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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토토의 "아프리카"-- 일 해석

by 길철현 2021. 6. 13.

지금 나는 이 글을 토토(Toto)의 "아프리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쓰고 있다. 요 몇 달 공부할 때 유튜브에서 좋아하던 옛날 팝송을 찾아서는 무한반복으로 듣는 버릇이 생겼다. 주변이 너무 고요하고 적적해서 백색 소음으로 틀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가사에 신경이 쓰일까 봐 주로 클래식을 들었는데 팝송도 방해가 되기보다는오히려 집중력을 높여 준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박사 논문의 대상인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작품 활동을 했으며, 이 시기는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주의가 그 정점에 다다렀던 때이기도 하다. 콘래드는 작가가 되기 전에 선원 생활을 이십 년 가까이하면서 말 그대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다녔기 때문에, 그의 작품의 배경도 전 지구적이라고 할 정도로 광활하다. 그의 첫 두 장편인 [올메이어의 우행](Almayer's Folly)과 [섬들의 추방자](An Outcast of the Islands)는 지금의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섬이 주 배경이고, 그의 잘 알려진 중편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은 아프리카의 콩고 강 유역이 주 배경이다. 나는 이 세 작품과, [어둠의 심연]과 배경이나 주제 등이 유사한 단편 "진보의 전초기지"("An Outpost of Progress")를 논문에서 주로 다루기로 하고, 논문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연대순으로 하자면 첫 두 장편을 먼저 다루는 것이 맞지만, 그래도 잘 알려진 작품인 [어둠의 심연]부터 준비하는 것이 수월할 듯하여 [어둠의 심연]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현재는 [어둠의 심연]보다 두 해 먼저 출판된 "진보의 전초기지"에 대해서 쓰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글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좌충우돌하다가--논문을 마친다 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지친 나이에 지쳐버린 것인지 지난 몇 년간은 공부가 잘 되지 않았으나, 올해가 논문 연한이라 올해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밥이 되든 마쳐야 한다--이제야 궤도에 막 발을 올렸다고 해야 할까?

 

아프리카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 이 두 작품에 대해 글을 쓰려면 아프리카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은 있어야 하기에--논문의 주제가 작품의 구성이나 문체 등을 다루는 내재적 접근 방식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 특히 제국주의적 요소들과의 연관성 내에서 작품을 파악하는 외재적 방식을 주로 원용하고 있으므로 더더구나--아프리카에 대해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아프리카에 대해 내가 피상적으로 지니고 있던 생각들 상당 부분이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 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왜곡된 이미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의 편견들이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으로 만들고, 아프리카인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열등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큰 틀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이러한 이념과 이미지가 좀 더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대해 책과 동영상 등을 통해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프리카 대륙에 발 한 번 내디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의 생각들도 어쩌면 현실적이지 못한 관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중에 기회가 닿아 좀 더 실제적으로 아프리카를 체험하게 된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좀 더 현실감 있는 글을 쓸 수도 있으리라.

 

