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황석우 - 벽모의 묘

by 길철현 2020. 3. 12.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터 되는

사막의 수풀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다보면서

(이 애, 너의

온갖 오뇌(懊惱), 운명을

나의 끓는 샘 같은

()에 살짝 삶아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의

태양이 되기만 하면,

기독(基督)이 되기만 하면.)


(감상)

일단 이 시에서 주목이 가는 것은 "--로서"라는 조사이다. 이 조사가 지금처럼 "지위나 신분 자격 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고양이와 그늘은 일종의 동격 관계가 성립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의미는 고양이가 "내 오뇌에 찬 영혼에 사랑을 줄 수 있지만, 그 전에 내 마음이 구원자(기독 = 그리스도 = 메시아 = 구원자) 같은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정도가 된다. 그 다음에 고양이가 화자를 "애"라고 부르는 것에도 눈이 간다. 하지만 시는 전체적인 의미 이상의 무언가를 무리에게 전해준다고 보기는 힘들다. "끓는 샘 같은 / 애"는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순수한 우리 말과 한자어가 어색하게 결합되어 있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비유 자체도 어색하지만 "애" 대신에 "사랑"이라고 썼다면 그나마 덜 어색할 듯하다.


(챁조)


박팔양 : 모든 오뇌(懊惱)를 없이하여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노래


정한모: '파란 털의 고양이' '끓는 삶(샘)같은 애'와 같은 모호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불일치에서 오는 관념의 몽롱성과 소재의 불투명성, 그리고 애매한 상징성에서 우러나온 난해성은 정한모의 말대로 한국 초기시의 위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출처] 황석우 : 시 <벽모의 묘>|작성자


전영택 :  전영택(田榮澤) 등은 이 시편을 난해(難解)한 시로 평가


조남익 :

서구의 지적(知的)인 시를 시도하여 퇴폐주의적 바탕에다 상징주의적 수법을 구사한 이 시는, 이른바 난해시의 표본으로서 1920년대에 벌써 논란을 일으킨다. 박팔양(朴八陽)은 모든 오뇌(懊惱)를 없이 하여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노래했다고 지적했고, 전영택은 난해한 시로 단정했다. 그리하여 한국 신시사상 최초의 논쟁이라 볼 수 있는 몽롱체(朦朧體) 시비가 그에 의해 이루어진다. 현철(玄哲)이 상아탑이 쓴 월평(月評)을 비판하자, 그는 주문치 아니한 시의 정의를 일러주겠다는 현철군에게로 시작되는 반박으로 응수했고, 현철도 재반박을 한다. 나중에 두 사람은 맞부딪쳐 주먹다짐까지 오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상아탑은,

영겁(永劫)을 쥐는 상상적 예술, 본질적 예술이야말로 우리의 지지코자 하는 상징주의 예술이다.”(‘폐허창간호)

라는 그 나름의 이론적 배경에 있었고, 그의 시에서 난삽(難澁)한 한자어 사용을 제외한 현대 감각적인 표현은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연상케 하는 점이 있다. ‘는 파우스트, ‘파란 털의 고양이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로 비교되었다고 할까. 다만, <파우스트>에서는 악마가 파우스트 박사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되, 나중엔 파우스트의 영혼을 내주기로 한 데 대하여 이 시에서는 파란 털의 고양이가 자신의 세계를 구원해 준다면, 시인의 오뇌를 해소시켜 주겠다고 한다.

이 시는 전반부 6행 이후가 괄호 안에 묶여져 있다. 괄호의 내용은 파란 털의 고양이가 시인의 영혼에게 속삭이는 영혼의 대화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구원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보인 이 시의 세계는, 상아탑이 소개한 일본 시단의 2대 경향’(‘폐허창간호)에서 상징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

천국과 지옥의 결혼, 곧 영육합치(靈肉合致)의 대구희경(大歐喜境)을 체현(體現)코자 하는 노력이다

등의 언어를 보면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그가 이 난해시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감상이나 표현미 따위가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문제의 접근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이 본질적 의미로만 갔을 때, 거기엔 밝은 서정의 세계가 아니라 관념적 환상의 세계이며, 허무주의, 절대자아(絶代自我) 등 관념의 암석(巖石) 골짜기를 방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에 많이 나오는 난삽한 한자어 사용과도 무관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걸어온 시인의 생애로 볼 때, 현대 감각적인 우수한 일면을 지닌 시인이었으면서 그는 난파(難破)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대진(白大鎭)낙백(落魄) 시인 황석우’(1963현대문학’ 1월호)란 말을 썼으며, 김윤식 교수는 절대의 탐구에 실패하여 <자연송> 같은 기괴한 시로 전락(轉落)’(1920년대 시 장르 선택의 조건‘)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신시 초창기에 그가 끼친 문학사적문단사적 공적과 영향은 심대하여 근자에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조남익 : <현대시 해설>(세운문화사.1979








<시 모음>




벽모(碧毛)의 묘(猫)

 

                                             황 석 우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 터 되는

사막의 위 숲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이애, 너의

온갖 오뇌(懊惱), 운명을

나의 끓는 삶 같은

애(愛)에 살짝 넣어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의

태양이 되기만 하면

기독(基督)이 되기만 하면.”

 

 

       봄

 

                                            황 석 우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나무 나무에 바람은 연한 피리 불다.

실강지에 날 감고 날 감아

꽃밭에 매어 한 바람 한 바람씩 땡기다.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너와 나 단 두 사이에 맘의 그늘에

현음(絃音) 감는 소리.

새야 봉우리야 세우(細雨)야 달야.

