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는 그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진가를 인정받은 전형적인 "미운 오리 새끼"이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일부는 지금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들도 언젠가는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찬란하게 빛날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경우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그의 그림에 이끌려 모사를 하기도 했고, 대학교 시절에는 어빙 스톤이 쓴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Lust for Life]를 밤을 새워 읽고는 그가 미술에서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듯이 문학을 향한 내 열망을 공고히 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이 뿜어내는 강렬한 색채와 힘차고 개성적인 붓터치가 가슴에 와닿긴 해도 미술에 대한 감식안이 높지 않은 나로서는 그가 동생 테오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드러나는 그의 인생, 온갖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그의 삶의 궤적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된 3권짜리 그의 편지 전집을 다 읽고 삼분의 일 정도 분량을 번역해 보기도 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고흐가 1853년 생이고 폴란드 출신인 콘래드는 1857년 생이니, 두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런데, 고흐와는 달리 콘래드는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는 폴란드 출신으로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성인이 될 때까지 영어를 거의 몰랐고, 십 대 후반부터는 20년 가까이 선원 생활을 하다가, 마흔이 다 되어서야 영어로 첫 소설을 발표했다. 영문학에 유럽 대륙의 시각을 도입하여 영문학의 지평을 확장한 공을 인정받는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지도가 고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떨어지는 이유는 그의 작품의 복잡성과 난해성 때문일 것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나의 경우에도 그의 작품은 쉽사리 공감하기 힘들었으며 여러 번 공들여 읽은 다음에야 그의 작품의 진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우연찮은 계기로 나는 그의 작품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쓰려고 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매듭을 짓지 못했다. 하지만, 고흐와 마찬가지로 그의 경우에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삶의 굴곡들이 그의 작품보다도 더 가슴에 와닿기도 했다.
동시대인이긴 하지만, 국적도 다르고 활동 반경도 다른 데다 한 사람은 화가이고 다른 사람은 선원에서 소설가가 되었으므로, 두 사람은 연결 고리가 없을 듯한데,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고흐가 자살할 당시 그의 담당의사였던 프랑스인 폴 가셰를 매개로 해서 연결된다. 폴 가셰의 질녀가 마르그리트 포라도프스카이고, 그녀의 남편인 폴란드 출신 알렉산더 포라도프스키는 콘래드 외할머니의 사촌이었다. 아주 가까운 친족은 아니지만 콘래드보다 아홉 살 연상인 마르그리트는 그가 첫 소설을 발표할 당시 이미 두 권의 소설을 낸 작가였기 때문에 콘래드는 그녀와 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큰 도움을 받았다. 거기다 알렉산더 포라도프스키가 죽고 난 다음부터 콘래드는 미모가 출중했던 그녀에게 연정을 품었고, 이 당시 그녀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가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녀에게 청혼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하나 두 사람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두 사람 다 외제니Eugene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을 당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화상을 하던 고흐는 하숙집 주인의 딸을 사모하여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았고, 선장으로 모리셔스에서 몇 달간 체류하던 콘래드는 거기에서 만난 외제니라는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역시 퇴짜를 맞았던 것이다. 또 공교롭게도 두 여성은 모두 이 당시 약혼한 상태로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고흐와 콘래드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고흐는 이 사건으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화가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콘래드의 경우는 그 상처가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던 듯하다.
내 인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두 인물이 서로 다른 삶의 궤적에서 이렇게 교차한다는 것이 나에게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1891년 고흐가 자살하고 일 년이 지난 시점(이때까지도 고흐는 거의 무명작가에 지나지 않았다)에 콘래드는 폴 가셰가 소장하고 있던 고흐의 그림들을 감상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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