그렇더라도 루츠 판 다이크가 쓴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청소년 용으로 나온 것이라 단순하지만 그래도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나 정수일의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이 책은 기본적으로 여행기이지만 필자의 광범위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대륙 전체와 아프리카 각국의 독립 투쟁에 앞장섰던 정치가들을 잘 조망하고 있다)는 아프리카를 새롭게 인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다른 어떤 책보다도 나이지리아 출신 소설가이자 교수였던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의 소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Things Fall Apart)는 유럽 열강들이 밀고 들어오기 전의 아프리카 한 지역의 삶이 어떠했는지, 또 유럽이 밀고 들어오면서 그 지역이 어떤 격변을 겪게 되었는지를 아프리카인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어서 가슴 깊이 와닿았다(곤혹스러운 것은 아체베가 콘래드를 "지독한 인종주의자"(bloody racist)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콘래드의 소설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억압받는 아프리카인들을 옹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를 해거드(Haggard)나 키플링(Kipling) 같은 제국주의적 담론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앞장선 작가들과 동류로 파악하고 있어서 이 문제에 답을 찾아보는 것이 논문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유럽은 아프리카를 야만의 땅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아프리카만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고, 아시아의 국가들도 그렇게 불렀으며, 따라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유럽 중심적인 시각에서 이국의 풍습과 신앙은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대체로 야만적이라고 몰아붙였던 것이다(아프리카든, 아시아든, 유럽이든 문제가 없는 사회는 물론 없었다). 하지만 지난 세기 양차 세계 대전 중에 보였던 유럽인들의 잔혹성, 유대인의 대학살은 문명의 중심부에 그들이 말하는 야만이 도사리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그래서 벤야민(Benjamin)은 "문화의 기록이, 그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역사철학테제])라고 단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독일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문화 비평가였던 그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달아나다 결국에는 1940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검은 대륙'이라는 신화 혹은 미신은 19세기 유럽의 발명품으로 보는 것이 현재의 주된 추세이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는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듯이 현생 인류의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곳이자, 그 광대함과 지역적 다양성으로 인해 단일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대륙이다(아시아를 단일하게 정의 내리려는 생각은 누구도 감히 하지 않으리라. 아프리카도 아시아 다음으로 큰 대륙이다). 또 유럽의 문명과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고립된 지역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문명을 이어 나왔던 곳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인종의 본거지로서의 검은 대륙이라는 이미지는 유럽인들이 덧씌운 것이고, 1960년대에 들어서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하기 이전까지 유럽과 미국의 각종 책자나 미디어가 유포한 이러한 이미지가 강한 인상을 남겨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토토의 "아프리카"와 관련해서는 이 마지막 부분을 중심으로 지적해 보려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유명한 이집트나, 일찍이 4세기경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오랜 기간 동안 '악숨 왕국'이라는 독자적인 왕국을 유지해 온 에티오피아, 서기 600년 무렵에 성립된 서부 아프리카 최초의 왕국인 가나 왕국”(루츠 판 다이크 96), 1100년 경에 들어선 뒤 1480년 두 왕국으로 분열될 때까지 황금과 구리 같은 지하자원을 수출하고 동부 아프리카의 항구 도시들을 통해 중국의 목화와 도자기도 수입하”(루츠 판 다이크 99)면서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짐바브웨(지금의 짐바브웨라는 국명도 중세 국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짐바브웨의 남아있는 거대한 석조 유적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기원을 둘러싸고 유럽인들은 이 지역 아프리카인들이 이러한 유적을 남겼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집트인의 후예라거나,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왕의 후예, 심지어 이슬람 문명의 영향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재 그러한 주장은 더 이상 받아 들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에 나는 [짐바브웨를 아시나요]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에 대한 글을 써보기도 했다), 이 밖에도 가나의 뒤를 이어 1235년에 등장한 말리는 무역의 중심지이자 학문 분야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슬람 제국인 송가이(1464)와, 베닌 왕국, 콩고 왕국, 이슬람 국가인 카넴 보르누 등도 주목할 만한 국가들이다(루츠 판 다이크 96-97).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동부 해안 지역에도 이미 기원후 70년경에 그리스 상인들이 지금의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에 이르는 지역까지 해상교역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근대에 들어와서 유럽이 아프리카에 침투해 들어온 것과 유사하게 “7~8세기 이슬람 시대에 들어와서는 아랍 무슬림들이 선교 및 교역 활동을 위해 사하라 이남 지역과 동부 해안 일대까지 밀고 들어왔다(정수일 20). 이러한 교역은 아랍권을 넘어서서 멀리 인도와 중국까지 이어졌고, “15세기경 [지금의 탄자니아 앞에 있는 섬인] 킬와(Kilwa, [이곳에도 당시 강력했던 국력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 남아 있다])에서부터 위로 [소말리아의] 모가디슈(Mogadishu)까지 사이의 해안을 따라 37개의 도시가 형성될”(김윤진 [동아프리카사] 40) 정도였다.

 

아프리카 이야기는 이 정도로  그만 접고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된 듯하다. 토토(Toto)는 1976년에 결성된 미국의 록/팝 그룹으로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내 연배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 그룹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젊은 사람들도 그들의 히트곡인 "아프리카"가 다시 유행하는 바람에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위키피디어'를 보고 서야 알게 되었다. 최근 팝송들은 그냥 흘려듣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팝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상황이고, 그래서 난 당연히 이 오래된 그룹이 해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그룹의 최전성기는 1982년으로, 이 해에 나온 [Toto IV]라는 앨범에서는 "Rosanna", "Africa", "I Won't Hold You Back" 등이 모두 빌보드 싱글 차트 10위 안에 들었고, 그중에서도 "Africa"는 연속 5주간이나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앨범은 음악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래미 상에서 7개 부분이나 수상을 했다. 이 당시 고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였는지(지긋지긋한 이 놈의 공부) 팝송에 젖어 살았고, 내 나름의 차트--길보드 차트라고나 할까--를 만들기도 했다. 토토의 음악 스타일이 내가 딱히 좋아하는 그런 것은 아닌데다(토토가 당시 한국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내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Africa"보다는 그나마 "Rosanna"가 좀 더 와닿았던 그런 느낌이다(오늘 다시 들어본 이 노래의 느낌은 그런대로 좋은 편이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쿵따쿵따하는 드럼 소리가  키보드, 기타 소리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큰 기복 없이 전개되는 음이 흥겹다. 하지만 음악에 내가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이 이 노래의 음악적 차원은 아니고 가사에 관한 것이다.). 그때 차트를 적어두었던 공책들(워낙 오랜만에 찾아보는 것이라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사라진 줄 알았으나, 비닐봉지에 열다섯 권의 공책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을 찾아 펼쳐보니 토토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토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다시 한번 살펴보니 83년 3월 26일부터 4월 9일까지 3주 동안 4위에 머무른 것이 확인된다. 왜 이런 엉뚱한 짓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는지?]