 

 

    초대장

 

                                               황 석 우

 

꽃동산에 산호탁(珊瑚卓)을 놓고

어머님께 상장을 드리렵니다.

어머님께 훈장을 드리렵니다.

두 고리 붉은 금가락지를 드리렵니다.

한 고리는 아버지 받들고

한 고리는 아들딸, 사랑의 고리

어머님이 우리를 낳은 공로훈장을 드리렵니다.

나라의 다음가는 가정상, 가정훈장을 드리렵니다.

시일은 어머니의 날로 정한

새 세기의 봄의 꽃.

그 날 그 시에는 어머니의 머리 위에

찬란한 사랑의 화한을 씌워 주세요.

어머님의 사랑의 공덕을 감사하는 표창식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개임을 가리지 않음이라.

세상의 아버지들, 어린이들

꼭, 꼭, 꼭 와주세요.

사랑의 용사,

어머니 표훈식에 꼭 와 주세요.

 

 

      석양은 꺼진다

 

                                                      황 석 우

 

젊은 신혼의 부부의 지저귀는 방의

창에 불 그림자가 꺼지듯이 석양(夕陽)은 꺼진다.

석양은 꺼진다.

애인(愛人)아, 밤 안으로 흠뻑 웃어 다고,

나의 질소(質素)한 처녀의 살 같은 깨끗한 마음을 펼쳐서

네 눈이 부시게 되도록 너에게 뵈이마.

내 마음에는 지금 받은 황혼에 맥 풀린 힘없는

애통한 접문(接吻)의 자욱이 있을 뿐이다.

 

애인아, 밤 안으로 흠뻑 웃어 다고.

나의 연한 마음이 퍼져

가을의 향기로운 석월(夕月)을 싸드키

너의 부대끼고 고적(孤寂)한 혼을 싸 주마.

애인아, 밤 안으로 흠뻑 웃어 다고.

너의 웃음 안에 적은 막을 치고

지구의 끝에서 기어 오는 앙징한 새벽이

우리의 혼 앞에 돌아올 때까지,

너와 이야기하면서 꿀을 빨드키 자려 한다.

 

애인아, 밤 안으로 흠뻑 웃어 다고.

너의 그 미소는 처음 사랑의

뜨거운 황홀에 턱을 고인

소녀의 살 적가를 춤추어 지내는

봄 저녁의 애교 많은 바람같고,

또 너의 그 미소는

나의 울음 개인 마음에 수(繡)논 적은 무지개 같다.

 

애인아, 밤 안으로 흠뻑 웃어 다고.

나의 가장 새롭은 황금의 예지의 펜으로

너의 영롱(玲瓏)한 웃음을 찍어,

나의 눈[雪]보다 더 흰 마음 우에

황혼의 키쓰를 서언(序言)으로 하여,

아아 그 애통한 키쓰의 윤선(輪線) 안에

너의 얼굴을

너의 기인 생애를

단홍(丹紅)으로, 남색으로, 벽공색(碧空色)으로

너의 가장 즐기는 빛으로 그려 주마.

 

애인아, 밤 안으로 흠뻑 웃어 다고.

내 마음이 취해 넘어지도록

너의 장미의 향기같고

처녀의 살 향기와 같은 속심있는 웃음을 켜려 한다.

애인아, 웃어라, 석양은 꺼진다.

 

애인아, 밤 안으로 흠뻑 웃어 다고.

네 웃음이 내 마음을 덮는 한 아지랑이일진댄,

네 웃음이 내 마음의 앞에 드리우는 한 꽃밭일진댄

나는 그 안에서 내 마음의 곱은 화장을 하마.

네 웃음이 어느 나라에 길 떠나는 한 바람일진댄, 구름일진댄

나는 내 혼을 그 우에 가비야웁게 태우마.

네 웃음이 내 생명의 상처를 씻는 무슨 액(液)일진댄,

나는 네 웃음의 그 끓는 감과(도가니)에 뛰어 들마

네 웃음이 어느 세계의 암시, 그 생활의 한 곡목의 설명일진댄

나는 나의 귀의 굳은 못을 빼고 들으마,

네 웃음이 나에게만 열어 뵈이는

너의 비애의 비밀(秘密)한 화폭(畵幅)일진댄,

나는 내 마음이 홍수가 되도록, 울어주마,

애인아, 웃어라, 석양은 꺼진다.

 

 

        밤

 

                                              황 석 우

 

달개고 꽃지적이는 동산에

고는 밤의 접문(接吻)을 밧다.

 

나의 가슴에 눈물이 괴여가다

피곤과 뇌(惱)에 부닥이던 만유(萬有)는

밤의 손바닥에 어리만지며

고요히 자다. 고요히 자다.

 

 

     불의 우주

                                                    황 석 우

 

별들도 불

태양도 불

별들과 태양은 하늘 우의 불의 폭죽(爆竹)!

지구도 불의 세계에서 타락해 나온

뱃속에 불을 통통히 배인 말썽거리의 색씨!

오오 우주는 한 개의 불구렁[抗] 속!

우주는 곧 불길로 틀어 된 성운(星雲) 구멍

그 가운데는 별들과 태양이 지질현상(地質現象)과 같이

크고, 적어지고 죽고 살고 변환복잡(變幻複雜)

암성(暗星)들은 곧 별, 태양들의 시체(屍體)!

그러므로 금후(今後)의 우주는 한때는

불 꺼진 캄캄한 램프와 같이 되기도 하리라

그러나 이 성운(星雲)의 구멍이

어느 큰 화산의 뱃속인지

어느 죽은 별의 지심(地心) 속인지 무엇인지

또 그 이전의 상태는 미지(未知), 미지(未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