 

어쨌거나 토토의 노래 중 이 "아프리카"라는 노래는 제목이 제목인지라 내 논문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써야 할 말들이 잘 떠오르지 않아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일단 살펴보고 있는 중이므로--예전에 얼핏 한번 가사를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사 내용이 잘 들어오지도 않고, 단순한 사랑 노래인 듯한 데다가 아프리카와의 관련성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여기서 다시 한 번 옆길로 새본다. 내 석사 논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나는 한글 번역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논문에서는 그냥 [워더링 하이츠]라고 음독을 했다)을 유아가 어떻게 엄마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이루는가를 설명한 마가릿 말러(Margaret Mahler)의 '분리-개별화 이론'이라는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접근을 했는데, 그때 케이트 부쉬(Kate Bush)가 부른 "워더링 하이츠"라는 노래에서 다소 도움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아프리카"라는 노래에 집중하게 된 배경에는 그런 기대도 있는 듯하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 --예전에 한 번 살펴봤다는 것을 까먹고 있다가 도중에 그랬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이 노래를 한 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라서, 가사를 보면서 듣는데, 해석이 잘 되지 않았다. 영어가 항상 나를 애를 먹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가요 가사가 잘 이해가 되지 않다니, 오기가 생겨서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하게 읽으면서 인터넷에 올라온 번역을 참조하여 새로 수정까지 했다(이 와중에 알게 된 것은 위저(Weezer)라는 그룹이 이 노래를 36년 만인 2018년에 리메이크를 했고, 덩달아 밈(Meme) 운운하는 기사들이 달릴 정도로 원곡도 다시 상당히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설명을 좀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가사 원문과 인터넷의 번역을 수정한 내 번역을 전체적으로 올린다.  

 

I hear the drums echoing tonight
But she hears only whispers of some quiet conversation
She's coming in, 12:30 flight
The moonlit wings reflect the stars 
that guide me towards salvation
I stopped an old man along the way
Hoping to find some long forgotten words or ancient melodies
He turned to me as if to say, 
 "Hurry boy, it's waiting there for you“



[refrain]
It's gonna take a lot to take me away from you
There's nothing that a hundred men or more could ever do
I bless the rains down in Africa
Gonna take some time to do the things we never had

The wild dogs cry out in the night
As they grow restless, longing for some solitary company
I know that I must do what's right
As sure as Kilimanjaro rises like Olympus above the Serengeti
I seek to cure what's deep inside, 
frightened of this thing that I've become


[refrain]
It's gonna take a lot to drag me away from you
There's nothing that a hundred men or more could ever do
I bless the rains down in Africa
Gonna take some time to do the things we never had

Hurry boy, she's waiting there for you



It's gonna take a lot to drag me away from you
There's nothing that a hundred men or more could ever do
I bless the rains down in Africa
I bless the rains down in Africa
(I bless the rain)
I bless the rains down in Africa
(I bless the rain)
I bless the rains down in Africa
I bless the rains down in Africa
(Ah, gonna take the time)
Gonna take some time to do the things we never had



lyrics by David Paich/Jeff Porcaro

 

 

오늘 밤 난 울려 퍼지는 복소리를 듣고 있어

하지만 그녀는 승객들이 조용히 속삭이는 대화만 듣고 있지

그녀는 12시 30분 비행기로 오고 있고

달빛 비친 날개는 별을 비추어

구원으로 나를 인도하지

난 도중에 노인을 멈춰 세웠어

오랫동안 잊고 있던 단어나 고대의 멜로디를 찾길 바라며

그는 돌아서서 내게 말하는 것 같았어

"서두르게, 젊은이. 그게 저기서 자넬 기다리고 있다네"

 

[후렴구]

너에게서 날 떼어놓는 건 엄청 어려운 일

백 명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

우리가 해보지 못했던 걸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걸

 

밤엔 들개들이 울부짖어,

고독한 동반자를 갈망하며, 점점 초조해지면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아

세렝게티 위로 올림푸스처럼 솟아오른 킬리만자로같이 확실히 말이야

내면 깊이 있는 것을 치유하려 해,

내가 되어버린 이것이 두려워서 [내가 이것이 되어버린 것이 두려워서]

 

[후렴구]

너에게서 날 떼어놓는 건 엄청 어려운 일

백 명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

우리가 해보지 못했던 걸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걸

 

서두르게, 젊은이. 그녀가 저기서 자넬 기다리고 있다네

 

너에게서 날 떼어놓는 건 엄청 어려운 일

백 명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

(난 비를 축복해)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

(난 비를 축복해)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

(아, 시간이 좀 걸릴 걸)

우리가 해보지 못했던 걸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걸

 

(인터넷의 번역을 참조하여 다소 수정)

 


일단 원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부분만을 설명해 본다면, 1절의 경우는 아프리카에 있는 젊은 남성이 비행기를 타고 오고 있는 여성을 마중이라도 나가는 그런 장면이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그녀가 타고 있는 비행기의 날개에 별빛이 반사되고, 그 별(빛)은 여인이 불러일으키는 연상과 함께 구원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것은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어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에서는 앞부분과는 잘 연결이 안 되는 (아프리카) 노인이 등장한다. 이 노인에게서 "잊고 있던 단어나 고대의 멜로디를 찾길 바라"는 것은 아프리카를 '시원적인 이미지'와 연결시킨다는 의미 정도로 파악해 볼 수 있다. 거기다 노인은 '그녀가' 아니라 "그게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게"는 제목과 연결짓는다면 당연히 '아프리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1절은 여인을 이야기하는 부분과 아프리카를 이야기하는 부분으로 양분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고, 잘 연결이 되지 않는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여인이 아프리카로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렴구에서는 우선 "너"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애매하다. 앞부분에 나오는 "그녀"일까? 아니면 제목의 "아프리카"를 의인화해서 부르는 것일까? 작사가들인 데이비드 페이치(David Paich)와 제프 포카로(Jeff Porcaro)는 이 애매성과 중의성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는 더욱 알쏭달쏭하다. 비가 잘 오지 않는 지역에 모처럼 비가 내리는 것을 축복하는 의미라면 아프리카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 다음 구절의 "우리"는 '나'와 '그녀'를 통칭하는 것이고, 아프리카는 '전에 해볼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모험의 땅이자 기회의 땅'으로 제시된다.

 

2절의 앞부분도 맥락을 잡기는 마찬가지로 어렵다. 외로움 때문에 밤에 울부짖는 들개들을 내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리카온이라는 들개가 아프리카에 사는 것은 맞지만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상징성이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은 아닌데, 아무리 연상을 이어나가 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이 이미지를 '나'와 내가 기다리고 있는 "그녀"와 병치시킨다고 해도 썩 잘 와닿지 않는다.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아"는 상투어에 지나지 않고, 너무나도 막연하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세렝게티 위로 올림푸스처럼 솟아오른 킬리만자로같이 확실히"라는 구절에서는 이중의 직유가 사용되고 있는데 정말 어색한 비유이다. 거기다 킬리만자로 산은 세렝게티 평원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세렝게티 위로 솟아"올라 있다고 표현한 것이 아프리카에 대한 무지의 표현이 아니라면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일까(유튜브 The Mestre 참조)? 그다음에 나오는 "이것"이나, "내면 깊이 있는 것을 치유한다"는 말도 막연하다. 2절에서도 앞 두 행과 그다음 부분은 잘 연결이 안 된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는 후렴구가 반복이 되는데, 앞서 "그게"가 이제는 "그녀"로 은근슬쩍 바뀌어 있다.

 

전체적으로 "아프리카"의 가사는 전후 맥락 연결이 잘 안 되고, 막연하다. 작사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 없고,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어도 구절이 아름다울 수는 있는데 그것도 아니다. 가사가 좋아서 대중가요를 듣는 경우도 있지만, 음악에서 가사보다 멜로디나 리듬감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이 노래는 잘 보여준다. 더 이상의 해석이나 연상을 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고, 이 노래의 가사 자체만으로는 더 이상의 확실한 해석이나 연상을 별로 허용하지 않는다.   

 

문학비평의 방법 중에 신비평(New Criticism)이라는 것이 있다. 1920년대 정도에 시작해서 1950년대, 6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비평 방식으로, 내가 대학교를 다녔던 80년대에는 영문학과의 대부분의 교수들이 신비평의 세례를 받은 분들이었기 때문에, 작품 비평의 주류를 이루었다. 위의 해석은 어설픈 대로 신비평적 방법을 원용해 본 것이다. 소리의 차원은 손을 대지 못하고 의미의 차원만 다룬 것이지만. 그런데, 이 신비평의 원칙 중 "의도론적 오류"(intentional fallacy)는 '작가가 의식적으로 표명하는 의도에 집착하지 말고, 작품 자체를 꼼꼼하게 파악'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작사가의 설명 없이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작가의 해명 몇 개를 '위키피디어'에서 옮겨 본다(물론 그럼에도 수사관이 피의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작가도 언제나 자신의 작품을 합리화하려 하기 때문에 독자가 항상 어느 정도의 유보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이 노래의 첫 번째 아이디어와 가사는 데이비드 페이치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공동 작사가인 "제프 포카로는 이 노래 이면에 있는 아이디어를 '백인 소년이 아프리카에 대한 노래를 쓰려고 하지만, 거기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텔레비전에서 본 것이나 과거로부터 기억하는 것만 말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어디에 선가는 작사가들 자신도 '뚜렷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는 말도 있었다.] 

 

"페이치는 '80년대가 문을 열었을 때 난 TV에서 밤늦게 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모두 아프리카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과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내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했고(moved) 동시에 섬뜩하게 했으며, 그 장면들은 내 머리를 떠나려 하질 않았다. 난 내가 거기에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무엇을 할까 등을 상상해 보려 했다." 

 

또 "2015년에, 페이치는 이 노래가 단지 개인적인 로맨스가 아니라, 한 남자의 대륙에 대한 사랑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8년에는, 이 노래는 고독한 선교사를 만나러 날아가는 한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페이치는 가톨릭계 학교에 다녔고, 선생님들 중 몇 분은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이 사실이 "난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해"라는 구절 이면의 영감이 되었던 것이다."   

 

페이치와 포카로의 말들, 특히 페이치의 말은 전후 연결이 잘 되지 않는 가사를 그래도 어느 정도 꿰어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이들의 말을 참조하여 가사를 재해석해본다(앞서 말했지만 어느 정도 유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이 두 사람은 아프리카에 가본 적이 없을뿐더러, 텔레비전 등에서 전해주는 피상적 지식 정도만 있기 때문에, 그들의 가사는 "과거로부터 기억하는 것"에다 상상력을 입힌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가사가 구체적인 이미지와 추상적인 말의 혼합으로 혼란스럽다. 그다음 "나"는 아프리카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는 "고독한 선교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가사 내에서 그걸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굳이 들자면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한다는 구절 정도)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다음에 생각해 볼 것은 "나"와 "그녀"의 관계이다. 남녀의 관계라면 특히 대중가요에서는 대체로 연인 관계를 연상하기 때문에, 이 노래에서도 생각이 그렇게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처음에 내가 이 노래의 가사를 보았을 때 이 노래를 "아프리카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랑의 노래"로 읽은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런데, 이 노래를 꼼꼼하게 읽어 본 지금의 결론은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일 수도 있으나, 예외적으로 단순히 뜻이 맞는 지인이라든지, 친척이라든지 하는 관계로 상정해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초점의 중심이 두 사람의 관계보다는 맥락이 불분명한 대로 아프리카 대륙 자체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그럼에도 작사가들이 의도를 했든 하지 않았든 가사는 두 사람의 관계도 불가분으로 따라온다). 후렴구의 "너"가 "그녀"인지, 아니면 "아프리카"인지 헛갈리게 한 것은 꿈 작업에서 흔히 일어나는 "압축"(은유)의 기법이 사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이것의 의미는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그리고,  첫 두 행이 불러일으키는 연상은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와, 고요하고 평온한 유럽이나 미국이라는 고정관념이다. 1절과 후렴구까지 정리를 해보자면 화자(선교사이거나 아니면 아프리카를 위해 뭔가 하려고 하는 사람)는 아프리카에서 삶의 신비에 대한 답을 구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애착이 강하며, "아프리카에 내리는 비를 축복"할 정도로 아프리카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며, 아프리카에서 이전에 해보지 못한 일들을 그녀와 함께 해나가길 기대하고 있다(인터뷰 기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아프리카인들이 겪는 고통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있다).

 

1절과 후렴구는 나름대로 이렇게 풀어볼 수 있는데, 2절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해석이 성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건은 '밤에 울부짖는 들개들'을 '아프리카에서 고독하게(지금까지 그녀, 즉 동반자가 없기 때문에) 뭔가를 해나가는 나'의 치환(환유)된 이미지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나머지 난점은 "이것"이다. "이것"을 페이치의 말 중에 나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과 고통"에 연결시킨다면, 텔레비전에서 본 그러한 장면들이 준 충격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에서(혹은 아프리카를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 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다분히 끼워 맞추기이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작사가들은 자신들의 느낌에 따라 그 의미의 명료성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가사를 써나간 듯이 보이기 때문에,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았다.

 

지금까지의 해석은 작사가들이 아프리카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밖에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호의나 안타까움을 가지고 가사를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작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러한 해석보다도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너'가 "그녀"와 "아프리카"를 압축시킨 듯한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효과이다. 또 가사에서  "그게"(아프리카)와 "그녀"로 분리되어 나오기도 한다 ("서두르게, 젊은이. 그게 저기서 자넬 기다리고 있다네"와 "서두르게, 젊은이. 그녀가 저기서 자넬 기다리고 있다네"로). 다시 말해 "아프리카"와 "그녀"는 분리되어 나오기도 하고, 하나로 중첩되어 나오기도 하면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왜 일까? 작사가들은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 이렇게 혼란스럽게 표현했을까? 아프리카에 대해서 피상적인 생각밖에 없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을 여성에 비유하여 성적인 색채를 부여하고,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예전 유럽인들의 담론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글의 도입부에 지적했듯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 그 정점에 이르렀던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기에 유럽인들은 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문명화의 의무"를 이념으로 표방하였다. 열등한  타인종들의 야만적인 풍습을 교화하고 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한다는 명복 하에 실제로는 원주민을 억압하고 학살했던 것이다(물론 부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식민지의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 서구의 발달된 기술 문명이 식민지에 도입된 부분은 어쨌거나 도움이 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현재 식민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라는 사실만으로도 식민 지배가 부정적이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타인종을 유럽인들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는 인종주의는 책과 다른 대중매체를 통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파되었고 전파자인 유럽인(나중에는 미국인)은 물론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까지도 오랜 기간 자명한 사실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일찍이 "오늘날 그 범주 체계 안에 인종사상이 깊이 침투되어 있지 않은 학문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누구도 인종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이고 나 역시도 그러하다. 이 점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누누이 지적하는 바이기도 하다. 노래의 가사에서 여성과 아프리카 대륙이 분리되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하는 현상은 작사가들의 의식적인 호의와, 그들이 자라면서 받아왔던 아프리카의 왜곡된 이미지로 인해 세뇌된 면 사이의 갈등이 불러일으킨 혼란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본다.

 

아프리카 대륙을 여성에 비유하여 성적인 색채를 부여하고,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면은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다. 동물 박제, 얼룩말의 가죽 등 아프리카를 연상시키는 물건들로 장식된 도서관에서 페이치가 책을 뒤적이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뮤직비디오에는 창과 방패를 든 아프리카인이 등장하는데, 이 뮤직비디오가 198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가해 볼 때, 그때까지도 고정된 아프리카인의 이미지가 원시적인 '미개인'이고 '야만인'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80년대 아프리카에서 창과 방패를 든 아프리카인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광경일까? 아프리카와 관련된 책을 찾고, 아프리카라고 적힌 책 위에서 연주를 하는 장면 등은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를 탐험한 다음, 아프리카를 식민화한 지난 역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대상에 대해 지식을 쌓고 그것을 소유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도서관으로 잠입한 아프리카인이 창을 던지자 쌓인 책들이 넘어져 불이 나는 장면, 사서로 보이는 여성의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등은 다분히 성적인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이 뮤직비디오에는 이전의 아프리카 담론에서 흔히 되풀이되었듯 아프리카와 "원시성, 미개성, 야만성, 성적 욕망" 등을 연결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지금 내 생각에는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화를 정당화화하기 위해서 "유럽인들 자신의 가장 어두운 본능을 투사하려는 심리"(Brantlinger)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도 몰랐고,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도 있긴 하지만, 토토의 "아프리카"가 나에게 전해 준 말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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